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이순신 수군의 돌격대장, 녹도진 만호 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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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이순신 수군의 돌격대장, 녹도진 만호 정운
1543년 영암에서 출생, 28세에 무과 급제||거산찰방, 웅천현감, 제주목 판관 등 역임||1591년 전라좌수영 관할 녹도진 만호 임명||임란시 관망하던 이순신 설득 경상도 진격||돌격대장으로 옥포·당포·한산도 전투서 분전||1592년 9월 부산포전투서 순국 해남에 안장
  • 입력 : 2022. 04.27(수) 16:34
  • 편집에디터

전라좌수영 관할 녹도진의 만호(萬戶) 정운이 배향된 흥양(고흥) 녹도진 성안의 쌍충사(雙忠祠).

정운 영정(충절사)

충장공 정운 장군 신도비(해남)

정운을 기리기 위해 '정운함'이라 명명한 해군 잠수함.

조선 수군의 신망을 받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관할 녹도진의 만호(萬戶)는 정운(鄭運, 1543~1592)이었다. 정운이 임진왜란 당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선조 27년(1594) 8월 12일자 『선조실록』의 다음 대화가 적격이다. 선조가 "임진년 이후 우리 군대가 움츠리기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묻자, 유성룡이 "정운이 죽은 후 수군의 사기가 꺾인 탓에 교활한 적병에게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서 감히 가벼이 나서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정운이 1592년 9월 1일 부산포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 조선 수군의 사기가 크게 꺾였고, 그래서 아군이 물러서기만 하고 기세가 크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선조와 유성룡의 대화는 정운의 사망이 조선 수군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돌격대장이었던 정운은 중종 38년(1543) 전남 영암(현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훈련원 참군 정응정의 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하동이며 자는 창진(昌辰)이다. 일곱 살 때 '정충보국(貞忠報國)'이라 새긴 칼을 차고 다니며 활쏘기와 말타기를 즐겨했다. 선조 3년(1570) 28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봉사를 시작으로 금갑도(현 진도) 수군 권관, 거산찰방, 웅천현감, 제주목 판관 등을 역임한다. 그러나 그의 재임 기간은 늘 짧았다.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가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는 안방준이 남긴 『국조인물고』에 수록된 「정운유사(鄭運遺事)」의 다음 서술이 참고된다. "젊어서부터 강개하여 호협한 기풍이 있어 매양 절의에 따라 죽을 수 있다고 스스로 허여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거산찰방이 되었을 때 감사(관찰사)의 수행원 중에 신임을 받은 사람이 민폐를 끼치자 공(정운)이 곤장을 쳤는데, 감사가 좋아하지 않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웅천현감이 되어 감사의 미움을 사자 또 그날로 인수(印綬)를 풀어놓고 떠나버렸다. 이윽고 제주목 판관에 임명되었다가 또 목사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었는데, 돌아오는 배에 한 마리의 망아지도 데리고 오지 않았다. 그의 강직하고 청고(淸高)한 바가 모두 이와 같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여러 해 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선조 24년(1591) 종 4품직인 녹도진 만호에 임명된다. 녹도진은 전라좌수영 관할이었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과 인연을 맺은 연유다. 녹도진 만호에 부임한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멈칫하던 이순신을 설득하여 경상도로 나아가 돌격대장이 되어 옥포·당포·한산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1592년 9월 1일 부산포 전투에서 적의 대포를 맞고 순국한다.

정운, 이순신을 재촉하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이후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지원 요청을 받는다. 그런데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곧바로 수군을 출동시키지 않은 채 머뭇거린다. 그 이순신을 설득하고 협박해서 경상도 출병을 강행시킨 분이 녹도만호 정운이었다.

원균이 율포만호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도움을 요청하자 정운이 이순신을 설득했다는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5월 1일자 기사는 다음과 같다. "영남의 말을 듣고 여러 장수는 '우리가 우리 지역(전라도)을 지키기에도 부족한데 어느 겨를에 다른 도(경상도)에 가겠는가' 하였다. 그런데 녹도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이순신에게 진격하기를 권하여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놓으면 본도(전라도)도 보존할 수 있다' 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라는 기사가 그것이다.

전라좌수사의 직계 부하였던 종4품 만호 정운이 직속상관인 정3품 이순신을 협박해서 경상도로 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선조 27년(1594) 11월 12일자 『조선왕조실록』에 정곤수는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에게 '장수(이순신)가 만일 가지 않으면 전라도는 반드시 수습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협박했기 때문에 이순신이 할 수 없이 가서 (적을) 격파했다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록에는 박협(迫脅)이라고 나온다. 박협은 "남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위협함"이라는 뜻이니 협박과 상통한다. 부하였던 녹도만호 정운이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협박했다는 기록은 놀랍다.

선조 30년(1597) 1월 23일자의 실록에는 아예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하여 목을 베려 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정운은 이순신이 나가 싸우지 않는다하여 참(斬)하려 하자 이순신이 두려워 마지못해 억지로 싸웠으니, 해전에서 이긴 것은 정운이 격려해서 된 것입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은 상대 붕당의 모함과 관련되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순신은 이후 10여 일 뒤인 2월 6일 군공을 날조하고 적장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직되고, 원균이 후임에 임명되고 있음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녹도진 만호 정운이 칼을 뽑아 들고 경상도로의 진격을 망설이는 이순신을 재촉했는지는 지금 확인할 수 없지만, 앉아서 왜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영남으로 진격하여 선제 공격을 해야 한다는 정운의 주장을 이순신이 따른 것만은 분명하다. 정운의 주장은 적중했고, 이순신은 무적의 신화를 남기게 된다. 경상도로의 출정을 앞장서 주장했던 그가 이순신 수군의 돌격대장이 되었던 연유다.

나라가 오른팔을 잃다

이순신이 이끈 전라좌수영 수군은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적진포(5.8), 사천5.29), 당포(6.2), 당항포(6.5), 율포(6.7), 한산도(7.8), 안골포 해전(7.12)에서 연승을 거둔다. 그리고 한달 여의 휴식을 취한 후 9월 1일 부산포를 급습한다. 왜선 100여 척을 격파한 대승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녹도진 만호 정운이 전사하고 만다. 이순신은 정운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도다(國家失右臂矣)"라며 탄식한다.

정운이 전사하자 이순신은 시신을 수습한 후 해남의 두륜산 자락 선영에 안장하고 영전에 다음의 제문을 올린다. "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야 정말로 아까울 게 없으나 유독 그대의 죽음에 대해서만 나의 가슴 아픈 까닭 무엇인가요.……아, 슬프도다……"

정운은 사후 화려하게 부활한다. 사망 소식을 접한 조정은 곧바로 북도병마절도사를 증직한다. 이어 선조 39년(1606) 병조참판에, 정조 20년(1796) 병조판서 겸 의금부훈련원사에 가증(加增)된다. 정조 22년(1798)에는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지는데, "국가가 위난을 당했을 때 나랏일을 걱정하였으니 '충'이요, 싸움터에 나가 죽으니 '장'이라."

그를 기억하고 기리기 위한 사당도 건립된다. 효종 3년(1652) 영암 유림들에 의해 경호사(鏡湖祠)가 건립되고 숙종 8년(1682)에 충절사(忠節祠)로 사액된다. 충절사 사당 오른쪽에는 정운을 기리는 충신 정려각도 있다. 그에게 '충신 증 가의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행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정운지려'라는 충신정려가 내려진 것은 선조 41년(1608)이었고, 이를 보관하기 위한 충신각은 숙종 7년(1681)에 세워졌다가, 1985년 10월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그는 흥양(고흥) 녹도진 성안의 쌍충사(雙忠祠)에도 배향된다. 쌍충사는 선조 20년(1587) 녹도진 만호로 왜구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순절한 충렬공 이대원(李大源, 1566~1587)을 기리기 위해 녹도진성 안에 건립된 사당이다. 당시 이름은 이대원 묘당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해 12월 녹도진 만호 정운이 부산 다대포(몰운대)에서 전사하자, 이순신이 조정에 건의하여 이대원 묘당에 함께 모시게 된다. 정유재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숙종 7년(1681)에 새로 건립하였으며, 2년 뒤인 1683년 조정으로부터 쌍충사로 사액을 받는다.

정운은 오늘도 후배 해군들의 기림을 받고 있다. 정운을 기리기 위해 1997년 잠수함을 건조하고 붙인 이름이 '정운함'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정운의 역할은 안방준의 시문집인 『은봉전서(隱峯全書』에 나오는 「부산기사(釜山記事)」의 다음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

"국가를 다시 찾게 된 것은 호남을 잘 보전했기 때문이고,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에서 힘입은 것이며, 이순신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만호 정운의 용력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