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민족혼 일깨운 광주고보의 영원한 스승, 운인 송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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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민족혼 일깨운 광주고보의 영원한 스승, 운인 송홍
광주고보 유일 한국인 교사 한문·국어 교육||역사와 독립의 필요성 역설, 민족혼 일깨워||학생독립운동으로 전교생에 가까운 학생들||검거·퇴학 당하자, 결근으로 항거 강제퇴직||일제 패망 후 현 전남대 의대서 한국사 강의
  • 입력 : 2021. 01.14(목) 16:19
  • 편집에디터

광주제일고 교정에 세워진 송홍선생 동상. 필자 제공

송홍 선생 기념비

송홍 선생 무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아버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광주고보생들의 배후에는 민족혼을 일깨웠던 위대한 스승이 있었다. 그는 광주고보생들의 버팀목이었고, 의지처였다. 그가 당시 광주고보의 유일한 한국인 교사 송홍이다.

송홍(宋鴻, 1872~1949)은 화순군 도암면 운월리 굴개마을에서 송용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익중(翼中), 호는 운인(雲人)이다. 구한말 큰 유학자였던 송병선에게 글을 배웠다.

1904년 일제는 한국 주권 침탈의 일환으로 황무지 개척권을 강제로 요구하자, 전 승지 윤병과 이범창, 전 군수 홍필주, 전 주사 이기 등과 함께 남촌의 초당에 소청(疏廳)을 설치하고 다섯차례에 걸쳐 그 불가함을 상소하였다. 임금의 확답을 얻지 못하자, 또다시 전 참판 홍종영 등 5인과 함께 대한문 앞 광장에서 복합상소를 하다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했다.

일본 헌병대에서 풀려난 송홍은 망국의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가 중국의 톈진, 베이징, 상하이 등을 전전하면서 얻은 결론은 교육제도의 개혁을 통해 힘을 기르는 일이었다. 그가 제기한 교육개혁의 핵심은 향교재단을 기금화하여 향교를 신식학교로 개편하고, 신교육을 담당할 교육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각 도에 사범학교를 설치하며, 거기에 소요되는 경비는 관민이 균등하게 부담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의 이러한 교육개혁안은 향교를 존속시키고자 했던 유림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했다.

송홍은 이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이라도 교육에 헌신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광주보통학교(현 광주서석초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광주 농업학교, 사범학교로 거친 후 1920년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고보)가 설립되자, 1924년 광주고보로 다시 옮긴다. 송홍이 광주고보생들과 만날 수 있었던 이유다.

송홍이 담당한 과목은 한문과 국어(조선어)였다. 그런데 두 과목만이 아니었다. 한문 시간에는 비밀리에 한국 역사와 민족의 과제인 독립이 왜 필요한지를 역설했다. 광주고보 제1회 졸업생인 변진복은 "선생은 교장, 교감을 비롯한 학교 당국의 감시 눈길을 피해 수업 시간이면 칠판에 강의 제목만 써 놓고 한국 역사에 대해 강의를 했으며, 세계정세 및 민족의 진로를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미래의 지표는 조국광복이라는 점을 힘주어 말씀하셨다"고 회고했다.

교사 송홍이 가장 고통스러워했던 것은 광주학생독립운동 과정에서 제자들이 일본 경찰에게 처참하게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당시 그는 일제의 눈엣가시였다. 일본 교장은 그의 직원회의의 참석을 막았을 뿐 아니라, 감시마저 강화하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전교생에 가까운 학생들이 검거되고 퇴학을 당하자, 송홍은 장기 결근으로 이에 항거했다. 결과는 일제의 강요에 의한 퇴직이었다.

송홍은 1930년 2월 8일 제자들에게 교육혁신의 중요성과 민족교육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부디 잊지 말라는 다음의 고별시를 남긴 후 교정을 떠난다.

敎育吾曾叫革新 나는 일찍이 교육혁신을 부르짖어 왔건만

今朝說與諸君別 오늘 아침 제군들과 이별을 이야기하네

一心二十二年春 22년을 한마음으로 행해 왔기에

無負江湖老病人 강호에 늙고 병든 이는 부담이 없다네

이후 송홍은 서동의 초라한 자택을 '고분당(孤憤堂)'이라 이름 짓고, 해방이 될 때까지 칩거하면서 독서와 집필, 서예에 전념했다. 칩거 생활은 집 이름 '고분당'처럼 고독과 비분의 세월이었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고 광복을 되찾자 송홍의 칩거도 끝나게 된다. 광주 서중학교 교단에 다시 서게 되었고, 광주 의학전문학교(현 전남대 의대)에서 한국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교단에 섰던 그는 해방 정국의 혼탁한 정치상을 지켜보면서 1949년 6월 18일 세상을 뜬다. 향년 78세였다.

송홍을 연구한 전 서울대학교 민두기 교수는 "그는 이론가라기보다는 실천가였으며, 애국애족으로 점철된 민족정신의 화신이자 위대한 스승이었으며, 민족사관에 입각하여 한국사를 재정립한 사학자였다"고 평했다.

송홍 선생 생가터비

송홍 선생의 흔적을 찾다

광주고보의 영원한 스승 운인 송홍 선생이 태어난 곳은 화순군 도암면 운월리 굴개마을이다. 광주에서 굴개마을은 도곡온천이나 능주를 거쳐 갈 수 있다.

운월리 굴개마을에는 "이곳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민족교육운동가인 송홍(1872~1949)의 생가터이다"라고 새겨진 조그마한 터비만 서 있다. 생가터비는 잡풀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아버지요 민족교육운동가인 송홍 선생을 기리며 버티고 서 있으니, 송홍 선생 지킴이인 셈이다.

오늘 송홍 선생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물은 굴개마을 입구인 신평 송씨 문중산에 건립된 '운인 송홍 선생 추모 기념비'다. 사후 70년이 지나서야 그를 기리는 추모 기념비가 설립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운인 송홍선생 기념사업회' 고용호 회장과 김성인 추진위원장 등의 열정 때문에 가능했다.

추모 기념비는 돌로 쌓은 3단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여느 기념비와는 모습부터 달랐다. 가운데인 2단에는 '민족혼을 일깨운 선각자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큰 스승 운인(雲人) 송홍(宋鴻)'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기념물 제일 아랫단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학생들의 모습이, 제일 위 3단에는 두루마기를 걸친 송홍 선생의 얼굴 사진이 들어갔다. 사진 속 얼굴은 정면이 아닌 약간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방향에 그의 무덤이 있다.

뒷면에는 운인 송홍의 일생을 간략하게 정리한 기념사업회 고용호 회장이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글 중에 "외로운 교직 생활이었으나 온 힘을 다하여 학생들의 민족혼을 일깨웠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성진회 회원 왕재일, 장재성, 안종익, 최용호, 김광용, 김창주, 최규창, 임주홍, 국순엽, 정우채가 제자였다"는 내용이 있다. 그랬다. 송홍 선생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된 1926년 결성된 성진회 회원이었던 왕재일, 장재성, 정우채 등의 스승이었다. 그들이 송홍 선생의 민족혼을 이어받아 3·1운동 이후 최대 항일 독립운동이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것이다. 그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의 큰 스승으로 불리는 이유를 알겠다.

송홍 선생 추모 기념비에서 2킬로미터 쯤 떨어진 대초천 건너편의 나주시 남평면 우산리 비나리 마을 뒷산 선영에 그의 무덤이 있다. 오늘 무덤은 선생의 아우인 대연의 차남 병수의 큰 아드님인 무광이 돌보고 있어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었다.

봉분의 크기도 대단했지만, 무덤 앞 상석과 '애국지사 운인 신평송공홍지묘'라 새긴 비도 대단하다. 이는 1986년 송씨 문중과 제자 등이 힘을 합해 묘역을 다듬었기 때문이었다. 무덤의 석물에도 제자들의 스승 사랑이 묻어 있었다.

송홍 선생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또 있다. 그가 6년여 동안 교편을 잡으면서 민족혼을 일깨웠던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교정에 그의 흉상이 건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정에 들어서면 10시 방향에 흉상이 서 있고, 왼쪽 끝자락에는 '우리는 피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서 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피끊는 광주고보생들에게 오직 바른길인 독립만이 당시의 시대정신인 '생명'이었음을 가르친 송홍 선생이다.

흉상 건립은 송홍 선생 사후 20년이 되던 1967년, 서중·일고 출신들이 기금 50만원을 모아 세운다. 처음 장소는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입구 왼편이었는데, 이후 교사를 재배치하고 교문을 확장하면서 1998년 현 장소로 옮겨진다.

흉상의 공식 이름은 '운인 송홍 선생 상'이고 그 아래에는 주기운이 짓고 이용석이 쓴 헌시가 새겨져 있다. "그날의 분노와 그날의 함성/ 꽃같이 쓰러진/ 그날의 더운 피와 눈물로/ 아아 타오르는 그날의 불꽃으로/ 이제야 여기/ 지엄한 당신의 이름을 씁니다." 지엄한 당신의 이름은 광주고보생들의 영원한 스승 '송홍 선생'임은 두말을 필요치 않는다.

뒷면에는 "운인 송홍 선생은 1924년 이 학교에 오시어 우리들에게 항일 정신을 길러주신 길이 잊지 못할 스승이옵기 임의 뜻을 기리는 문하생들이 삼가 배움의 거울삼고자 여기 조촐한 단 위에 영상을 세웁니다" 라고 새기고 있다. 스승 사랑이 넘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