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공프로젝트 시즌3', '지속가능, ESG로 답하다'의 이번 이야기는 환경(E)입니다. 환경문제 중에서도 심각한 바다 쓰레기 문제입니다. 직면한 해양 쓰레기 문제는 심각합니다. '쓰레기 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해양으로 유입된 플라스틱과 같은 쓰레기는 바람과 파도로 인해 지속적으로 섞이고, 해양 표면과 물기둥 상단에 걸쳐 넓게 분포됩니다. 쓰레기들이 잔뜩 모여 해양 쓰레기 더미를 이룬 곳을 '쓰레기 섬'이라고 합니다. 쓰레기 섬에 모인 쓰레기의 대부분은 다양한 낚시 그물과 플라스틱입니다. 46%가 그물과 같은 버려진 어구...
홍성장 기자2021.07.05 17:33전남일보가 '공프로젝트 시즌3'를 시작합니다. '지속가능, ESG로 답하다'입니다. 공프로젝트 시즌2였던 '지속가능은 가능한가'에 대해 전남일보가 내놓은 실천적 답변입니다. ESG는 시대적 화두이기도 합니다. Environment(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구조)'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로 기업 활동에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구조 개선 등 투명 경영을 고려해야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ESG는 개별 기업을 넘어 자본시장과 한 국가의 성패를 가를 키워드로 부상하고 ...
홍성장 기자2021.06.08 17:42지난 2015년부터 이어져 왔던 전남일보 공공캠페인인 '공'프로젝트가 4년5개월의 대장정을 마친다.'공'프로젝트는 사회 전반의 본질을 짚어보고 화두를 던지기 위해 출발했던 공공캠페인이다.'공'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겼다. 공익(public interest), 즉 공공성 회복을 뜻하는 '공'(公)과 '공'(共)의 의미다. 여기에 아라비아 숫자 '0', 영어의 'Zero'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본(basic)'에서 다시 출발하자는 뜻도 담겨있다.욕심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삶의 고통(번뇌)을 줄일 수 있다는 불교의 '공'(空) 사상과 사회 공헌의 '공(貢)'의 뜻도 포함하는 등 다양한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전남일보의 '공'프로젝트는 '본질을 묻다'(2015), '공익(公益)을 실천하면 공존(共存)이 열립니다'(2016), '동행(同行), 함께 만들어갈 사회의 시작입니다'...
노병하 기자2019.06.02 18:201980년 5월. 그것은 전쟁이었다.사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고, 방금 숨을 거둔 시체를 지나쳐 다른 환자에게 가고 있다.이제 겨우 아이티를 벗은 10대가 총에 맞았고, 곤봉에 머리가 터진 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손에 묻은 피가 닦아질 틈도 없이 다음 환자가 밀려 들어왔다.잠을 자는 것, 먹는 것조차 미안하던 그 봄이 그렇게 피비린내 속에서 지나갔다.그런데 세상은 고요했다. 광주를 제외한 어디서도 분노의 목소리는 없었다.1980년대 후반부터 광주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면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앳된 얼굴의 대학생들이 전경들과 치열하게 대치할 때쯤 서로의 팔짱을 낀 어머니들이 도로에 선 것이다.이들은 광주 오월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오월의 저항에 모성애가 있음을 알린 이들이었으며, 나아가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오월어머니회로 그 뿌리가 이어진다.안성례 오월어...
채창민 기자2019.05.08 18:23안성례 오월어머니집 설립자가 오월 어머니들의 한(限)을 이야기 하고 있다. 김양배 기자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광주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질 때쯤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앳된 얼굴의 대학생들이 전경들과 치열하게 대치할 때쯤 서로의 팔짱을 낀 어머니들이 도로에 선 것이다."아그들아 다칠라. 물러나 있어라. 인자부터 엄마들이 나설랑께."최루탄 속에서 집회를 하던 대학생들은 "아따 어머니 뭣하러 나오요. 다친당께라"라고 만류하지만, 어머니들은 "느그들이나 저짝 가 있어. 다치믄 니 엄니 속 터진다"라며 전경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이들이 바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일명 '민가협' 소속 어머니들이었고 회장은 안성례 여사였다. 대부분이 80년 5월 군인들의 총칼에 학살된 가족을 둔 여성 운동가들이었다.이들은 광주 오월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오월의 저항에 모성애가 있...
노병하 기자2019.05.06 18:11하물며 평화롭던 집 앞에서… 내 새끼고 남의 새끼고 죽어 자빠지는 판국에 가만 있을 엄마가 어딨단가. 우리 병아리들 죽이고 간 솔갱이들은 저리 살아 멀쩡한디, 어미들 보고 싸우지 말라는 것은 말이 안되잖어. 왜 싸우느냐 그만 묻고,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지나 말해주소. 이 질기고 긴 싸움을 이 엄마들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말이여. 다시 정의(正義)를 생각한다
노병하 기자2019.05.06 18:12"100년뒤의 대한민국은 자주독립을 이루었소?"REP〉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에는 독립운동가 일강 김철 선생의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김철 선생은 3·1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자금 모금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입니다.그리고 그가 마련한 자금을 기반으로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가 세워졌습니다.당시 국무위원을 맡은 김철은 백범 김구, 도산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이끌었습니다.INT〉 김만선 일강 김철 후손"일강 김철 할아버지께서는 호남의 대표적인 애국지사 독립운동가입니다.임시정부의 요원으로서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시며 의정 활동을 하셨고, 신안청년단 조직과 한인애국단에 참여하셨습니다."REP〉 김철 선생은 1934년 중국 항주에서 48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사인은 과로로 인한 급성폐렴.그리고 11년후 그가 그렇게 염원한 광복이 되었지만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
채창민 기자2019.04.01 17:24독립운동가 김철 선생 후손 김만선씨."신의 도끼로 귀신을 주살하는 것이 역사의 대의다. 해가 뜨고 달이 두루 비치니 강과 산이 모두 정연하다." (독립신문 1921년 1월1일자 '신년의 감상'이라는 제하의 일강 선생의 글)● 영웅의 탄생천석꾼의 셋째 아들이었다. 비록 나라가 일제의 수탈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처신만 잘하면야 한 생 넉넉하게 지내고도 남았다.더하여 공부도 오래했다. 어려서는 영광군 묘량면에 있는 외가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8년 영광 광흥(光興)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했다.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1915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그가 1886년 10월 생이니, 29살까지 공부를 이어간 것이다. 구한말에서 일제시대에 이러한 배움을 가질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되었을까.많이 배우고 많...
노병하 기자2019.03.31 14:24조선이 국호였던 시대인 1886년 10월15일 생이다.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구봉마을에서 태어났다.4남 1녀중 3남. 1908년 영광에 있는 광흥중학교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하고,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마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2년 뒤인 1917년 2월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1918년 8월20일 중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 백미로 25호에서 김철은 여운형, 장덕수, 조동호, 선우혁, 한진교 총 6명과 함께 발기인이 되어 신한청년당을 창당했다. 이 즈음 김철 선생은 신한청년당 부주무로서 기관지 '신한청년'을 발간했으며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도 역임했다.1919년 1월 김철 선생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각국에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서병호, 선우혁과 같이 국내에 밀입국해 자신의 전답을 정리해 독립자금 1만원을 마련, 상해로 가...
노병하 기자2019.03.31 14:21독립운동가 김철 선생 후손 김만선씨. 전남 한평군 신광면 김철 선생 기념관.고향 함평을 떠나올 때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멀고 먼 상해까지 가는 길, 열차의 차창에 기대어동지들과 만든 새로운 조국의 이름, '대한민국'을마음으로 몇 번이고 서럽게, 벅차게 되새겼다.… 100년이 지난 2019년 대한민국,그는 조국을 위해 쓰러졌지만 조국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과연 그의 정의는 실현 됐을까? 김철 선생과 그의 손자 김만선씨/ 함평 일강 김철 기념관/ 김양배 기자 독립운동가 김철 선생 후손 김만선씨. 전남 한평군 신광면 김철 선생 기념관.
노병하 기자2019.03.31 14:21"인터뷰가 힘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전화기 너머로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 대표는 3월 공프로젝트의 인물로 선정된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의 수제자 같은 존재였다. 오마이뉴스 기자였던 그가 소명처럼 이 길에 뛰어 든 것이 바로 이 전 회장 때문이었다. 때는 2008년 이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국적포기 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꼿꼿한 조선 여인, 그 자체였습니다. 당당하면서 품위가 넘치신 분이었죠.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를 직접 눈으로 본 느낌이었습니다." 이 대표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 뵌 이 전 회장님은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는 피해자였는지 모르지만, 해방 후의 이 전 회장님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여전히 해방을 맞지 못한 그래서 일제와의 싸움을...
노병하 기자2019.03.03 19:31빛바랜 흑백사진 속의 스무살 신부 옆에는 키가 큰 신랑이 서 있다. 신부도 부끄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1940년 10월10일의 행복한 사진 한 장. 2년 뒤 남편은 일제에 의해 끌려갔다. 그리고 1943년 '길버트 제도 다리와에서 사망. 충렬(忠烈)하게 전사한 데 대해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라는 전사 통지서 한 통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그때부터 그녀의 싸움이 시작됐다. 이금주(99) 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 사단법인 태평양전쟁유족회 이사(1988년)이었으며 호남문화진흥회 고문(2006년)을 역임했고, 일제강점하강제동...
노병하 기자2019.03.03 19:32REP> 태평양전쟁 희생자 광주 유족회.일제시대 전쟁 피해자를 위해 헌신한 이금주 할머니 집에 걸려있던 현판입니다.이금주 할머니는 일제 강제동원으로 남편을 잃은 피해자입니다.1942년 신혼의 부부는 남편의 강제징용으로 인해 생이별하고 맙니다.그 후 홀로 아들을 키운 이(금주) 할머니에게 돌아온 건 남편이 아닌 남편의 전사 통지서.그렇게 이(금주) 할머니는 남편의 이야길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합니다.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수많은 소송을 주도하며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습니다.INT>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이금주 회장님은)"조그만 책상을 놓고 뭔가를 쓰고 계시고 자료를 방바닥에 놓고 이것저것 자료를 정리하시던 모습이었어요.""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일을 추슬러 온 모습이 꼭 꼿꼿한 조선 여인의 모습을 보는 듯한 힘과 기개가 느...
채창민 기자2019.03.03 18:32공프 이금주(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 할머니. 순천시 별량면 000요양병원."어디서 오셨소?"말투는 흐렸다. 허나 일본이야기가 나오자 안광에 힘이 돌아왔다."나쁜 사람들이지…암, 나쁘고 말고."징용 가서 사망한 남편 이야기를 묻자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더는 묻지 못하고 앉아 있자, 이번엔 이쪽을 바라보고 다시 묻는다."어디서 오셨소?"그 웃음이 너무 환해 마음이 미어졌다. 그녀는 아직도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 순천 모 요양병원/ 김양배 기자
노병하 기자2019.03.03 16:18겨울치고는 생각보다 따뜻한 1월의 어느 날이었다. 프로젝트 섭외 대상이라는 전화에 쾌활한 목소리로 "그런데 어쩌죠. 저희 사무실은 비좁고 문패도 없어요. '같이돌봄가게'에 얹혀 살거든요. 오시는 것은 좋은데 사진 찍기가 힘드실 거예요"라고 답한다. 너무 쾌활해서 잠시 농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몇 군데의 장소가 거론되고 결국은 전남일보 본사로 결정됐다. 보통 이런 인터뷰는 편한 장소나 자신을 표현하기 좋은 장소에서 하기 마련인데 그녀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허나 왜 그런지는 대화를 해보면 금방 알수 있다. 그...
노병하 기자2019.01.31 13: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