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295호 금동관이 출토된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전경. 국립나주박물관 제공 국보 295호 금동관 출토당시 신촌리 9호분 모습 신촌리 9호분 을관 내 유물 출토 모습 신촌리 9호분, 갑·을·병관, 1917년 촬영 금동관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가? 영산강 유역 마한을 상징하는 유물은 금동관, 환두대도, 대형옹관, 옥과 구슬, 유공토기(有孔土器, 구멍토기) 등 많다. 이중에서도 대표 선수는 누가 뭐래도 1917년 신촌리 9호분 을관에서 출토된 국보 제295호로 지정된 금동관이다. 먼저 영산강 유역 마한의 상징물이 된 금동관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신촌리 9호분에 대한 발굴은 불행하게도 우리 학자들이 아닌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인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에 의해 2차례에 걸쳐 조사 발굴되었다. 1차 발굴은 1917년 12월 17일부터 27일까...
최도철 기자2021.03.10 16:56나주 반남 고분과 대형 옹관. 나주시 제공 백제의 마한 병합 과정(출처, 임영진 마한연구원장) 나주 신촌리 출토 금동관 영암 내동리 출토 금동관(편) 옹관 발굴장면 고고학에서 본 백제의 마한 병합 시점 역사 문헌에서 백제가 언제 마한을 완전히 병합했는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고고학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임영진(마한연구원장, 전 전남대 교수)을 비롯한 고고학자들은, 백제의 마한 제국의 병합은 3단계로 나뉘어 진행되었다고 보고 있다. 1단계는 3세기 말 차령산맥까지이고, 2단계는 4세기 중엽 노령산맥까지이며 3단계는 6세기 중엽으로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남해안까지이다. 고대사회의 영역은 오늘날과 의미가 달랐고 잦은 전쟁으로 인해 영역이 수시로 변화하였기 때문에, 영역의 변화를 문헌 기록으로 정확하게 남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대국가의 영역 내...
편집에디터2021.03.03 16:48영산강 유역 고대 마한시대 최상위 수장층의 고분으로 확인된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전남도 기념물 제83호) 발굴 현장. 영암군 제공▼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서울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출발한 백제는 이후 마한 제국들을 병합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백제의 마한 병합은 가까운 지역부터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느 시점에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백제가 마한을 병합했다는 기원 후 9년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다. 이미 살핀 것처럼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고구려본기」에 마한은 여전히 기원 후 9년 이후에도 등장하고 있고, 중국의 사서인 『진서』 「동이열전」이나 「장화전」에도 3세기 후반까지 마한이 진에 사신을 파견하며 활발한 외교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한이 ...
최도철 기자2021.02.24 16:17나주 반남면 고분군은 대안리 12호분(국가사적 제76호), 신촌리 8호분(국가사적 제77호), 덕산리 14호분(국가사적 제76호) 등 총 34호분으로 이뤄졌다. 서울 석촌동 2호분 마한의 멸망 연대를 서기 9년으로 서술한 삼국사기 백제의 건국 『후한서』 동이열전을 보면 "마한에 54개 소국이 있었고, 백제는 그 54개 소국 중 하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백제는 마한 54개 소국 중 하나로 출발했다가 이후 고대 왕국으로 성장한 후 마한을 병합한다. 따라서 마한과 백제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제가 언제 어떤 정치 집단에 의해 고대국가로 성장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12세기에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BC 18년에 고구려 시조 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그의 형 비류와 함께 남하해 위례성에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백제의 최고 지배층을...
편집에디터2021.02.17 16:09영산강유역 마한은 기원전 3세기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약 800년 간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해상 교류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나주시 제공 연맹왕국 마한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청동기 유물(국보 143호) 새해 들어 백제와는 달리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영산강 유역 마한(馬韓)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 이러한 관심은 지난해 마한 역사문화권 등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올 6월 시행을 앞둔 시점과도 맞물려 있다. 전남일보는 마한이 어떤 나라였는지, 영산강 유역의 마한은 언제 백제에 병합되었는지, 백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는 무엇인지, 2천 년 전 타임캡슐 광주 신창동은 어떤 유물을 품은 유적지였는지 등에 대해 노성태 남도역사연구원장의 글을 10회에 걸쳐 게재할 예정이다. / 편집자 주 마한은 어떤 나라인가? 마한이 어떤 나라인지를 ...
편집에디터2021.02.03 16:19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자산어보 등을 집필했던 사촌서당. 흑산도 사리성당 흑산도 사촌서당 면암 최익현 선생 유허비 정약전,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쓰다 섬과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다 해서 붙여진 섬 이름 흑산도(黑山島, 신안군 흑산면)는 전라도 잔칫상에 꼭 올라야 하는 명물 홍어와 가수 이미자가 구성지게 불러 크게 히트한 '흑산도 아가씨'라는 노래로 유명해진 섬이다. 그러나 지역사를 공부하는 필자에게 흑산도는 손암 정약전과 면암 최익현 등이 유배 간 절해(絶海)의 유배지로 더 각인되어 있다. 1801년, 조선에서는 신유박해라 불리는 최초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은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 노론 강경 세력들이 남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 1752~1801)를 비롯한 300여...
편집에디터2021.01.28 16:02광주제일고 교정에 세워진 송홍선생 동상. 필자 제공 송홍 선생 기념비 송홍 선생 무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아버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광주고보생들의 배후에는 민족혼을 일깨웠던 위대한 스승이 있었다. 그는 광주고보생들의 버팀목이었고, 의지처였다. 그가 당시 광주고보의 유일한 한국인 교사 송홍이다. 송홍(宋鴻, 1872~1949)은 화순군 도암면 운월리 굴개마을에서 송용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익중(翼中), 호는 운인(雲人)이다. 구한말 큰 유학자였던 송병선에게 글을 배웠다. 1904년 일제는 한국 주권 침탈의 일환으로 황무지 개척권을 강제로 요구하자, 전 승지 윤병과 이범창, 전 군수 홍필주, 전 주사 이기 등과 함께 남촌의 초당에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다섯차례에 걸쳐 그 불가함을 상소하였다. 임금의 확답을 얻지 못하자, 또다시 전 참판 홍종영 등 5인과 함께 대한문 ...
편집에디터2021.01.14 16:19고금도 충무사 항공사진 완도군 제공 고금도 월송대 고금도 관왕묘비 이순신의 혼을 품은 땅, 고금도 이순신을 모신 사당은 전국에 21개소나 된다. 아마도 이순신은 가장 많은 사당에서 제사밥을 얻어 드시는 존경받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21개 사당 중 하나가 임란 당시 마지막 3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이 있었던 완도 고금도에 건립된 충무사다. 충무사가 위치한 고금도 덕동리 일대는 이순신의 살아생전 마지막 흔적을 품고 있는 곳으로, 충무사 일대가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충무공 유적지에는 사당만 있는 곳이 아니다. 노량전투에서 순국한 후 시신이 80여 일간 안장된 월송대가 있고, 명나라 수군이 주둔하면서 세운 '관왕묘'의 내력을 기록한 관왕묘비도 남아 있다. 1597년 9월 16일(음력) 명량에서 대첩을 거둔 이순신은 군산 선유도, 목포 고하도를 거쳐 1598년 2월 17일...
편집에디터2020.12.22 16:30세계 최대 규모인 화순 춘양면 핑매바위 고인돌. 관청바위 고인돌 채석장 감태바위 한반도 고인돌 분포도 거석문화와 고인돌 거석문화(巨石文化)란 인간이 자연석 혹은 가공한 돌로 구조물을 축조하여 숭배의 대상이나 무덤으로 이용한 문화를 말한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는 유럽과 인도, 아시아 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며, 선돌(立石), 열석(列石), 환상열석(環狀列石), 석상(石像) 등 종류도 다양하다. 선돌과 열석, 환상열석은 주로 유럽의 대서양과 지중해 연안을 따라 분포한다. 선돌은 단독으로 세워지기도 하지만, 프랑스나 영국에서는 수십 기 이상이 열을 지어 분포한다. 이러한 경우 열석이라 부르는데, 프랑스 브르타뉴 카르나크 열석이 대표적이다. 환상열석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같이 선돌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유적으로, 특수한 의식을 행하는 장소나 천체 관측의 공간으로 추정된다...
편집에디터2020.12.08 17:09고흥군 도화면 당오리 당곤마을에 세워진 기산도 선생의 유언 '유리언걸지사 (流離焉乞之士 : 떠돌이 거지 지사)' 를 새긴 돌비석. 기산도 선생 영정 애국지사 기산도 선생의 묘(서울 현충원) 의열투쟁의 출발, 기산도 1905년 11월 17일, 일제는 '을사오적'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기 위해 이른바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11월 20일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써 울분을 토로하였고, 11월 30일에는 전 탁지부대신 민영환이 자결로 항거한다. 을사오적 중 한 명이 대한제국의 국방 책임자 군부대신 이근택이었다. 이근택의 매국 행위에 대해서는 그의 노비조차 분노했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온 이근택은 집안사람들을 불러놓고 궁중에서 신조약을 '늑약'하던 일을 설명하면서...
최도철 기자2020.11.24 16:23소안항일운동기념탑. 완도군 제공 태극기의 섬 소안도 항일의 땅 해방의 섬, 소안도 독립운동가 20명을 포함해 8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완도 소안도는 항일의 땅, 해방의 섬이다. 소안도가 항일의 땅이라 불리게 된 본격적인 투쟁은 토지반환소송에서 시작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제는 조선 왕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안면민들이 경작해오던 토지를 사도세자 5대손인 이기용에게 자작(子爵)이란 작위와 함께 소유권을 이전한다. 당시 이기용은 수조권만 갖고 있었고, 경작권은 주민에게 있었다. 소안도 토지의 소유권 이전은, 주민들에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이에, 소안도 면민들은 최성태 등 4명의 면민 대표를 뽑아 토지소유권 반환 소송을 벌인다. 13년간의 법정 투쟁 결과 1921년 2월, 소안도 6천여 면민이 승소한다. 당시 조선일보는 5월 17일자에 "소안은 집요한 ...
최도철 기자2020.11.10 17:01송흠 가훈비 조선 전기의 문신 송흠(宋欽)이 장성군 삼계면 내계리에 있는 지은 정자. 1984년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됐다 지지당 송흠 묘소. 관수정 현판 송흠의 또 다른 이름, 삼마태수 청백리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청백(淸白)은 '청렴결백'하다는 말의 약칭인데,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청백리는 부정부패하지 않고 그냥 깨끗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짊과 의로움(仁義)이 넘쳐야 청백리다. 백성을 내 처자같이 사랑하고, 나랏일을 정의롭게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얻도록 하는 관료가 진짜 청백리다. 청백리가 되기 위해서는 동료들의 평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과 의정부의 검증 절차 외에도 2품 이상의 당상관과 사헌부, 사간원의 최고 수장들이 추천, 심사하여 통과되어야만 했다. 어려운...
편집에디터2020.10.27 16:12기정진 선생이 장성군 진원면 사무소 뒤편 고산 마을에 세운 서원. 기정진이 1878년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7년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노사 기정진 선생 무덤 고산서원 정문 임술의책 요약비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철학자이자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현상윤(1893~1950)은 그의 명저 『조선유학사』에서 조선 시대 유학자 중 대표적 인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화담 서경덕과 그 뒤를 이은 녹문 임성주,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 등 여섯 분을 꼽았다. 그러면서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성리학을 마무리한 진정한 세분의 성리학자로는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 한주 이진상을 들었다. 이항로는 경기도 출신이고 기정진은 전라도 출신이며, 이진상은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항로는...
편집에디터2020.10.13 16:26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 순천왜성(倭城)은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성이다. 명나라 종군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 순천왜성 천수각 기단 순천외성 문지(門址) 순천에 왜성을 쌓다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정유재란 당시 쌓은 왜성(倭城)이 있다. 순천왜성(전라남도 기념물 제171호)이 그것이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쌓은 성이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육지부를 파내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낮에는 다리로 사용하고, 밤이면 다리를 끌어들였다. 그래서 조·명 연합군은 이 성을 왜교(倭橋), 왜교성(倭橋城) 또는 예교(曳橋)라 부르기도 했다. 일본군은 왜 ...
편집에디터2020.09.22 16:25담양군 봉산면 제월리 제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면앙정. 송순이 잠시 벼슬에서 물러난 41세 되던 중종 28년(1533)에 건립한 정자다. 담양군 제공 면앙정 현판 면앙정 3언 편액 정조의 어제 회방연을 열다 회갑연(回甲宴)이 태어난 지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라면, 회방연(回榜宴)은 과거 급제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다. 태어나서 60년을 사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 회갑연은 가정의 경사였다. 그런데 회방연은 과거 합격 후 60주년을 기리는 잔치이니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회방연의 영광을 얻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과거에 급제해야 하고, 급제 후 60년 이상을 살아야 하며, 잔치를 주관하는 출중한 제자가 있어야 한다. 조선 시대 통틀어 4명만이 그 영광을 누렸다고 하니, 회방연은 하늘이 내린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그중 한 분이 담양출신 면앙정 송순(宋純...
편집에디터2020.09.08 1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