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의선사 생가 뒷산에서 바라본 해무와 월출산. 이윤선 촬영 |
초의선사가 58세(1834년)에 고향을 찾아와 읊은 노래다. 대선사이니 속세와는 인연을 끊고 정진해 불도를 이뤘을 듯싶지만, 고향과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일까.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제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수구하는 마음이야 범부나 대승을 가리지 않을 것이니 풀에 묻혀 사라진 고향에서 피가 말라 눈물조차 흐르지 않는다고 노래한 저이의 심정을 헤아려볼 뿐이다. 초의가 이순에 이르러서야 찾았던 고향마을은 지금의 무안군 삼향읍 왕산마을이다. 십여년 전 내 삶의 마지막 오두막을 그이의 생가 담벼락에 기대어 짓고 나서부터 상고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내 일찍이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이곳으로 그이를 사숙(私淑)하는 터를 잡았는지, 새록새록 사무치는 것은 근대기 한국 사상의 한 줄기를 이뤘던 초의의 마음자리다. 논자들은 대개 추사와 다산을 들어 한국의 정신을 말하지만, 나는 차문화의 중흥조라는 호명에 가려진 초의의 정신세계를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백파와 초의의 선논쟁 등 불교적 논쟁을 넘어서고 차문화의 요모조모를 넘어서는 얘기다. 차차 풀어나갈 기회가 있을 것이다.
2018년 1월12일자 본지 지면을 통해 초의를 소개한 바 있다. 초의 의순과 다소(茶所)가 있던 나주 운흥사의 인연을 설명한 바 있다. 당시 소개한 자료들을 몇 개 가져와 이야기를 덧붙여 둔다.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이 입산을 한 것은 여섯 살 때로 알려져 있다. 정식으로 출가한 것은 운흥사 벽보민성(壁峰敏性)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으면서부터다. 이때의 나이가 열다섯이다. 초의 생가와 기념관을 짓고 현양 사업을 펼친 용운 스님에 의하면 초의가 다섯 살 때 강가에서 놀다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건져 준 스님이 있었다 한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심청전의 심학규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라는 점에서 그 삶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후 열아홉 되던 해에 영암의 월출산에 올라가 깨달음을 얻었다 한다. 이종찬이 옮긴 ‘초의시고’(동국역경원)에 보면 이때의 풍경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열아홉(1804)이 되는 해에 영암 월출산에 혼자 올라 산세가 기이하고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취해 있던 중 남해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고 깨친 바 있어 가슴에 맺힌 것이 시원하게 풀렸다는 것이다. 이후 가는 곳마다 막히거나 꺼릴 것이 없었다니 아마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깨달음을 이때 얻었던 듯싶다. 돈오와 돈수는 한 번에 모든 것을 깨닫고 완성한다는 뜻으로 선불교 수련의 핵심이기도 하다.
초의가 눈물을 흘리며 노래했던 고향 왕산마을은 용운스님에 의해 발굴되고 비정됐다. 동국대 출판 ‘초의선백전’에 보면 나주 삼양(삼향)에서 태어나 신기(新基)에서 살았다. 신기마을을 특정할 수 없었으나 왕산마을에 전해오는 백발노인 이야기라든지 조선시대 관할구역, 장씨 세족 마을(본명 장의순) 등을 추적해 정한 것이라고 한다. 삼향지역은 군산봉수가 있는 곳으로 본래는 나주 관할이었다. 물길을 따라 행정권역이 정해지는 전통 때문이다. 출가한 지 3년째 당시 나주 운흥사 관음전에서 수행하던 완호스님을 만나 인연이 됐다. 다시 대흥사에서 완호스님에게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법명을 받게 됐다. 본래 그림 그리는 재주가 뛰어났던 모양이다. 대흥사를 중심으로 교우하게 되는 이른바 조선 후기의 문장가들, 화가들과 연결되면서 그의 재능이 더욱 빛을 발하게 됐던 것이다. 지금 대흥사 유물관에 보관돼 있는 ‘사십이수십일면관세음보살상’과 ‘준제보살상’이 초의의 그림이다. 이외 단청 솜씨도 뛰어나서 대광명전과 보련각 등의 단청을 손수 했다. 다선일미 등 차문화 관련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더욱 주목할 것은 초의의 문학세계다. 다산 정약용 등과 넓게 교우하며 유학과 불학은 물론 조선 후기 한국의 철학과 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꾸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차문화 관련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하거나 단편 논문을 심사할 때마다 나는 이점을 지도하거나 평하곤 한다. 초의를 톺아보면 볼수록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의 정신세계다. 지금 초의가 너무 차문화 관련으로만 편중돼 연구되고 있다는 지적이기도 하다.
![]() 초의선사 생가 뒷산에서 바라본 해무와 월출산. 이윤선 촬영 |
연하가 난몰하는 옛 인연의 터
1824년인가 1825년인가 초의는 대흥사 뒤편에 일지암을 중건한다. ‘일지암문집’이며 ‘초의시고’며 수많은 문학 작품들이 여기서 탄생하게 된다. 그뿐인가 김노경 등 유배와 해금의 수많은 인사들과 교우하기도 하고 소치 허련이 초의에게 서예와 그림, 시문을 습작하는 등 조선 후기 한국의 한 마음자리가 꾸려졌던 곳이다. 추사와의 인연이 돈독하게 성장한 곳도 일지암이다. 소설가 한승원은 ‘조선 천재 3부작’이라는 타이틀로 ‘초의’, ‘다산’, ‘추사’라는 소설을 각각 두 권씩 완성한 바 있다. 한승원이 왜 이 세 사람을 딱 뽑아서 다뤘을까. 언설대로 조선의 3대 천재들임에는 분명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 세 사람을 주목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초의는 유학과 불학을 넘나들며 한국철학 담론을 더욱 웅숭깊게 했다. 한국 근대의 여명을 열어젖힌 이들이라는 점에서 한승원이나 여러 평자의 시선은 유효하다. 그로부터 두 세기가 지나갈 즈음 용운은 초의의 고향마을 무안군 왕산에 생가를 복원했다. 초의가 말년을 지냈던 일지암도 재현하고 박물관, 체험관, 금오초당 등을 마련했다. 지리지에 나오는 군산봉수가 생가 뒤편 산이다. 가끔 이곳에 오르면 초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월출산이 동남쪽으로 장엄하게 펼쳐진다. 남으로는 유달산 북으로는 승달산 서쪽으로는 수달장군 능창이 신출귀몰 날아다녔다는 송공산이며 왕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산이 다도해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이순에 이른 초의가 고향마을을 찾아 눈물을 흘렸던 것은 아마도 내면에 깊이 스민 남도의 풍경 때문 아니었을까? 내가 이곳 초의 생가 아랫벽에 기대 움막을 지은 까닭이 무엇일까를 늘 상고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구름 따라 떠돌다가 한 차례 고향마을에 들러 피 굳은 눈물을 흘렸던 초의에게는 수구초심의 장소였다. 그래서다. 나는 늘 초의가 일지암을 지으며 지은 시를 머리맡에 두고 살았는데 그 인연의 터가 대흥사 일지암을 넘어 생가에 재현된 일지암으로 이어졌다는 상상을 하곤 한다. 안개가 어지러이 흩날리는 날 때때로 초의 생가 뒤편 군산봉수에 오를 때마다 그의 심사가 보이는 듯하다. 초의가 일지암에서 차와 유불선의 융합을 미학과 철학으로 꾀했다면, 나는 그이의 생가 머리맡에서 무엇을 꾀해야 할까. 나야 유불선에 기독교를 더해 장차 전개될 한국 정신사에 일조할 요량이지만, 초의가 말한 옛 인연의 터가 대흥사의 일지암뿐만 아니라 무안의 초의생가이기도 하다는 점을 시나브로 알아차리고 있는 중이다. 다시 그이의 시구를 읊조리자니 눈앞 월출산이 영산강 해무에 싸여 마치 선계를 이룬 듯하다.
연하(烟霞)가 난몰(難沒)하는 옛 인연의 터에/ 중 살림 할 만큼 몇 칸 집을 지었네/ 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 간짓대 이어 백운천(白雲泉)을 얻었으며/ 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캐나니/ 때로 원기(圓機)로써 묘련(妙蓮)을 펴며/ 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