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1980년 ‘보석 같은 양심’들, 한 묶음의 노래로 일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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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1980년 ‘보석 같은 양심’들, 한 묶음의 노래로 일어서다
448. 윤상원의 두 이야기
  • 입력 : 2025. 05.22(목) 17:48
‘윤상원평전’(김상집) 표지.
지난 14일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에 참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양배 기자
‘창작판소리 윤상원가’

“사방은 칠흑같이/ 쥐죽은 듯 적막할 제/ 시민군들 어느결에/ 총을 꼭 껴안고는/ 살풋 잠이 들었구나 그때여 윤상원은/ 초조한 마음을 달래느라/ 담배 한 대 피워무니/ 지나간 젊은 날들/ 회한이 밀려온다~” 예사롭지 않은 선율, 진양조장단이라 더욱 장중하다. 노래하는 이의 후골(喉骨)이 박사 고깔의 끝자락처럼 떤다. 노래를 넘고 장단을 넘어 마치 세상의 끝 지점에 이르고야 마는 애절함이 울대에 닿은 까닭이리라. 이윽고 노래는 ‘소리 내력’의 한 구절로 이어진다. “어머니~/ 고향에 돌아가요/ 죽어도 나는 돌아가요/ 천 갈래 만 갈래로/ 육신 찢겨도 나는 가요/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저 벽을 뚫어/ 저 담을 넘어/ 원혼 되어 저 붉은 벽돌담을/ 끝끝내 뚫고 넘어~” 창자가 끊기는 아픔을 단장(斷腸)이라고 한다지만, 그 어떤 형용으로 이 통절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두세 시간여 진행된 노래의 말미를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마무리하는 이유가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가신 이들’에 대한 헌정곡이기 때문이다. 임진택이 홀로 짓고 노래한 ‘창작판소리 윤상원가’ 이야기다. 나는 2019년 5월16일자 본 지면에 윤상원과 임진택의 광대 인연을 소개한 바 있다. 창작판소리에서 구구절절 묘사되는 도청사수대의 심경은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도 핍진하게 그려진다. ‘소년이 온다’의 소년과, ‘창작판소리 윤상원가’의 윤상원과, 도청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던 이들에게 사무친 것은 다름아닌 ‘양심’이었다. 한강의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기억하는 건 다음 날 아침 헌혈하려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던 병원들의 입구, 피 묻은 흰 가운에 들것을 들고 폐허 같은 거리를 빠르게 걷던 의사와 간호사들, 내가 탄 트럭 위로 김에 싼 주먹밥과 물과 딸기를 올려 주던 여자들, 함께 목청껏 부르던 애국가와 아리랑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 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치는 걸 느꼈습니다.” 이것이 양심이다.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 말이다. 광주뿐만이 아니다. 1980년 5월 남도 천지에 울려 퍼졌던 애국가와 아리랑의 연창들이 지금도 사무친다. 이 노래의 속살들을 다시 포개고 겹치고 덧붙이고 풀어낸 것이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윤상원가’이다. 한강의 언설처럼 그날 도청에 남은 어린 친구들이 죽음과 맞바꿔도 좋다고 판단했던 보석 같은 양심들, 우리 역사는 멀리 동학으로부터 상속받아 온 이 양심들의 발현으로부터 남태령 대첩 및 빛의 혁명을 이끌어냈다. 윤상원과 그이들의 양심이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감히 새로운 역사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문턱에 서 있을 수 있겠는가.

김상집의 ‘윤상원 평전’

임진택의 이야기가 노래로 꾸민 윤상원 이야기라면 김상집이 펴낸 ‘윤상원 평전’(동녘, 2021)은 체험담으로 꾸민 윤상원 이야기이다. 박호재와 임낙평이 ‘윤상원 평전’(풀빛)을 낸 것이 2007년이므로 15년여 만이다. ‘최후의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삶과 죽음’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서문의 일부를 옮겨본다. “이 글은 윤상원과 결사 항전의 주역들이 1970년대부터 각 부문에서 어떠한 활동을 해왔으며, 이들의 노력으로 성장한 광주·전남의 운동 역량이 어떻게 죽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도 결사 항전이라는 초인적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를 더듬어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전라 민중의 무장봉기야말로 5·18 민중항쟁의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2019년 12월12일 본지면 ‘녹두서점의 오월’에서 김상집을 포함한 김상윤 일가가 말하는 민중들에 대한 헌사를 소개했다. ‘투사회보’ 제작과 배포의 내력 등 말리는 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항쟁에 참여한 스토리가 지금 생각해도 절절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1980년 5월27일 새벽, 윤상원과 그 일행이 도청에 남아 최후까지 항전하는 장면을 경험담으로 풀어내고, 그의 죽음이 개인의 결단이라기보다는 광주와 남도 나아가 이 땅의 민중들이 상속받아 온 역사의 울림이라는 점을 밝힌 책이다. 1장부터 20장까지 민청학련, 인혁당사건, 들불야학 교사 활동, 녹두서점 운영, 짧은 은행원 생활, 광천공단, 노동자 활동, 유신의 몰락, 전두환 신군부 탄압과 광주항쟁, 작전명 화려한 휴가, 전라민중 무기를 들다, 총기 회수와 재무장, 마지막 밤, 5월 그 후, 윤상원 연보 등이 빼곡하게 기록돼 있다. 윤상원을 비롯해 이양현, 정상용, 김영철, 윤강옥, 정해민, 정해직, 박남선, 민청학련 관계자 중 김상윤, 윤한봉, 김정길, 박형선, 문덕화, 문화계 인사로 김남주, 조비오, 이성학, 홍남순, 이기홍, 함석헌, 문익환, 무장시민군으로 김종배 외 기동타격대,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리게 되는 박기순과 들불야학 학생들, 이름도 빛도 없이 산화하거나 광주코뮌을 만들었던 민중들의 이름이 주마등이다. 항쟁 45주년을 보내며 생각하는 것은 이들이 지키고자 했던 양심, 지키고자 했던 존엄한 공동체, 말의 윤리, 저항의 언어, 사랑의 실천이 펄펄 살아 지금 여기 위험천만했던 계엄을 물리쳤다는 사실이다. 과거가 현재를 구한다는 한강의 언설은 바로 이를 두고 나온 말이다. 책의 말미에는 2005년 ‘광주 이야기 공모전’ 우수상을 수상한 전용호의 ‘넋풀이’가 실려 있다. “음 사람들은 잊지 못하네/ 음 밝아오던 마지막 새벽 하늘/ 음 우리들은 잊지 못하네/ 음 거리마다 울리던 그 목소리/ (중략) 남과 북이 하나 되듯/ 둘이서 하나 되어 합쳐지소서.”

윤상원기념사업회 기념음악회 팜플렛.
남도인문학팁

윤상원기념사업회 2025년 ‘5·18 기념음악회’

지난 2022년에 시작해 올해로 4회째를 맞는 ‘5·18 기념음악회’가 열린다. 행사를 주최하는 윤상원기념사업회 지병문 이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장갑차와 무장한 군인들을 앞세운 12·3 군사 쿠데타를 맨손으로 진압하였다. 123일이라는 긴 시간을 인내하며 내란 수괴를 파면하는 무혈혁명을 이룩하였다. 5·18 민중항쟁과 12·3 내란 진압은 지구촌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장엄한 승리였다. 지난겨울, 광장과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고 응원봉을 흔들었던 우리 모두를 위로하며 80년 그때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해 기념음악회를 개최한다.” 문자 그대로 빛의 혁명을 이루었던 풍경을 역사에 새기는 작업들이다. 총지휘는 박인욱, 판소리 ‘5월광주 윤상원가’ 중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로 시작한다. 판소리는 임진택, 고수는 내가 맡는다.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 문현옥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 2악장, 윤선애의 오월의 노래 외 우리가 어느 별에서, 공병우와 나혜성의 포레 레퀴엠 등이 펼쳐진다. 일시는 5월27일 오후 7시, 장소는 전남대학교 민주마루다. 윤상원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광주문화재단 등이 공동 주관한다. 녹두서점의 먼지 쌓인 책들, 들불야학의 분필 가루, YMCA의 찬송과 절규, 그 절절함들이 한 줄의 시가 되어 한 묶음의 노래가 되어 다시 일어선다. 평전으로 회자되고 판소리로 노래되는 윤상원의 일대기를 거룩한 마음으로 모신다. 가슴을 콕콕 찌르는 양심을 안고 도청에서 산화해 간 님들을 추모한다. 두렵고 떨리던 마음 이제는 다 놓으시고 극락왕생하시라. 영면하시라. 그 뜻 받들어 살만한 세상 새로운 나라 만들어 갈 것을 약속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