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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세대에 완전한 역사를 쓸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정보를 입수할 수 있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으므로, 종래까지의 역사를 치워버릴 수 있고, 전진의 도정(道程)에서 우리가 도달한 지점을 보여줄 수 있다.”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2015)’의 한 구절이다. 역사가 완벽한 객관성을 담보하거나 추구할 수 있을까.아니, 그보다 먼저 문제 삼을 것은 도대체 역사란 무엇일까.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 했고 아놀드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의 역사라고 ...
2024.07.25 18:43마당에 작은 연못을 두고 붓꽃이며 창포며 산나리꽃이며 원추리 따위를 심었다. 사월의 철쭉을 지나 오월엔 창포와 붓꽃, 유월엔 원추리, 칠월엔 산나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내 작은 연못의 물비늘을 벗한다. 붓꽃과 창포는 너무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힘들다. 꽃이 피기 전 봉오리를 맺은 모습이 마치 붓과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 붓꽃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꽃들이 모두 수려하니 으뜸이 따로 있겠는가만 붓꽃에 눈길이 머무는 것은 아마도 연한 자주색을 탐하는 심미안의 발현이리라. 붓이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도구라는 점을 인유(...
2024.07.18 17:52때는 1974년 7월 13일, 서대문형무소 747호 감방 앞이었다. 때마침 긴급조치 4호에 의거, 구형을 받고 우르르 몰려가던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조작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주역들이었다. 한목! 한목! 그들이 감방 안쪽에 대고 임진택을 불렀다. 당시부터 김지하를 두목이라 부르고, 임진택을 한목이라 불렀다. 거 누구요 누구? 까치발을 딛고 밖을 내다보던 한목에게 무리들이 껄껄거리며 대답했다. 나 김지하! 나 유인태! 한목이 다시 물었다. 구형은 어찌 되었소? 무리들이 함께 답하였다. 사형이다 사형! 껄껄껄! ...
2024.07.11 18:13수천 마리가 넘어 보이는 백로와 왜가리 떼들이 새하얗게 내려앉은 들녘으로 신명 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일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다. “에~라~먼~들/ 잘도 무네 잘도 무네/ 에~라~먼~들/ 우리네 농군들 다 잘 무네/ 에~라~먼~들~” 지난 주초 무안군 무안읍 용월리 상동마을 모내기 풍경이다. 바로 옆이 천연기념물 211호로 지정된 백로·왜가리 번식지이니 일부러 그려놓은 한 폭의 그림 같다고나 할까(지금은 국가유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본래 남성 중심의 일꾼들이 모내기를 하는 곳이라 장중한 선율이 울려 퍼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
2024.06.27 15:22고 박병천 명인의 북춤사위 중 ‘갈까 말까’ 하는 동작이 있다. 오른쪽으로 가는 듯한데 왼쪽으로 가고, 왼쪽으로 가는 듯한데 오른쪽으로 가는 동작을 거듭 반복하며 좌우로 움직이는 춤사위다. 이를 ‘갈뚱말뚱 사위’라고 한다. 남도의 정체라고도 할 수 있는 ‘귄’의 문화를 설명할 때 나는 곧잘 이 춤사위를 인용해왔다. 비정형의 정형, 흩뜨려야 비로소 균형에 이르는 비대칭의 미학이다. 남도인문학이라는 화두를 내걸고 400회를 연재했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세월이다. 남도문화의 정체와 아름다움(美學)에 대한 천착이었다. 동안에 정리해...
2024.06.20 18:02“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제는 어린아이라도 알 만한 김영랑의 한 구절이다. 모란에 스며든 덧없음과 기다림을 노래한 시라고나 할까. 하지만 일반적인 꽃말을 찾아보면, ‘부귀’, ‘영화’, ‘왕자의 품격’, ‘행복한 결혼’ 등으로 나온다. 그래서 꽃 중의 왕이라 했을 것이다. 슬픔 따위는 스며들 여지가 없다. 영랑도 부귀와 영화가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쉬워 이리 노래했을 것이다. 영랑의 시를 떠올린 것은 문선영 작가의 주요 테마가 모란이기 때문이다. 민화계에서 가장 핫하다는 문선영의...
2024.06.13 17:23전남 진도군은 율향(律鄕)이라는 칭호를 받는 곳인 만큼 조선 음악은 전 민중적으로 보급되어잇을 뿐외라, 현대 청년계급에도 시조(時調) 한마디나 장고(長鼓) 한가락쯤은 몰르는 자가 거이 없는 현상이라는데 이제 그 소유연을 조사하여보건대 이로부터 三백 여년 전에 진도 군내에서는 진도면 성내리(珍島面 城內里)에다가 장악청(?樂廳) 속칭은 신청(俗稱神廳)을 건설하고서 조선음악을 一반광대(廣大)등에게 가르첫다고 한다. 그러므로 각지에서 광대 등이 모여들기 시작하야 장악청을 중심으로 그 부근에서 거주하게 되엇다는데, 그네 등은 조선 음악을 공...
2024.06.06 18:21“산곡(山谷)에 금수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놓고 말을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거(阹)라고 한다.” 에 나오는 내용이다. 국어사전에서는 ‘일정한 시설을 갖추어 소나 말, 양 따위를 놓아 기르던 곳’이라고 풀이해두었다. 이 목장을 국가에서 관리하면 국영 목장, 개인이 관리하면 사영 목장이라 한다. 우리역사넷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시대 목장은 고려시대부터 전하는 목장을 재건하는 한편으로 수초가 좋은 곳에 발달했다. 사육되는 목축류도 말, 소를 비롯해 양, 돼지, 염소, 노루, 고라니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그 가운데 말 ...
2024.05.30 16:08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라하라 작업실 벽면으로 김승유의 민화작품들이 걸려있다. 4월 하순 TSOM 한국민화학교(교장 정병모)와 소류아트가 합작하여 만든 민화 전문가 과정이 여기서 진행되었다. 소류아트는 김승유(미국 이름 소피아김)의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이의 여러 그림 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호피장막도(虎皮帳幕圖)다. 호랑이 가죽으로 장막을 쳤다는 뜻, 그런데 그림의 절반 가까이 한글 시가 쓰여있다. 이것도 민화의 한 형태일까? 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8폭 병풍이 대표적이다. 5~6면의 장막을 걷어 올린...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2024.05.26 15:24익숙한 멜로디인 듯 낯선 멜로디인 듯 일련의 선율이 흐르기 시작한다. 어떤 물체가 안개 속으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풍경이다. 대칭의 음들이 서로를 휘감아 짓이긴다. 음들의 교접이 괴기스럽다. 국악 장단으로 치면 음양의 균열이 심하다. 이른바 ‘물리는 장단’, ‘물리는 선율’, 허튼 선율이다. 선명하지 못한 선율들이 드러내는 것은 불안, 초조, 압박의 감정이다. 아니 분노의 감정이다. 혹은 슬픔의 감정이다. 파동들이 알갱이로 바뀌어 내 머리를 친다. 아니 어쩌면 윌리암텔의 활이 아들의 머리에 올려놓은 사과를 겨냥하고 있는 풍경이다. 메...
2024.05.16 17:44울리는 꽹과리와 자바라의 굉음이 온몸을 휘갈겨 내리는 소리에 섞인다. 아니 자바라의 굉음이 곤봉 소리인 모양이다. 단말마의 비명 소리가 굉음 사이를 뚫고 재빠르게 달아난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이미지들이 허공 중으로 흩어진다.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밥만 했어요. 때리지만 마세요~” 다시 곤봉인지 채찍인지 무자비한 굉음이 어지럽게 허공을 후빈다. 변미화, 1921년 2월 10일생, 전남방직에서 근무했다. 떨리는 목소리가 극장을 울린다. “언니가 안 들어 왔어요. 언니 찾으러 금남로에 갔어요. 총소...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2024.05.09 18:11김성우 관장이 내게 묻는다. 무슨 글자인지 맞춰 보세요. 일종의 문자 찾기 수수께끼이다. 직선과 곡선이 서로 엉키며 독특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겹치고 나눠진 원들이 떼굴떼굴 굴러 네모진 칸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이내 직사각형의 긴 상자 밖으로 나오기도 한다. 어떤 도형 안에는 새들이 앉아있기도 하고 넓은 면으로 초승달이 떠오르기도 한다. 자로 그은듯한 직선들이 교직되는가 하면 붓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는 듯 삐뚤삐뚤 흐트러지기도 한다. 점과 선과 면들이 마치 씨실 날실의 베틀처럼 직조되는 공간마다 빨갛고 파랗고 혹은 희고 검은...
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2024.05.06 16:12불일암 오르는 길/ 우두커니 서 있다/ 비자(榧子) 고목 한그루/ 겉껍질은 세월에 벗겨주고/ 속껍질은 가슴애피로 벗겨주었나/ 작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지팡이 짚으신/ 부르튼 피부 비집고 몇 개/ 위태롭게 난 잎들/ 백토 진토 비집고 나온/ 나의 배내옷/ 바람인가 오음(五音)의 노래인가/ 숭숭 뚫린 껍질 새/ 채 다 못 부르신/ 아, 그대로만 서 있어도 좋으실/ 어머니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다할미디어 시선 08)에 실린 졸작 ‘불일암 오르는 길’이다. 이 시를 인용한 서평이 올라왔다는 것을 늦게야 알았다. 누구인지는 ...
2024.04.25 13:49동해의 하늘은 바다를 사모해 쪽빛이 되었고 바다는 하늘을 사모해 쪽빛이 되었다. 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이런저런 창조 후에 이윽고 사람을 짓는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의 생령이 된지라.” 동양에서는 천지창조와 인류의 기원 신화로 여와(女媧)와 복희(伏羲)를 등장시킨다. 마치 머리 둘 달린 하나의 뱀처럼 두 개의 가닥이 비비 꼬인 형상을 하고 있다. 후한 시대의 응소라는...
2024.04.18 11:16“어느 날 세상이 멈췄어/ 아무런 예고도 하나 없이/ 봄은 기다림을 몰라서/ 눈치 없이 와 버렸어/ 발자국이 지워진 거리/ 여기 넘어져 있는 나/ 혼자 가네 시간이/ 미안해 말도 없이/ 오늘도 비가 내릴 것 같아/ 흠뻑 젖어버렸네/ 아직도 멈추질 않아/ 저 먹구름보다 빨리 달려가/ 그럼 될 줄 알았는데/ 나 겨우 사람인가 봐/ 몹시 아프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BTS(방탄소년단)의 “라이프 고즈 온” 선율이 온통 머리를 휘젓고 다녔다. 반복되는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가 엇박자의 발디딤을 유도했던 것일까. 유장한 ...
2024.04.11 13: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