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진주 남강에 몸 던진 호남 최초 임진의병장 김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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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진주 남강에 몸 던진 호남 최초 임진의병장 김천일
나주 흥룡동 출생, 一齋 이항의 제자로 수학||37세에 용안현감 제수, 사헌부 지평 등 지내||임란으로 선조가 파천하자 금성관에서 거병||혁혁한 공 세우자 특별 직함 ‘倡義使’ 제수||제2차 진주성 전투서 왜군 10여만 명과 혈투||중과부적으로 城 함락되자 남강에 투신 순국
  • 입력 : 2022. 05.25(수) 16:35
  • 편집에디터

나주 금성관

어린 나이에 양친을 잃다

임진왜란 당시 호남 최초로 거의한 의병장은 나주 출신의 김천일(金千鎰, 1537~1593)이다. 김천일은 중종 32년(1537) 외가인 나주 흥룡동에서 김언침과 양성 이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난다. 흥룡동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처 장화왕후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고려 2대 왕인 혜종의 탄생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김천일의 옛집, 즉 부친의 집은 담양부 창평현 태산리(현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였지만, 모친이 친정에서 낳았으므로 나주인이 된다.

김천일은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다. 태어난 지 이튿날 모친 이씨가 돌아가셨고, 7개월 만에 부친마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이유다. 그는 15살이 된 명종 6년(1551) 작은아버지 김신침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한 후, 19세가 되던 1555년(명종 10) 당시 호남 일대에서 가장 숭앙받던 학자로 정읍에 거주하던 일재 이항의 제자가 된다.

그가 일재 이항의 제자로 들어가기 1년 전인 1554년 김효량의 딸과 결혼하였고, 슬하에 두 아들 상건과 상곤, 딸 하나를 둔다. 큰아들 상건은 선조 대의 왕세자를 모시다가 부친과 함께 제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성이 함락되자 진주 남강에 투신한다. 둘째 아들 상곤은 부친과 형의 초상(初喪)을 치른 다음 해에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부자의 삶이 장엄했지만, 슬픈 가족사가 아닐 수 없다. 딸은 송강 정철의 셋째아들에게 시집갔으니, 김천일과 정철은 사돈이 된다.

청년 시절 김천일의 모습은 하서 김인후의 다음 평가가 참조된다. 21살 김천일이 장성 고향에 내려와 은거하고 있던 하서 김인후 선생을 찾아간다. 하서는 "사물의 실제 이치를 터득한 선비를 남쪽 고을에서 보기는 이 사람(김천일)이 처음이다"라며 극찬했고, 작별할 때 두 수의 시를 지어 격려하고 있다. 후일 하서는 호남인으로는 유일하게 공자의 신위를 모시는 문묘(文廟)에 배향된다. 이해 김천일은 생원초시에 합격한다.

최고의 목민관이 되다

31살이던 선조 원년(1568) 미암 유희춘이 조정에 유일(遺逸, 아직 등용되지 않아 세상에 나타나지 않은 유능한 사람)로 천거하자, 유희춘에게 간절한 편지를 보내어 간곡히 사양한다. 그리고 36살이 되던 선조 5년(1572)까지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는 37세 되던 선조 6년(1573) 관직에 나아간다. "경전에 밝고 행실을 닦은 사람"으로 천거되어 종6품직인 군기시 주부에 제수되었기 때문이다. 군기시는 조선시대 병기와 군기(軍旗) 등을 맡았던 관아였다. 그리고 그해 용안현감에 제수된다. 용안현은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일대에 있던 옛 고을이다. 그는 3년간 용안현감으로 재직했는데, 재직 중 최고의 목민관이었다. 이는 선조가 "지금 군의 치적 중에 어디가 제일이냐?"고 묻자, 이조(吏曹)가 "여주목사 황림, 해주목사 이린, 용안현감 김천일"이라고 답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어 강원도사, 경상도사에 이어 42세 된 선조 11년(1578) 정5품직인 사헌부 지평과 임실현감에 제수되었다가 순창군수, 담양부사, 한성부서윤을 연이어 제수받았고, 마지막 받은 관직이 수원부사였다. 수원부사 시절 그는 중앙과 결탁한 부호들에 대한 잘못된 세금 및 부역(賦役)을 바로 잡으려고 애쓰다 오히려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만다. 올곧은 목민관의 뜻이 지역의 힘센 부호들에 의해 꺾인 셈이다. 그가 고향 나주에서 임진왜란의 비보를 들은 이유이기도 했다.

정렬사 사당에 건립된 김천일 동상

호남 최초의 의병장이 되다

그는 임금이 피난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목 놓아 통곡한다. 그리고 "내가 울기만 하면 무엇 하겠는가? 나라에 환란이 있어 임금께서 파천하였는데, 나는 신하로서 어찌 새나 짐승처럼 도망하여 살기를 원해서야 되겠는가. 내 의거를 하여 전쟁에 나갔다가 싸움에서 이길 수 없으면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나의 보답하는 길이다"라며 거의를 결심한다.

6월 3일, 김천일은 나주에서 양산숙 등과 함께 300여 의병을 모아 나주 금성관에서 피로 맹세한 후 북상길에 오른다. 호남 최초의 의병이었고, 최초의 의병장이었다. 6월 23일, 수원에 도착한 후 독성산성을 거점으로 삼고 금령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올린다. 8월, 강화도로 진을 옮긴 후에도 양화도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다. 이때 의주 행재소의 선조는 그에게 장례원 판결사를 제수하고 창의사(倡義使)라는 특별 직함을 내린다. 그가 임진왜란 중 창의사란 호칭으로 불린 이유다.

1593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평양을 탈환하고 개성에 이르러 서울을 공략하려 하자, 막하 부하를 시켜 경성의 형세, 도로 사정, 적의 허실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알린다. 그는 직접 군사들을 거느리고 양화대교 근처의 선유봉(仙遊峯, 양화대교 공사로 사라짐)에 주둔하면서 서울 공략에 큰 공을 세운다. 이여송은 "창의사(김천일)는 명실(名實)이 서로 상부(相符)한 명장이다"라고 칭찬한다.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하여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른다. 이때 명·일 강화가 추진 중임에도 불구하고 남하한 왜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하여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호남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2차 진주성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수성을 포기하라는 명을 내렸고, 도원수 권율과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마저도 진주를 떠나고 만다. 조정의 반대와 경상도 출신 의병장 곽재우마저 포기한 진주성에 들어간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호남이 근본이 되고, 호남은 진주에 가까우니, 진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다. 진주성을 비우고 적을 피하여 왜적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계책이 아니다."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김천일이 6월 14일, 3백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에 입성하자 최경회·고종후·황진 등 호남 의병장들이 의병을 이끌고 뒤를 따른다.

촉석루와 진주 남강

진주 남강에 투신하다

왜군 10여만 명과 호남 의병이 주축이 된 수성군 4천여 명과의 싸움은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9일간이나 지속되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지만, 김천일은 민·관군의 주장인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되어 10만에 가까운 왜적을 9일간이나 막아 낸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끝내 성이 함락되자, 아들 상건과 함께 북쪽의 임금을 향해 4배를 올린 후 촉석루에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한다. 김천일은 그를 부축하던 종사관 양산숙에게 "너는 이 사태를 모면하였다가 힘써 저 원수들의 섬멸을 도모하라" 하였지만, 양산숙은 "정의에 따라 나 혼자 살 수는 없다"며 함께 몸을 던진다. 광주 출신 고종후, 화순 출신 최경회 의병장도 함께였다. 진주성을 지키다 순국한 김천일·최경회·고종후를 '진주성 3장수'라 부른다.

진주성 함락 소식을 접한 둘째 아들 상곤이 진주성에 도착한 것은 두어 달이 지난 그해 9월이었다. 상곤은 촉석루로 달려가 부친의 유품을 거둔 후 나주시 삼영동의 내영산(양성이씨 선산) 언덕에 장사지낸다. 형 상건도 함께였다. 그러나 두 분의 무덤은 시신 없이 두 분의 혼을 불러 장례하고 만든 무덤 초혼장묘(招魂葬墓)다.

김천일은 사후 선조 36년(1603)에 좌찬성, 광해군 10년(1618)에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된다. 그리고 숙종 7년(1681)에는 '문열(文㤠)'이란 시호가 내린다. 시호 문열은 학문에 힘쓰고 묻기를 좋아하셨다(勤學好問)'라는 뜻에서 '문(文)'을, '굳세게 이겨내고 왜적을 토벌하셨다(剛克爲伐)'라는 뜻에서 '열(烈)'을 취한 것이다.

선조 39년(1606), 나주시 월정봉 아래 사당을 짓자 조정은 정렬사(旌烈祠)라는 사액을 내린다.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1984년 현재의 위치(대호동)에 재 건립하였다. 정렬사에는 함께 순국한 아들 상건과 종사관 양산숙의 위패도 함께 모셔져 있다. 나주의 정렬사에는, 한 손은 불끈 쥐고 다른 한 손은 칼을 쥔 채 갑옷도 투구도 없이 나선 김천일의 동상이 서 있다. 동상 아래에는 "56세의 선비로 붓을 버리고 쾌자(맨소매 옷)만을 걸치고 투구 없는 맨머리로 앞장서니 선생의 충국에 큰 뜻을 따르는 의사가 많았다"는 글귀가 새겨 있다.

선조 40년(1607), 제2차 진주성 전투의 현장인 진주성 내에 건립된 창렬사(彰烈祠)와 순창의 화산서원, 정읍의 남고서원에도 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김천일 의병장을 모신 사당, 정렬사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