공생원 사랑의 가족 기념비 윤학자 여사 제1회 목포시민상을 수상하는 윤 여사(1965) 윤학자 탄생지비(고지현) 윤학자 여사 가족사진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 1965년, 목포시는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를 정하기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압도적 1위를 받은 분이 일본인 윤학자였다. 윤학자(尹鶴子, 1912~1968)가 얼마만큼 목포 시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인물인지는, 그가 1968년 폐암으로 타계했을 때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장에 3만여 명의 목포 시민이 참석, 그녀의 마지막을 애도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시 목포의 인구가 16만 명 정도였으니, 조금 과장하면 목포 시민 모두가 운 셈이다. 그녀의 장례는 최초의 목포 시민장이었다. 그날 조선일보는 사회면 머리 기사로 "목포를 울린 장례식, 명복 빌어 첫 시민장"이라...
최도철 기자2022.10.05 16:15이광사 문화거리에 설치된 '서결' 기념물 동국진체의 완성자, 이광사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의 원교 이광사(李匡師, 1705~1777) 글씨는 추사 김정희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1세기 정도 후대의 인물인 추사가 1840년 제주도로 귀양가던 중 초의선사를 찾아 대흥사에 들른다. 그리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의 현판을 보고 촌스럽다고 깎아내리면서 떼어내고 자신의 글씨로 대신하게 한다. 조선적인 조형성을 추구한 동국진체에 대해 추사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유배가 풀려 8년 만에 다시 대흥사를 찾은 추사는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찾아 걸도록 했다. 중국 중심의 전통 서법을 추구했던 추사도 조선 고유의 서체인 동국진체의 진가를 인정한 것이다. 이광사는 김정희의 마음을 미리 예견했는지 "마음의 바탕이 밝고 정직하지 못하거나 학식의 도량이 ...
편집에디터2022.09.15 13:58심적암 의병 위령탑(대흥사 입구) 심적암 전투지 안내판 '남한폭도대토벌작전' 당시 체포된 호남 의병장들(윗줄 맨 왼쪽이 황두일) 심적암 현장의 우물터 황준성(黃俊聖, 1879~1910)은 대한제국 국군의 참령(參領)이었다. 국권 피탈 과정에서 이루어진 군대 해산에 반대한 후 완도와 해남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저항하다 순국한 인물이다. 참령은 계급 체계상 현재의 소령에 해당되지만, 당시는 대대장으로 3품 품계였고, 장군으로 불렸다. 지금의 소령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급 군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의 황궁과 황실을 지켰던 박승환 시위대 1연대 1대대장이 군대 해산에 반대하고 자결하였는데, 당시 계급이 참령이었다. 참령 이상으로 의병장이 된 분은 만주에서 활동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지낸 이동휘와 황준성, 두 사람뿐이다. 이동휘는 군대 해산 당시 참령으로 강화진위대...
편집에디터2022.08.24 15:14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 속 김재호(원안 인물) "3·1운동의 주동자는 나다.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더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볼 테면 해봐라!" 광주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김복현(金福鉉, 1890~1969)이 법정에서 한 말이다. 이후 김복현은 '철(鐵)'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면서 김철로 불린다. 그는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되지만, 그가 꿈꾼 통일 조국의 꿈을 가슴에 묻은 채 생을 마감한다. 김철이 남긴 항일 정신은 장남 김재호(1914~1976)로 이어진다. 김재호는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 단원이 되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치열한 독립전사였다. 김철에서 김재호로 이어지는 항일 정신의 뿌리는 한말 나주 의병을 이끈 김철의 부친 의병장 김창곤이었다. 할아버지를 이어 아들이, 그 아들의 아들이 또 하...
편집에디터2022.08.10 16:18매천의 초상화, 그 자체가 역사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황현(黃玹, 1855~1910),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그의 얼굴만으로 충분하다. 얼굴은 그가 살아온 그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황현의 제자 김상국은 「매천 선생 묘지명」에서 황현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체구는 작으나 정갈하고, 이마는 넓어 얼굴의 삼분의 이를 차지하고, 눈은 틀어진 듯하나 번개 치듯 빛나며, 사람을 볼 때 안광이 하늘에 비치고, 수염은 용과 같이 가볍고 시원스럽게 펼쳐진 듯하였다." 김상국이 쓴 묘지명은 매천의 외모를 표현하고 있지만, 그의 정신세계를 헤아리게 해 준다. 황현의 인물 사진 두 장도 남아 전한다. 삶을 마감하기 직전인 1909년, 소공동 대한문 앞에서 해강 김규경이 운영하는 사진관 '천연당'에서 찍은 것이다. 한 장에는 테두리 오른쪽에 친필로 '매천 55세 소영(梅泉...
편집에디터2022.07.27 09:49최지몽을 모신 사당, 국암사(영암 서구림리) 최지몽 위패(국암사 안) 고려태사 민휴공 최지몽 유허비(영암 동구림리) 천문·복서에 정통 고려 태조 왕건의 꿈 해몽으로 유명한 최지몽(崔知夢, 907∼987)은 효공왕 11년(907), 전남 영암에서 원보(元甫) 최상흔의 아들로 태어난다. 영암 출신인 풍수의 대가 도선국사가 입적한 8년 후다. 지몽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총진(聰進)이었다. 지몽의 가문이 어떠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부친의 품계가 원보인 것을 보면 영암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호족 집안으로 추정된다. 원보란 고려 초 건국 유공자 및 지방호족에게 주던 벼슬의 등급인데, 4품 하계(下階)로 16관계 중 제8위에 해당한다. 문종 30년(1076)에 제정된 경정전시과 규정을 보면 원보는 제13과에 속하여 전(田) 35결과 시(柴) 8결을 받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삼...
편집에디터2022.07.13 15:37전남운동협의회 핵심 인물(매일신보, 1934년 9월 10일자)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관련 500여 명 검거를 보도한 동아일보(1934년 6월 13일자) 전남운동협의회 서기 김홍배의 집터(해남군 북평면 이진마을) 전남운동협의회 결성지, 성도암(해남군 북평면) 동아일보, 연일 대서특필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북평면 성도암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라는 농민조직이 결성된다. 하지만 전남운동협의회는 1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해체된다. 1934년,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으로 강진의 윤가현이 체포되면서 조직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1934년 2월, 전남경찰부 고등과 특별고등계 주임 노주봉의 지휘로 각 군의 경찰서가 모두 동원되어 해남·완도·장흥·강진·영암 등으로 수사가 확대된다. 그 결과 해남을 비롯한 9개 군에서 6개...
최도철 기자2022.06.29 15:18이진마을 표지석 항일운동의 성지, 이진마을 해남군 북평면에 위치한 이진마을은 완도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마을 서쪽에는 달마산(470미터)이, 북쪽으로는 대흥사를 품은 두륜산이 보인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제주도와 내륙을 연결하는 포구로 이용되었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만든 『대동지지』에는 "이진진(梨津鎭)은 한양에서 950리(약 37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성에는 해월루(海月樓)가 있다. 제주로 들어갈 사람은 모두 여기서 배를 타고 떠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배의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말과 함께 싣고 온 현무암이 지금도 이진마을에서 발견되고 있는 이유다. 제주도와 뭍을 연결하던 교통의 요지였던 이진마을은 한때 300호가 넘었다고 한다. 시골 마을 300호면 대단한 규모의 동네다. "북평면 면장할래? 이진마을 이장할래?"하면 이진마을 이장한다는...
편집에디터2022.06.15 16:01나주 금성관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최초로 거의한 의병장은 나주 출신의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이다. 김천일은 중종 32년(1537) 외가인 나주 흥룡동에서 김언침과 양성 이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난다. 흥룡동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처 장화왕후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고려 2대 왕인 혜종의 탄생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김천일의 옛집, 즉 부친의 집은 담양부 창평현 태산리(현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였지만, 모친이 친정에서 낳았으므로 나주인이 된다. 김천일은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다. 태어난 지 이튿날 모친 이씨가 돌아가셨고, 7개월 만에 부친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이유다. 그는 15살이 된 명종 6년(1551) 작은아버지 김신침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한 후, 19세가 되던 1555년(명종 10) 당시 ...
편집에디터2022.05.25 16:35고정주 영정 규장각 직각을 박차고 낙향하다 임진왜란 당시 담양에서 거병했던 학봉 고인후(高因厚, 1561~1592)가 부친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다. 그리고 학봉의 5남매(4남 1여)가 맡겨진 곳이 외가였던 창평이었다. 외조부모는 사고무친의 외손들을 따뜻하게 보살핀다. 학봉의 후손들이 창평에 세거(世居)하게 된 이유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 주권을 상실한다.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자강론(自强論)이 등장했다.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과 투쟁을 통해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무장투쟁론이다. 이들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일어섰다. 바로 한말 의병이다. 학봉의 후손들도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자 목숨을 걸었다. 학봉 11대 사손(祀孫, 봉사손)이던 녹천 고광순(...
최도철 기자2022.05.11 16:20전라좌수영 관할 녹도진의 만호(萬戶) 정운이 배향된 흥양(고흥) 녹도진 성안의 쌍충사(雙忠祠). 정운 영정(충절사) 충장공 정운 장군 신도비(해남) 정운을 기리기 위해 '정운함'이라 명명한 해군 잠수함. 조선 수군의 신망을 받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관할 녹도진의 만호(萬戶)는 정운(鄭運, 1543~1592)이었다. 정운이 임진왜란 당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선조 27년(1594) 8월 12일자 『선조실록』의 다음 대화가 적격이다. 선조가 "임진년 이후 우리 군대가 움츠리기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유성룡이 "정운이 죽은 후 수군의 사기가 꺾인 탓에 교활한 적병에게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가벼이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정운이 1592년 9월 1일 부산포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조선 수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고, 그래서 아군이 물러서기만 ...
편집에디터2022.04.27 16:344.19 광주 학생 시위 최대 격전지인 광주경찰서(현 동부경찰서 자리)에 1천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 들었다. 4.19당시 광주고 정문 곡 민주주의 시위 4.19혁명 기념탑 곡(哭) 민주주의 장송 시위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자 광주의 민주당 전남 도당은 투표소 참관인의 철수를 지시한 후 '부정선거 규탄 거리 시위'를 하자는데 뜻이 모아진다. 그래서 제작된 플래카드가 '곡(哭) 민주주의'였고, 훗날 민주주의 장송(葬送) 시위(데모)로 불리게 된 이유가 된다.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장송 시위는 전국 최초의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였다. 당시 민주당 중앙 당사에서는 4시 30분 선거 무효를 선언했고, 마산에서는 이보다 앞선 3시 30분에 선거 무효를 선언한 후 시위가 시작된다. 그러나 민주당원이 중심이 된 금남로의 광주 시위는 이보다 앞선 12시...
편집에디터2022.04.13 17:16고광순 부대가 사용한 의병기 '불원복기' 고광순 묘(대전 현충원) 녹천 고광순 의병장 초상화 창평 유천리에서 태어나다 호남은 임진의병에 이어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였다. 전라도는 1908년 일본군과 전투 횟수의 25%와 의병 수의 24.7%를, 1909년에는 전투 횟수의 47.2%와 의병 수의 60%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전라도는 어디도 의병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시기 가장 돋보이는 활동을 한 분이 전라도 의병의 선구자로 불리는 녹천 고광순이다. 일제하 호남 8대 의병장으로 불린 녹천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1848년 창평현 현내면 유천리(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고정상과 광산 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창평은 임란 당시 부친 고경명과 함께 거병한 후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학봉 고인후(高因厚, 1561~1592)의 처가였다. 인후가 순국...
편집에디터2022.03.30 16:42호남 보건교육의 메카, 광주보건전문대학교 전경 평생 교육의 외길을 걸은 정부 학장 서원전문학교 시절 입학식 간호학과 예비 의료진 코로나19 시대, 국민의 건강을 지켜내는 보건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다. 지금으로부터 꼭 50년 전 국민의 건강이 중요함을 절감하고 호남 최초의 보건대학을 설립한 분이 있다. 정부 박사가 그다. 그러나 오늘 정부 박사를 아는 자는 거의 드물다. 호남 최초로 보건대학을 설립한 정부,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평생 교육의 외길을 걷다 정부(鄭 , 1911~2012)는 1911년 12월 8일 전남 함평에서 출생한다. 호는 남재(南齋)다. 16세 때 전남 함평군 문장리의 귀밀교회 교회학교를 통해 기독교에 입문한다. 교회는 신앙 활동의 근간이었지만, 교육 기회가 적었던 당시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숭일학교 보통과를 졸업한 그는 1...
편집에디터2022.03.16 16:48고흥군 포두면 길두리 안동마을에 창건해 정걸(丁傑) 장군 등의 신위를 모신 안동사 사당. 정걸 장군 정걸 장군 신도비 정걸 장군 교지 전라·경상·충청수사를 다 역임하다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의 곁을 지킨 영웅이 있었다. 흥양(지금의 고흥) 출신의 정걸(丁傑, 1514~1597)이 그다. 정걸은 이순신보다 31년이나 대 선배였지만, 까마득한 후배 이순신을 상관으로 모시며 불멸의 이순신을 만든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늘 정걸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순신을 불패의 신화로 만든 정걸은 중종 9년(1514)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길두리에서 태어난다. 중종 39년(1544)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 선전관, 서북면 병마만호를 역임했다. 그가 무과에 급제한 해인 1544년은 이순신이 태어나기 1년 전이었다.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 당시 해남·강진 등지에 출몰한 왜구를...
편집에디터2022.03.02 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