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있었것소. 죽으면 죽으리라 사필귀정 그 하나로 싸웠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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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있었것소. 죽으면 죽으리라 사필귀정 그 하나로 싸웠을 뿐
안성례 오월어머니집 설립자||39년 됐어도 여전히 싸우는 ||오월 어머니들의 맏언니||80년 5월 죽어가는 시민들 ||잔인무도 정권에 분노.절규||여성 운동가로서 한평생 ||광주위해 싸운 이 시대 어른||“오월 진실 반드시 밝혀야”
  • 입력 : 2019. 05.06(월) 18:11
  • 노병하 기자

안성례 오월어머니집 설립자가 오월 어머니들의 한(限)을 이야기 하고 있다. 김양배 기자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광주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질 때쯤 나서는 이들이 있었다. 앳된 얼굴의 대학생들이 전경들과 치열하게 대치할 때쯤 서로의 팔짱을 낀 어머니들이 도로에 선 것이다.

 "아그들아 다칠라. 물러나 있어라. 인자부터 엄마들이 나설랑께."

 최루탄 속에서 집회를 하던 대학생들은 "아따 어머니 뭣하러 나오요. 다친당께라"라고 만류하지만, 어머니들은 "느그들이나 저짝 가 있어. 다치믄 니 엄니 속 터진다"라며 전경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들이 바로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일명 '민가협' 소속 어머니들이었고 회장은 안성례 여사였다. 대부분이 80년 5월 군인들의 총칼에 학살된 가족을 둔 여성 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은 광주 오월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오월의 저항에 모성애가 있음을 알린 이들이었으며 나아가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오월어머니집으로 그 뿌리가 이어진다.

 그 중심에는 안성례 여사가 자리했다.

 안성례 오월어머니집 설립자. 수많은 호칭과 행적에 따른 지위가 있지만, 광주 오월의 어머니이자 오월어머니집을 만든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 그래서 광주 기자들 사이에서도 '어머니'로 통하는 사람이다. 실제 이날 인터뷰에서도 필자는 안 여사를 '어머니'라 불렀다. (대화는 편하게 이뤄졌으나 본문에는 존대어로 기재한다)

 그렇게 서른아홉번째를 맞는 5월의 어느 날, 그녀를 만나 광주의 봄 이야기를 나눴다.

 - 어머니(안성례 설립자)는 여성운동가이자 시의원이었으며 광주시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인생을 바꾼 계기는 5·18 민주화운동이었다. 자세히 말해 달라.

 △80년 5월 전에는 되레 국방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감사함을 가지고 있었지요. 오죽했으면 제가 1949년도 초등학교 때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많이 쓴 아이로 상도 받았어요. 그런데 그 군인들이 광주에 와서 시민들을 칼로 찌르고 곤봉으로 두들겨 패고 무차별하게 사람을 죽이고 병원에 실려 온 숱한 부상자들의 참담한 모습에 내가 돌아버렸소.

 이럴 수가! 권력이 무엇이기에, 무슨 죄가 있다고 사람들을 죽이나.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 광주를! 나는 크게 분노를 느꼈소. 저 불법 부당한 전두환과 계엄군에게 희생당한 시민들을 보면서 그전에 내 가정 등 사사로운 일상은 없어져 버렸지요. 바로 전두환 때문에 말이오.

 내 가족이 당한 것처럼 분노만 솟구쳤소. 이어서 우리 남편인 명노근 교수가 평화적 수습을 위해서 노력했는데 내란음모로 고문을 당하고 감옥을 살고 참여자들을 무작정 보안대, 상무대로 끌고 가 가혹한 고문을 자행했소. 거기 갔다 온 사람들은 일주일 후에 죽기도 하고 정신이상이 되기도 한 이런 현실을 보고 내가 변하지 않을 수 있겠소. 누구도 이런 반인륜적이고 잔인무도한 정권의 현실을 목도한다면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오.

 -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맞서 싸운 상대는 참으로 강하고도 높은 벽이었다. 어떤 각오로 그 긴 싸움에 임했나.

 △뭐가 있었것소. 그저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나 당신들은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라는 각오로 임했지요. 악한 행위는 반드시 죄의 대가를 치르게 되고 진실은 이긴다는 사필귀정 하나만 있었을 뿐입니다.

 사실 그 이전에 나는 자상한 엄마, 평범한 직장여성, 아내였었지요. 교회를 통해서 신앙 활동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정의, 평화, 사랑 이 세 가지 뜻을 이루는 데에 전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병원으로 밀려들어 오는 사람들과 그들을 부여잡고 눈물만 흘리며 아이 좀 살려달라는 어머니들, 비명과 울분이 광주를 가득 메웠지요.

 죽어버린 환자를 앞에 두고 피눈물을 흘리며 다른 환자로 달려가면, 죽은 환자의 어머니가 치마를 잡아요. "내 아들 가슴팍이 이리 따뜻한데, 아직도 뜨거운데 어디가요. 좀만 더 보고 가요. 왜 응급실이 아니고 장례식장으로 보내요" 그 어머니 손을 잡고 나도 울고 말았습니다.

 죄송하다고, 살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다고.

 벽이 높냐구요? 높지요. 절대 권력자 아니었습니까. 지금도 저리 큰소리치고 있으니 그전에는 오죽했을까요. 허나 그때 그 어머니들의 통곡을 들은 이라면, 벽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그랬습니다.

 -무엇인가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란?

 △그러니까 말이요. 정의란 무엇일까. 나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마이클 샌들의 책에선 정의는 상대적이라는 뉘앙스를 받았소. 그건 아니라고 보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절대적인 가치요. 올바른 것이며 모두를 이롭게 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라고 봅니다. 인간의 삶이나 국가 또는 세계 어디서든지 반드시 기본이 되는 가치 말입니다. 그것이 정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또 때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정의라고 한다면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은 뭐가 됩니까.

 아니 그건 희생이 아니지요. 목적에 의한 살인이지요. 정의란 그래서는 안 됩니다.

 - 지금 이 시대는 어머니, 당신이 생각하는 정의가 이뤄지고 있는가

 △(잠시 고민하더니) 글쎄요. 그동안 누적된 불법, 부당함을 바르게 하고자 문재인 정권이 몸부림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대통령 혼자서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럼에도 변해가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에 국민들의 의식이 변하면서 이런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고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온전한 정의의 시대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만 앞선 10년에 비해 희망은 있습니다. 정반합의 역사적 필연 속에서 정의는 이루어진다고 믿는데, 지금이 바로 필연의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안성례는 누구

80년 5월… 남편 명노근 교수 구속… '광주 오월의 어머니'로 민주화 운동 헌신

 1980년 5월, 광주에서 비극이 발생한 이후 39년간 그녀의 목소리가 광주지역 미디어에서 사라진 날은 없었다. 빈도수가 줄어 들었을 뿐, 그녀는 늘 어딘가에 서 있었다.

 안성례. 전 광주광역시의회 의원이자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전(前) 이사이며 오월어머니집의 설립자. 그 외에도 그녀를 지칭하는 수많은 단어가 있지만, 가장 확실한 한마디는 '광주 오월의 어머니'다.

 1938년 함평 출생. 엄한 아버지 밑에서 6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여자가 똑똑하면 사회에서 안받아준다"는 아버지의 말에 전남여중을 마치고 학업을 포기해야 했었다.

 그때 그녀를 아까워 한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기숙사가 있는 간호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다. 21살에 아버지의 결혼 압박에 고 명노근 교수를 지인 소개로 받아 결혼한다.(본인이 소개팅을 해달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5남매를 낳았다. 여기까지가 오히려 잘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개인적인 삶이다.

 그녀의 삶을 비튼 것은 시대였다. 세상에 크게 알려질 것이라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남편과 오순도순 아이들 키우며 살고 싶었던 한 간호사가 광주 오월의 어머니가 되던 시대.

 "전쟁이었죠. 사방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밀려들어 왔어요. 방금 숨을 거둔 시체를 지나쳐 다른 환자에게 가고 있는데, 그 어머니가 저에게 왔어요. 아직 가슴이 따뜻하다고, 이리 따뜻한데 왜 응급실이 아닌 장례식장으로 보내냐고. 한번만 더 봐달라고…"

 이제 겨우 아이 티를 벗은 10대가 총에 맞았고, 곤봉에 머리가 터진 이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손에 묻은 피가 닦아질 틈도 없이 다음 환자가 밀려들어왔다.

 어머니들은 눈물마저 꾹꾹 눌러 참은채 자신의 아이를 간호사나 의사가 한번이라도 더 쳐다봐주길 간절히, 아주 간절히 손을 떨며 기다리고 있었다.

 정상인도 미쳐갈 수밖에 없는 공포 속, 그녀를 버티게 한 것은 분노였다. 시퍼런 분노.

 "우리는 사람 하나를 살리려고 이리 발버둥 치는데 국민을 지킨다는 저 군인들은 손가락 까딱 한 번에 목숨을 앗아가나. 이들이 뭘 잘못했다고."

 잠을 자는 것, 먹는 것조차 미안하던 그 봄이 그렇게 피비린내 속에서 지나갔다.

 그런데 세상은 고요했다. 광주를 제외한 어디서도 분노의 목소리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간첩'이라고 했다. '빨갱이들이 내려왔다'고 했다.

 그 와중에 남편인 명노근 전남대 영문과 교수가 별 이상한 이유로 잡혀 들어갔다. 이를 악물었다. 5남매의 어머니 안성례에서 광주 오월의 어머니 안성례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장을 맡아 5·18 진상규명과 구속자 석방을 위해 투쟁해왔다. 그녀가 서울로 올라오면 관련 단체들은 문을 걸어 잠궜다. 그러나 지치지 않았다. 지칠 틈이 없었다. 이후 광주시의원으로 일하며 '전국 최초 3선 여성시의원'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초대 광주시의회 부의장, 광주시의회 5·18특별위원회 위원장도 역임했다. 이윽고 오월어머니집을 만들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죠. 딸이 그랬어요. 엄마는 광주의 어머니일지는 몰라도 우리 엄마는 아니라고…"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했다고. 그 엄혹한 시대에 맞서서 엄마들이 할 일은 자식들을 지키는 것이었고, 그 엄마들이 다치지 않도록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은 자신의 일이었기에 달려왔다는 그녀.

 "나와 명 교수(부군)는 '나라가 바로 돼야 하고, 평화만이 인간이 살 수 있는 기본이다'는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헌신했습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민주화 투쟁을 하다 보니 고생을 많이 했지요. 그러나 후회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지면에 어떤 타이틀로 나가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곧바로 '오월어머니집 설립자'로 나갔으면 한다고 답했다.

 "오월 엄마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일 중 하나입니다. 나는 정치인이었던 적이 없어요. 정치를 통해 오월을 이야기한 것 뿐이죠."

안성례 오월어머니회 설립자 - 채창민 기자
노병하 기자 bhn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