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의 아이들이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에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거문고 소리 같기도 하고 가야금 소리 같기도 하였다. 혹은 이 둘을 합쳐놓은 듯한 음색이랄까. 아직 숙달되지 않은 솜씨지만 한 줄 한 줄 뜯고 튕기는 소리를 따라가노라니 2천 년 전 마한의 어느 도읍에 도달한 듯하였다. 눈을 지그시 감으니 작은북과 토용들을 매단 대형 솟대가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역죄인들이 도망을 와도 잡아가지 못한다는 신성한 공간, 바로 소도(蘇塗)였다. 지금의 광주 신창동, 당시 영산 바다 갯가에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
2024.11.07 17:41“이 서사시 장르의 레퍼토리는 슬픈·평화로운·장난스러운·극적인 장면들이 교차하는 우회적인 이야기로 구성되며, 때때로 소리꾼이 몸짓 연기를 하며 공연한다. 소리꾼의 옆에서는 온몸으로 세계를 맞이하는 ‘고수’와 그의 소리북이 전 우주의 리듬을 바꾸어 놓는다. 줄거리가 펼쳐지는 이동식 무대 ‘마당’이라는 물리적 한계 안에서 공연되는 ‘판소리’는 그 자체로 특정한 표현 ‘공간’을 구성한다. 기후 변화 시대의 예술가들이 공간을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전시를 만들고자 하던 중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판소리’, 이 한국 민속의 한 분야는 오늘날...
2024.10.31 16:46“낱낱의 기어감이 양적으로 쌓이고 쌓일 필요가 없다. 그것들이 기계적 운동의 차원에서 연속적으로 나열됨으로써 비로소 지나감과 넘어감이 생성하는 게 아닐 터이다. 포월을 통해 종래의 운동 개념이 바뀜으로써 역시 바뀌고 부서지는 것이 시간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포월의 움직임과 함께 새로운 시간이 생성한다. 이 새로운 시간 속에서는 하나하나의 기어감이 이미 지나감이며 동시에 넘어감이다. 나름대로 이미 일종의 지나감과 넘어감을 견딘다. 하나의 개별성은 매우 느리고도 동시에 빠르다. 거의 제자리에서 머무는 듯하지만, 매우 멀리 간 것과 같고...
2024.10.30 15:55“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헤이히/ 아리랑 음음음 아라리가 났네/ 만나니 반가워라 이별을 어이 해/ 이별이 되랴거든 왜 만났든고/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 눈물 난다.” 몇 소절의 진도아리랑이 흐른다. 고음반이라 지직거리기는 하지만 비교적 노랫말과 반주악기 소리가 선명하다. 정창관이 제공한 1939년 진도아리랑 SP 음반이다. 음반 표지에는 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그런데 후렴의 끝 소절이 지금과는 다르게 뚝 잘라 하향 종지한다. 처음으로 김소희, 박종기 등에 의해 재구성될 때의 음반이니 이 형태를 진도아리...
2024.10.24 18:16남도에서는 장독대를 ‘장광’이라고 한다. ‘장(醬)’을 보관하는 ‘광’이라는 뜻이다. ‘광’의 사전적 의미는 세간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물건을 넣어두는 곳이다. 고(庫), 곳간, 곳집 등의 유의어가 있다. 한자말 광(廣)에서 온 말이라고 생각되는데, 사전적 풀이는 자세하지 않다. 대개는 이 한자말의 뜻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인다. 한자말 광은 너비, 넓이, 폭 등의 유의어가 있고 일정한 평면에 걸쳐 있는 공간이나 범위의 크기를 말한다. 광과 비슷한 말로 간(間)이 있으나 광(廣)과는 결이 좀 다르다. (間)에는 곡간(穀間), 곳간,...
2024.10.17 17:52이윤선의 남도인문학 416. 문자추상과 한글만다라 “무명의 검객이 칼 대신 큰 붓을 들어 글자를 써 내려간다. 글씨는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기도 하고 거대한 파도처럼 급습해오기도 하며 사막을 내닫는 말처럼 쏜살같기도 하다. 글자를 쓰는 듯한데 글씨가 아니요, 붓을 휘두르고 있어도 붓이 아니다. 때때로 모래판을 그어 내리는 지팡이가 되었다가 적의 목을 베는 예리한 칼이 되었다가 철학의 기운을 뿜어내는 장필(長筆)이 되기도 한다. 알지 못할 차원의 춤과 검객의 도술을 거쳐 마침내 진시황의 용좌에 검(劍)이라는 글자가 걸린다....
2024.10.10 18:53“우리 역사에서 세종대왕과 문종 다음으로 거론할 사람은 한창기다.” 지난주 순천 낙안초등학교 체육관을 빌려 진행된 에서 홍가이(전 MIT교수)가 선언한 첫마디였다. ‘한창기 민예운동의 역사적 의의와 중요성’이라는 제목의 발표였다. ‘뿌리깊은나무 학예제-학(學)으로 예(藝)를 짓다(순천대학교 박물관)’-에서 진행한 한창기, 천경자 관련 프로그램 일환이다. 남도 사람이라면 어떤 누구라도 한창기에 대해서 모를 바는 아닌데, 세종대왕과 문종 다음으로 한창기를 거론해서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임진택의 판소리 ‘소리 내력’ 공연에 고수로...
2024.10.03 17:34한국의 농악을 흔히 광역 지역 이름으로 나눈다. 경기농악, 경상농악, 충청농악, 호남농악 따위가 그것이다. 그런데 유독 호남농악은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으로 나눈다. 왜 전라도만 두 개로 나누어 의미를 부여했을까? 다른 지역에 비해 우수하고 넓기 때문이다. 두 개로 구분해야 할 만큼 세력이 컸다는 뜻이다. 오늘날 전승되는 농악의 형태가 근대기에 재구성된 것임은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 지난번 언급한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속편(경인문화사, 2013)을 다시 본다. “세조가 농사를 열심히 장려할 때 일부러 농가(農...
2024.09.19 18:28한 무리의 젊은 여성들이 모인다. 영암 삼호 시민문화체육관 강당, 더위가 꺾이지 않은 이른 저녁 시간, 고된 업무를 털어내기라도 하듯 강당을 뛰기 시작한다. 손에 손을 잡고 원 모양으로 앞 사람을 따른다. 잡은 손을 놓고 몸을 비틀어 춤을 추기도 하고 끼리끼리 놀이를 하기도 한다. 손에 손을 잡으니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 주제가가 떠 오른다. 이탈리아 작곡가 조르조 모로더가 작곡하고 그룹 코리아나가 불러 유행했던 곡이다. 반복되는 가사가 바로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우리 사는 세상 더욱 살기 좋도록~”이다. 올림픽에서만 이...
2024.09.12 18:20“백초(百草)를 다 심어도 대(竹)는 아니 심으리라/ 살대 가고 젓대 우니 그리나니 붓대로구나 어이타 가고 울고 그리는 그 대를/ 심어 무삼할거나 헤~” 판소리 창자들 혹은 남도민요 전문가들이 즐겨 부르는 육자배기 한 토막이다. 이 노래는 시조(時調)로도 불리는데, 에도 비슷한 가사가 실려 있다. 조선 영조 8년(1732)에 이형상이 펴낸 고려·조선 시대의 시조집으로 1,109편이 수록된 책이다. 그만큼 오랫동안 즐겨 부르던 노래라는 뜻이다. 살대는 날아가는 화살이니 가는 것에 비유하였고, 젓대는 대금 혹은 피리이니 소리 내어 우...
2024.09.05 17:41“1919년 3월 3일 고흥읍교회의 목치숙과 신평리 교회의 오석주는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올라가던 중 서울에서 3·1운동의 광경을 목격하고 고흥에서의 만세시위를 위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목치숙과 오석주는 고흥읍과 동강면, 그리고 금산면 사람들을 동원하기로 하고 한익수 등 여러 사람을 포섭한다. 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도 준비한다. 4월 14일 고흥 장터에서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당일 비가 많이 내려 시위가 불발되고 만다. 결국 그들은 체포되었고 목치숙과 오석주는 징역 6개월, 함께 했던 한익수는 집행유예를 ...
이윤선 서남해안포럼 이사장2024.08.29 18:151925년 독일의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가 조선을 방문해 영상을 촬영했다. 관련 자료는 한국영상자료원의 과 , 원본 DVD. VOB 등이다. 에는 , 등 5개의 컬렉션이 있는데, 1부의 말미에 배치된 소고춤 장면을 우선 분석해본다. 2월 17일 중국 칭다오를 출발하여 일본 고베, 오사카, 시모노세키를 거쳐 부산, 서울에 들어와 3월 4일 경복궁 답사를 하고, 3월 29일 수원화성, 4월 1일 갓등이 마을(旺林聖堂, 화성 봉담 천주교 성당), 5월 11일 해주 본당, 28일 진남포, 30일 평양 본당 방문, 6월 24일 부산에서 출...
2024.08.22 18:22“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200리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1982년 가수 정광태가 불러 인기몰이를 했고 이른바 국민가요가 되었던 노래다. 세상이 흉흉하니 자연스럽게 독도의 노래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광복절이 분열절이 되어버린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는 참담한 마음이랄까. 본 지면 360회(2023. 8. 25)에서 ‘남도인들이 붙인 이름 도팍섬 독도(獨島)’를 소개하며, 유독 일본에게 다 못 줘서 안절부절못하는 윤석열 정부를 비판한 바 있다. 나라를 강탈한 죄만 물어도 이루 셀 수가 없는데, 뻔히 보이는 영토마저 다시 뺏으...
2024.08.15 18:02한평생 짊어지고 온 삶/ 땅끝마을에서 내려놓고 담배 한 대 피워무는 그대/ 아스라이 걸려 있는 시간들을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네/ 그렇게도 보기 싫고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었던 발자국들 속에/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있네 물들 수 없는 영혼이기에 / 그대의 삶은 더욱 뒤틀리고 스스로를 뭉개버리며 존재에 대해 진저리를 쳤었지 그럴듯한 이념의 틀 안에 있을 때도/ 달콤한 허울을 입혀주었을 때도 그대는 그 안에 있으면서도 / 그대는 언제나 밖에 있었지 버림받은 영혼들을 위해/ 선창가 주막의 노래가 되...
2024.08.08 17:36매년 농한기, 이장 집이나 마을 상쇠 어르신 집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농악 상모(象毛)의 전립(戰笠)을 만들기 위해서다. 상모는 농악놀이에서 상쇠나 작은북을 치는 놀이꾼들이 머리에 쓰고 종이를 길게 달아 이리저리 돌리는 벙거지를 말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이미지 중 농악의 상모놀이가 포함되어 있다. 벙거지 자체는 전립이라 하고, 돌리는 줄 등을 포함하여 전체를 통칭 상모라 한다. 전립(戰笠)은 조선시대 무관이 쓰던 모자를 말하는 것이니, 농악이 군사 영역에서 비롯된 놀이임을 알 수 있겠다. 물론, 농악의 기원설에는 궁중 나례희(儺...
2024.08.01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