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한말 근대교육의 선구자, 춘강 고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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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한말 근대교육의 선구자, 춘강 고정주
고경명 후손 고정주, 규장각 직각으로 관직||을사늑약 반대 상소 후 고향 담양으로 낙향||국권 회복 위해 ‘창흥의숙’ 건립, 인재 키워||김성수·송진우·현준호 등 근·현대 거목 배출||삼지내 마을에 춘강 고택, 창평초에 역사관
  • 입력 : 2022. 05.11(수) 16:20
  • 최도철 기자

고정주 영정

규장각 직각을 박차고 낙향하다

임진왜란 당시 담양에서 거병했던 학봉 고인후(高因厚, 1561~1592)가 부친 제봉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다. 그리고 학봉의 5남매(4남 1여)가 맡겨진 곳이 외가였던 창평이었다. 외조부모는 사고무친의 외손들을 따뜻하게 보살핀다. 학봉의 후손들이 창평에 세거(世居)하게 된 이유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 주권을 상실한다.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자강론(自强論)이 등장했다.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과 투쟁을 통해 국권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무장투쟁론이다. 이들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일어섰다. 바로 한말 의병이다.

학봉의 후손들도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고자 목숨을 걸었다. 학봉 11대 사손(祀孫, 봉사손)이던 녹천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불원복(不遠復)' 세 글자가 새겨진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가국지수(家國之讐)'의 깃발을 든다. 의병장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학봉의 10대손인 춘강 고정주(高鼎柱, 1863~1933)는 녹천 고광순과는 생각이 달랐다. "화승총 몇 정으로 어떻게 일제와 맞설 수 있겠는가"라며 영학숙에 이어 창흥의숙을 건립, 인재를 키운다. 자강론이었다.

1907년 남원성 출정을 앞둔 녹천이 은밀히 춘강을 찾는다. "이 난세에 자손 하나는 선대의 유업을 이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춘강은 "광(곳간) 고리를 끌러(열어)두겠소"라고 답한다. 춘강은 의병투쟁에 직접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그 취지를 이해하고 협조했다. 둘의 주권 회복 방식을 달랐지만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충(忠, 사랑)은 같았다.

자강론자였던 고정주, 그는 철종 14년(1863) 담양군 창평면 삼천리에서 고제두와 전주 이씨 사이에 태어나 5살 때 큰아버지 고제승의 양자로 들어간다. 1891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 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했다. 고종은 "고경명이 그대의 몇 대 선조인가?"라고 묻고는 선물을 내리기도 했다.

1905년 규장각 직각(直閣) 겸 황자전독(皇子典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비서감승(秘書監丞, 승정원 승지의 후신, 정3품 당상관)이 된다. 규장각 직각은 오늘 국립도서관장 쯤에 해당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정주를 '고직각'이라고 불렀다. 직각의 임무는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각종 서적과 왕실 문서들을 관리하는 일이었고, 황자전독은 왕자에게 각종 경전을 가르치는 자리였으니 의친왕 이강(李堈·1877~1955)의 스승인 셈이다. 마지막 관직이 비서감승이었으니 지금으로 보면 청와대 비서실에 근무한 셈이다.

이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상소의 요지는 "조약을 맺은 부신들은 매국적입니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죽이라고 말하는데 죽일 수 없다면 어디 나라에 형정(刑政)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종사를 위해 죽겠다는 뜻을 견고히 지켜 강제로 조인된 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조인한 적들을 엄한 규율로 다스리고 그들에게 붙은 놈들을 모두 배척하고 시무를 알고 절의가 높은 자들은 관직에 임명하길 바랍니다."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 창평에 낙향한다. 그리고 시작한 것이 교육 운동이었다. 주권을 잃었지만 나라를 되찾을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영학숙이 문을 연 상월정

영학숙을 건립하다

1906년 4월 춘강은 월봉산 자락의 상월정(上月亭)에 영학숙(英學塾)을 설립한다. 사위 김성수와 아들 광준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학숙의 이름 '영학숙'의 '영'은 아예 영어(英語)의 '영'자였다. 당시 본격적인 학문을 하려면 상하이나 도쿄로 유학해야 했고, 그러자면 국내에서 영어의 기초를 어느 정도는 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학숙을 설립한 후 이표라는 사람을 서울에서 특별 초청하였는데, 그는 영어와 일어, 한문과 산술에 능통한 교사였다.

개원 초기의 학생은 둘째아들 고광준과 사위 인촌 김성수 두 사람이었다. 전북 고창 출신인 인촌은 13살이던 1903년, 다섯 살이 많은 고정주의 딸 고광석과 결혼한다. 김성수는 후일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후 경성방직 및 동아일보를 설립하였으며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을 인수하여 교장이 된다.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내기도 했다.

호남 최초로 세워진 영어 학교는 곧장 소문이 난다. 근동에서 유능한 젊은 청년들이 모여든다. 고하 송진우(宋鎭禹, 1890~1945)도 그 중 한 명이다. 송진우가 영학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부친 송훈과 고정주가 절친 사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찍이 송진우는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이 된 의병장 기삼연의 제자였다. 1896년 장성에서의 거병이 실패하자 담양 송씨 문중의 식객이 되었고, 6살이던 송진우를 4년간 가르친다. 고하(古下)라는 그의 호도 기삼연이 지어준다. 고비산 밑에서 낳았으니 고비산처럼 꿋꿋하게 살라는 뜻에서였다. 송진우는 이후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다. 이어 장성 출신의 김시중, 영암 출신의 현준호가 입학한다. 김시중은 후일 장성에서 신간회 활동 및 노동운동에 헌신하였고, 현준호는 호남은행을 설립하는 등 큰 기업인이 된다. 마지막 학생은 장성 출신 김인수였다.

영학숙은 1년 만에 문을 닫았고 6명의 학생에 그쳤지만, 김성수·송진우·현준호·김시중 등은 한국 근·현대사의 거목이 된다. 딱 1년 개설된 영학숙이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서 묵직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창평의숙 표석(창평초등학교)

창흥의숙 교장이 되다

영학숙은 1908년 근대적인 커리큘럼을 가진 창흥의숙(昌興義塾)으로 발전한다. 창흥의숙은 처음에는 창평 객사 용주관(龍注館) 건물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개교 당시 수업연한은 4년이었고, 각 마을에서 매년 1명씩 추천받은 학생만 입학하였다. 초기 10여 명의 학생만이 입학했던 이유다. 1911년 창평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개칭되었으며, 1919년부터는 여학생의 입학이 허용되어 처음으로 3명의 여학생이 입학한다. 1923년 6년제로 수업연한이 연장된다. 지금의 창평초등학교다.

춘강이 창흥의숙을 열었을 당시에는 학생이 부족하였다. 학교에 오려면 단발하여야 했기 때문에 부모들이 이를 꺼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광순이 주도한 창평의병에 참여하다 순절한 집안의 경우 단발한다는 것은 쉽게 용납할 수 없었다. 창흥의숙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고, 점심도 무료로 제공하였다. 교장이 된 만석꾼 춘강이 모든 비용을 자비로 부담하였기 때문이다.

만여 명 가까운 졸업생을 배출한 창평초등학교 출신의 인재도 즐비하다. 영학숙 출신인 김성수, 송진우와 창흥의숙 출신인 김병로만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고재욱,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낸 고재필, 대법관을 지낸 고재호, 서울대 부총장을 지낸 고윤석, 헌법재판소 판사를 지낸 고중석, 무등양말 창업자 고일석은 춘강 고정주의 친척들이다. 이중 고일석은 창평고등학교와 창평중학교를 설립한다. 인재 양성의 전통이 이어진 것이다. 창평초교 출신으로 이름을 떨친 분은 고씨들 만은 아니었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한기, 서울대 공대 학장을 지낸 이승기, 고창고보 창설자 양태승 등도 다 창평초교 출신들이다. 만주에서 활동하다 국내로 잠입해 친일파 암살 기도로 체포된 후 10년형을 선고받은 이병욱과 옥중에서 옥사한 이병묵 형제도, 이회창 전 총리의 외삼촌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용·문용·성용 3형제도 다 창평초교 출신이다. 이런 인재들이 시골인 창평에서 배출될 수 있었던 것은 춘강 고정주가 교육에 쏟아부은 정성 때문이었다. 그를 기리는 흉상이 창평초등학교 100년 역사관에 건립된 이유다.

춘강 고정주가 태어난 창평 삼지내 마을은 2007년 우리나라 최초로 슬로우시티에 지정된 마을로,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관광객이 자주 찾는 관광 명소다. 그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은 솟을대문 집이 있다. 고정주의 집이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궁궐 같은 본채 건물은 폐허의 모습으로 흉가처럼 남아 있었다. 보기에도 민망했다.

그가 세운 창흥의숙은 오늘 창평초등학교다. 학교 건물 앞에는 1980년 세운 '昌興義塾(창흥의숙)이라 새긴 기념비가 서 있고, 학교 건물 본관의 벽면에 '창평초등학교가 만들어지기까지'라는 게시판에 춘강의 흉상 사진과 함께 업적이 새겨져 있다. 역사관에는 개교 100주년을 맞아 그의 흉상이 서 있다.

그가 처음 영학숙을 열었던 상월정은 월봉산 자락에 위치한 용운저수지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창평 삼지내마을 고정주 저택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