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조선 성리학의 6대가, 노사 기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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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조선 성리학의 6대가, 노사 기정진
1798년 순창 복흥서 태어나 장성에서 자라||7살 때 지은 ‘詠天’에서 천재성 들여다보여||진사시 장원했으나 벼슬 뜻 접고 학문 몰두||600여 제자 등 후학 양성해 ‘노사학파’ 이뤄||납량사의, 이통설, 외필 등 철학 명저 저술||병인양요때 상소 올려 척사위정 기틀 마련
  • 입력 : 2020. 10.13(화) 16:26
  • 편집에디터

기정진 선생이 장성군 진원면 사무소 뒤편 고산 마을에 세운 서원. 기정진이 1878년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7년 고산서원(高山書院)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노사 기정진 선생 무덤

고산서원 정문 임술의책 요약비

조선 성리학의 6대가

철학자이자 고려대학교 초대 총장을 역임한 현상윤(1893~1950)은 그의 명저 『조선유학사』에서 조선 시대 유학자 중 대표적 인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화담 서경덕과 그 뒤를 이은 녹문 임성주, 노사 기정진, 한주 이진상 등 여섯 분을 꼽았다. 그러면서 서세동점의 위기를 맞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무렵에 성리학을 마무리한 진정한 세분의 성리학자로는 노사 기정진과 화서 이항로, 한주 이진상을 들었다. 이항로는 경기도 출신이고 기정진은 전라도 출신이며, 이진상은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항로는 기정진보다 6년 연상이고, 기정진은 이진상 보다 20년 연상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로 칭송받았던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 그는 1798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조동(槽洞, 구수동)에서 태어나 장성에서 자란다. 본관은 행주, 호는 노사(蘆沙)다.

노사 기정진은 천재였다. 큰 선생 아래에서 글을 배운 적도 없는데, 4~5세에 이미 글을 해독하고 지을 줄 아는 아이였다. 그의 천재성은 7살 때 지은 '하늘을 읊음(詠天)'에서 들여다볼 수 있다. '사람들의 선악(善惡)에 따라 빠르게 보답한다네(隨人善惡報施速)'라는 글이 어떻게 7세 아동에게서 나올 수 있겠는가. 하늘은 인간의 선과 악에 따라 지체없이 상을 내리고 벌을 준다는 뜻이니, 7세에 이미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부친의 유언으로 34세의 나이에 진사과에 장원하지만, 끝내 과거시험은 응시하지 않는다. 40여 차례나 나라의 부름을 받지만, 45세에 전설사(典設司) 별제에 6일 동안 근무했던 것이 벼슬의 전부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60세에 고향 근처의 무장 현감 벼슬이 내리지만 거절한다. 그가 한평생을 바친 것은 후진 양성과 학문 연구였다.

고산서원 고산사에는 노사 기정진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인 김석구, 정재규, 정의림, 기우만, 조성가, 이최선, 김녹휴, 조의곤 등 9명이 배향되어 있다. 1960년 간행된 '노사선생연원록'이라는 '제자록'을 보면 노사에게 친히 글을 배운 제자가 600명이나 되고, 그들 제자의 제자까지 합하면 6000명이 넘는다. 노사와 이들을 노사학파라 부르는데, 그중 고산사에 배향된 8명이 수제자인 셈이다.

노사 학문의 정수는 누가 누가 뭐래도 높은 수준의 성리학이다. 46세에 『납량사의』, 48세에『정자설』, 56세에 『이통설』 그리고 81세에 그가 평생 연구한 이기론을 정리한 『외필』을 저술한다.『납량사의』와 『외필』은 그의 이(理)에 대한 철학사상의 핵심 저서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변화하게 하는 근원적 실재로서 기의 발동과 운행은 오직 이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기보다는 이를 절대시한 유리론(唯理論)의 주창이다.

'임술의책'과 '병인소'를 쓰다

임술년(1862)에 진주를 필두로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그 폐해를 바로잡을 것을 역설한 상소를 올린다. 이것이 「임술의책」이다. 그는 「임술의책」에서 "민중 봉기를 일으킨 백성들은 어미의 젖을 잃고 우는 어린아이와 같다'면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의 문란으로 규정하고, 그 폐해를 바로잡을 5가지 개혁안을 제시한다. 지금 고산서원 입구에는 '임술의책'을 요약해서 새긴 비가 서 있다.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입한 병인양요(1866)가 일어나자 민족자존을 지키기 위해 상소를 올린다. 외침에 대한 방비책으로 쓴 6개 조항의 상소문인 「병인소」가 그것이다. 그 당시 대세는 외적과 싸우지 말고 화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노사는 결사반대한다. 전쟁을 위해 군비강화책을 열거한 후 나라 안에서는 정치를 제대로 하고, 나라 밖의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척사론을 편다. 노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외적과 싸워 물리쳤고, 노사에게는 공조판서라는 관직이 내려지기도 했다. 바로 그 상소가 노사 기정진의 이름은 전국에 알리는 상소였고, 최초로 척사위정의 이론을 온 국민에게 알린 글이었다.

이 상소는 이후 한말 위정척사 사상의 이론적 기초가 된다. 같은 시기 화서 이항로도 위정척사의 상소를 올리는데, 노사의 상소가 두 달이 빨랐다. 지금 장성 황룡면 그의 무덤 앞에 '위정척사기념탑'이 세워진 이유다.

'임술의책'과 '병인소'는 노사 기정진이 공리공담에만 머물렀던 성리학자가 아닌 철학의 이론을 정책으로 다듬어 제시한 실천적 학자였음을 잘 보여준다. '행동하는 양심'이었던 셈이다. 그의 손자 기우만과 종손 기삼연도 온 몸을 던져 일제에 항거한 한말의병장이었다.

고산서원

노사 기정진 선생의 흔적을 찾다

오늘 장성에서 초·장년 시절, 노사의 흔적 찾기는 쉽지 않다. 순창군 복흥면 동산리, 일명 조동(槽洞, 구수동) 마을에서 태어난 후 18세 때 양친을 잃고, 고향 장성 아치실로 돌아오지만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인근의 맥동(麥洞), 매곡(梅谷), 탁곡(卓谷), 여의동(如意洞) 등지를 전전하며 장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기정진이 가장 오래 거주하며 제자를 기르고 저술 활동에 전념했던 곳은 하사리(지금의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다. 65세 이후 13여 년을 정착했는데, 이때 노사라는 아호를 짓는다. 아호 노사는 '노령산 아래 하사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사리에 거처할 때인 1875년 4월, 대원군을 탄핵하다 제주도로 귀양 간 후 풀려난 면암 최익현이 노사를 찾아뵙는다. 그리고 1869년 어느 날 15살 신동이던 매천 황현이 하사리로 노사를 찾아온다. 황현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의 맨 끝부분에 자신의 일생을 간략히 기술하면서 "15세에 노사 선생을 찾아뵈었더니 기특한 소년이라고 칭찬해 주었다"라는 내용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그러나 오늘 하사리에는 노사와 관련된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노사 기정진을 만나려면 78세 되던 1875년 겨울부터 생을 마치던 1879년 12월까지 '담대헌(澹對軒)'이란 강학소를 짓고 제자를 가르친 장성군 진원면 고산리를 찾아야 한다. 당시 강학소였던 담대헌 건물이 덩실하게 솟아있고, 그와 그 제자들을 기리는 '고산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고산서원에는 노사와 그의 8대 제자들을 모신 고산사(高山祠)가 있는데, 사당에는 노사 선생 신위만 있을 뿐 영정은 없다. 노사 선생이 60이 넘자 문인 오상봉이 초상화를 그리자고 청하지만, 얼굴이 추하다는 이유를 들어 고사한다. 그 뒤 김석구 등 제자들이 재차 청하였지만 노사는 극구 사양하며, "주검은 기(氣)와 함께 소멸하는 데 무엇 때문에 다시 모습을 세상에 남길 것인가"라며 거부한다. 유리론자(唯理論者)답다. 영정이 없는 이유다.

고산서원의 강당 담대헌 마루에 오르면 툭 터진 남쪽으로 무등산이 아스라이 보인다. 그곳에 노사 부모님의 무덤이 있다. 노년에 성묘하기도 어려워 불효막심한 자신을 책하던 무렵 그곳으로 이사와 부모님 묘소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어 '담대헌'이란 이름을 걸었다고 한다. 이곳 담대헌에도 유명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조·일수호조규(병자수호조약)을 결사 반대하다 흑산도로 유배 갔던 최익현이 해배되자, 1879년 3월 또 담대헌을 찾는다. 노사가 죽기 10달 전이다. 노사가 세상을 뜬 이후에는 손자 기우만이 담대헌의 주인이 되어 중암 김평묵과 영재 이건창 등 당시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맞이한다.

고산서원에 노사의 학문이 남아 있다면, 그의 무덤에는 혼이 남아 있다. 노사의 혼이 남아 있는 무덤은, 지금 행정구역으로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 황산 마을 뒷산에 있다. 뒷산에 오르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전국의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노사 선생 신도비다. 정말 크고 우람하다. 평소 노사를 흠모하여 두 번이나 찾았던 최익현이 글을 짓고, 서예가 여초 김응현이 글씨를 썼다.

조금 더 올라가면 소나무 숲 안에 노사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무덤 앞에 '위정척사기념탑(衛正斥邪紀念塔)'이 서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1876년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할 때 위정척사의 논리를 설파한 '병인소(丙寅疏)를 올리는데, 이항로의 상소보다 두 달이 빠른 전국 최초였기 때문이다.

노사의 무덤 주위 소나무가 정말 멋있다. 마치 날씬한 호위병 같다. 무덤은 호떡을 엎어 놓은 듯 봉분이 낮아 마치 평장한 모습처럼 보여 특이하다. 무덤 앞에는 두 개의 비가 서 있다. 왼쪽에는 "조선노사기선생지묘 증정부인울산김씨부좌"라고 새긴 묘비가 서 있고, 오른쪽에는 노사의 제자 중 영남 출신으로 큰 명성을 떨친 정재규가 지은 묘갈명을 새긴 비다. 함께 잠들어계시는 울산김씨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이다. 제자 정재규는 묘갈명에 "하늘이 우리의 도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를 모아 진실로 대성하셨네(天相斯道 正氣之會 展也大成)"라고 쓴다. 노사 기정진의 높은 학문의 완성을 기리고 찬양하고 있다. 제자의 스승 사랑이 장엄하고 아름답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