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영산강 유역 마한의 상징 금동관, 어디서 제작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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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영산강 유역 마한의 상징 금동관, 어디서 제작되었나
영산강 유역 마한 대표 유물 국보 제295호 금동관||1917년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을관에서 출토||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인 야쓰이 세이이치 등 발굴||제작장소 두고 ‘하사설-독자 제작설’ 등 주장 각각 ||신촌리 금동관 제작기법 양식, 백제 금동관과 상이||백제 하사품이 아닌 독자 제작 주장이 설득력 얻어
  • 입력 : 2021. 03.10(수) 16:56
  • 최도철 기자

국보 295호 금동관이 출토된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전경. 국립나주박물관 제공

국보 295호 금동관

출토당시 신촌리 9호분 모습

신촌리 9호분 을관 내 유물 출토 모습

신촌리 9호분, 갑·을·병관, 1917년 촬영

금동관은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가?

영산강 유역 마한을 상징하는 유물은 금동관, 환두대도, 대형옹관, 옥과 구슬, 유공토기(有孔土器, 구멍토기) 등 많다. 이중에서도 대표 선수는 누가 뭐래도 1917년 신촌리 9호분 을관에서 출토된 국보 제295호로 지정된 금동관이다. 먼저 영산강 유역 마한의 상징물이 된 금동관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는지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신촌리 9호분에 대한 발굴은 불행하게도 우리 학자들이 아닌 조선총독부 고적조사단인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에 의해 2차례에 걸쳐 조사 발굴되었다. 1차 발굴은 1917년 12월 17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되었고, 2차 발굴은 이듬해인 1918년 10월 16일부터 28일 사이에 이루어졌다. 1차 발굴 당시 신촌리 9호분에 대한 조사는 당시 조사단의 일원으로 제도 사진사였던 오가와 게이키치(小川敬吉)가 맡았다. 조사를 시작한 후 분구 토층의 맨 윗부분으로부터 약 40~60㎝ 깊이에서 첫 옹관을 발견하였는데, 나중에 이를 '을관(乙棺)'이라 이름 붙인다. 이 을관 속에 금동관이 잠들어 있었다. 금동관이 잠들어 있던 을관의 발굴 모습을 오가와 게이키치는 "신촌리 9호분 발굴을 시작하였는데 연도(羨道, 널길)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쪽부터 굴착(掘鑿)하였으나 오후부터는 이를 변경하여 분구의 중앙을 굴착하여 크고 작은 옹관 2개를 발굴하였다. 구연부(口緣部, 아가리)는 점토를 발라서 막아두었고, 옹관의 한쪽을 둘러싸듯 7개의 항아리를 두었다. 안쪽 6개의 항아리는 옹 파편으로 뚜껑을 삼았는데 이를 '을관'이라 이름 붙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인 21일과 22일 눈이 내렸지만 조사가 강행되면서 갑관과 병관, 정관과 무관을 발견한다. 그리고 23일, 갑관과 을관의 내부를 조사하면서 을관 속에 잠들어 있던 금동관이 세상에 등장하게 된다. 오가와 게이키치는 그 모습을 "오바 쓰네키치(小場恒吉)의 도움을 받아 갑 옹관의 내부를 조사하였다. 항아리와 (화살)촉과 도자(陶瓷)와 소옥 등이 출토되었다. 이어 을 옹관의 균열을 이용하여 옹관을 분리하였다. 유해는 재로 바뀌었고 머리에서 금동관과 대도, 창,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다. 목과 상반부에는 각종 옥류가 흩어져 있었고, 다리 부분에서는 소옥과 금동신이 출토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17년 12월 23일은 금동관이 세상에 나오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럼에도 오가와의 기록은 간략했고 감동도 없다. 만약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이 오늘 우리 손으로 발굴되었다면, 금동관은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세상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100여 년 전 금동관은 한국인 누구의 환호도 받지 못한 채, 왜인의 수장일 것이라는 오해까지 받으며 등장했다.

왜인의 수장일 것이라는 오해는 발굴 단장격인 야쓰이가 발굴 2년여 뒤인 1920년 낸 한 페이지도 채우지 못한 약식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반남면에 해당되는 자미산의 주위, 신촌리, 덕산리 및 대안리의 대지 위에는 수십기의 고분이 산재하는데 그들 고분의 외형은 원형과 방대형이고, 봉토 내에 한 개 또는 수 개의 도제(陶製) 옹관을 묻었다.…… 발견 유물은 금동관, 금동신발, 화살촉 등으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고분들은 그 장법과 관계 유물로 추정하건데 아마도 왜인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나주 반남의 왜인 유적'이라는 제목의 특별 보고서를 제출하려고 한다." 그리고 문서에 붙여서 발굴 풍경과 옹관 노출 상태를 찍은 사진 6장을 추가해서 보고서는 마무리된다. 오늘 유리건판으로 보는 당시의 사진이 그것이다.

나주 반남면의 대형 옹관 고분의 피장자를 왜인으로 규정한 것은 1909년 조선고적조사를 시작한 이래 그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공왕후 삼한정벌설'이나 '임나일본부설'의 흔적, 즉 고고학적 자료를 찾고 싶어했던 소망의 반영이었다. 그 소망이 좌절되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물이 '왜인의 것'이며 추후 '나주 반남의 왜인 유적'이라는 특별 보고서를 제출할 것이라는 그의 약속은 지금껏 지켜지지 않고 있다.

금동관의 제작지는 어디인가?

1917년 신촌리 9호분 을관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후 금동관이 어디서 제작되었는지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도 뜨겁다. 일부 연구자들은 백제 수도 한성에서 제작된 후 나주 반남면 일대의 마한 최고위층에게 하사한 하사품(下賜品)으로 보지만, 또 다른 연구자들은 나주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금동관이 백제 왕의 하사품인지 나주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되었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당시 백제와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정치적으로 어떤 관계였는지, 기존의 백제권 왕관이나 신라 및 가야의 왕관과는 제작기법이나 장식 문양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제작 주체가 누구인지, 최근 발견된 영암 내동리 쌍고분 출토 금동관 편과는 또 어떤 관련이 있는지 등 살펴야 할 내용이 너무나 많다.

2017년, 금동관 발굴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국립나주박물관은 '신촌리 금동관, 그 시대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특별전을 열고, 연계 행사로 국제학술대회를 열었다. 학술대회에서는 '1917년 나주 반남면 고분 발굴 이야기'부터 '제작기법 및 장식 문양을 통해서 본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계통',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의 제작 주체' 등 지금까지의 금동관 연구 성과를 총체적으로 들여다보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에 참석한 연구자들 역시 한성에서 제작된 후 내려보냈다는 '하사설'과 나주에서 제작되었다는 '독자 제작설'로 나뉘었지만, 금동관이 백제권 출토의 금동관과 비교했을 때 '같음'보다는 '차이점', 즉 '다름'이 많다는 견해가 더 많았다.

이진우(국립나주박물관학예사)는 '제작기법을 통해서 본 나주 신촌리 금동관의 계통'이라는 주제 발표에서 백제권 금동관과 비교했을 때 '차이점'이 많다는 발표를 하였다. 나주 신촌리 출토 금동관은 금동모관 위주로 출토된 백제권 금동관과는 달리 모관과 대관이 세트로 함께 출토되었는데, 이것부터가 '차이점'이었다.

금동모관은 2장의 금동판을 겹친 후 복륜(覆輪)을 덮고 전후 각각 네 개의 대가리가 둥그런 못으로 고정한 고깔 형태다. 신촌리 출토 금동모관은 복륜을 중심으로 좌우 측판이 결합되어 있는 점에서는 백제권 출토 금동모관과 유사성이 보이지만, 입식이나 대롱이 없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난다.

신촌리 출토 금동대관은 둥근 테에 앞쪽과 양 측면 3개의 나뭇가지 모양의 세움장식을 세운 형태이며, 영락(瓔珞)과 유리구슬을 달아 장식하였다. 이 유리구슬 장식은 백제권 금동모관에 달려 있는 반구형장식과 유사하지만, 대롱이 아닌 못을 이용하여 대관의 상부에 부착하였고 반구형장식 상부를 유리구슬로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은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 금동관의 제작 주체'라는 주제를 발표하면서 금동관 자체를 백제왕의 하사품이 아닌 영산강 유역에서 자체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그 근거로 그는 사여(賜與)의 지표가 되는 중국 도자나 금은제 귀고리가 없음을 들었다. 한성 도읍기 금동관모가 부장된 공주 수촌리·천안 용원리·서산 부장리·익산 입점리에서는 금동관모와 함께 중국 도자가 함께 출토되고 있다. 그러나 신촌리 9호분에는 중국 도자가 없다. 또한 신촌리 9호분에서는 사여의 지표가 되는 금은제 귀고리도 없다. 신촌리 9호분 을관에서도 2개의 귀고리가 출토되지만 금이 아닌 금동으로 만든 제품이었다. 즉, 나주 반남 신촌리 9호분 출토 금동관은 제작기법이 백제권 금동관과는 차이가 날 뿐만 아니라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귀고리가 금으로 만든 것이 아닌 금동제이며, 하사품의 지표가 되는 중국제 도자 등이 함께 부장되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이도학은, 신촌리 출토 금동관은 백제 중앙으로부터 공급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촌리 세력의 토착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지표라고 볼 수 있다면서 "금동관의 주체는 백제가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금동관을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의 운동력이 가장 활발할 때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국보 제295호 금동관은 제작기법과 양식의 특징이 백제에서 출토된 금동관과 크게 다른 토착성을 지니고 있어, 백제왕의 하사품이 아닌 영산강 유역에서 독자적으로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에는 인근의 영암 내동리 쌍고분에서 거의 유사한 금동관 편이 출토되어 동일 장인의 작품이라는 추정까지 하고 있다.

신촌리 9호분 을관 출토 금동관은 백제와 구분되는 또 다른 세계, 즉 영산강 유역 마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