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시마(神津島)의 조선인 오다아(おたあ) 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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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고즈시마(神津島)의 조선인 오다아(おたあ) 쥬리아
  • 입력 : 2018. 12.05(수) 15:23
  • 편집에디터



고즈시마(神津島)의 조선인 오다아(おたあ) 쥬리아

이 묘지는 옛날부터 보탑님(宝塔様) 또는 협답님(篋塔様)이라 한다. 대부분은 에도시대에 죄로 유배되었다. 후쥬후세파의 승려와 같이 촌민의 스승이 되어 존경을 받은 자도 있다. 다른 종파로 비가 없는 자도 있다. 원록(元祿)시대의 사람들이 많다. 서쪽에 있는 조선 양식의 석조 2중 탑은 경장(慶長)17年(1616)봄 유죄(流罪)로 40년간 그리스도 신앙으로 살아온 성녀 오다아 쥬리아를 모신 묘비다. 순뿌죠(駿府城)의 안으로 모셔져 이에야스에게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권력에 굴하지 않고 먼 섬으로 유배의 형을 받았다. 생전에 촌민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고 생각된다. 예로부터 존경받아 다른 묘와 같이 향과 꽃을 올리며 계속 지켜온 사람들에게 귀중한 묘지이다. -소화 45년(1960) 3월 31일 건설 고즈시시마무라 교육위원회.

오다아 쥬리아의 흔적

오다아 쥬리아 유배의 흔적, 일본 고즈시마 안내 표지판의 문구다. 1965년에 촌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쥬리아 묘에는 많은 꽃이 헌화 되고 있다. 제단에는 촛대가 있고 계절에 따라 멜론과 귤, 무와 당근 등 과일들이 봉헌된다. 벽쪽에는 작은 당이 있고 '쥬리아상'으로 조각된 반신상이 있다. 그곳에도 역시 꽃과 봉헌물이 올려져 있다. 자료관에서 쥬리아의 흔적을 추적해볼 수 있다. 쥬리아축제에 관한 포스터, 로마 법왕청의 편지, 외국 신부들의 의견서 등을 볼 수 있다. 포스터는 로마 교황이 고즈시마에서의 쥬리아의 생애를 인정하고 쥬리아마쯔리(祭)를 권장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때의 것이다. 쥬리아에 관한 선교사들의 보고서, 서간문 등도 있다. 이 외에도 섬에 역사, 옛사람들의 생활상 등 관련 기록들이 있다.

고즈시마 정월 축제의 신 보탑님

고즈시마에는 정초 음력 1월 25일을 중심으로, '25일님' 혹은 '23일님'이라 부르는 신을 맞는 풍습이 있다. 이날 신격화된 '보탑님'에게 '사까끼'나 '시끼미'를 봉헌한다. 예로부터 신성한 나무로 여겨져 신전에 올리는 상록수다. 이 보탑님께 참배하면 부인병이 낫는다고 전해온다. 쥬리아의 기적 영험담도 있다. 메이지 40년(1907) 7월 8일 고즈시마에 홍수가 나서 많은 사상자가 났다. 전날 밤 산위에서 홍수를 예고하는 예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섬사람들은 이를 쥬리아가 나타나 경고해준 것으로 생각했다. 고즈시마 사람들은 '보탑님'이라 부르며 참배해 왔다. '보탑'은 다보탑의 준말이며 사찰탑의 미칭이다. 쥬리아 묘탑은 조선식으로 건립되었다. 양식이 우리나라 형식과 비슷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쥬리아를 일본에 데려온 이시다 미쯔나리 일가족의 배려일 것으로 말한다. 쥬리아가 조선인임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나 할까. 현재 이를 기리는 축제가 있다. 일본의 토속신으로 좌정해있기도 하고, 카톨릭 관련 순례 및 봉헌도 이루어진다. 임진왜란 때 우리의 도공들이 끌려가 일본 각지의 도예문화를 급성장시켰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와는 다른 예이긴 하지만 조선인 오다아 쥬리아가 전하는 메시지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오다아 쥬리아의 이름에 관한 여러 가지 해석

일본으로 끌려갈 당시 쥬리아의 나이는 3세에서 5세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기록은 없다. 1976년 '오다아 쥬리아 표경회'에서 발간한 '쥬리아의 명예(ジュリアのほまれ)'에는 "조선 귀족으로 태어났다고 전해오며 겨우 3세 정도 나이에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전쟁에서 체포되어 고니시가의 양녀로 키워졌다."라고 나와 있다. 임진왜란을 말한다.

1986년 발간한 成律子의 '朝鮮史 の女たち'에 의하면 귀족의 딸로 연령은 5세 정도라고 한다.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오다아(おたあ)'라고 알려진 쥬리아의 이름을 한자로 '太田' 또는 'お滝'로 표기한 기록이 있다. 이것은 '오다아'에 맞는 한자를 적당히 골라 표기한 것으로 큰 의미는 없다. 발음상의 '오다아'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에 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없다'에서 왔다는 설이다. 부모가 전쟁에 희생되고 고아가 된 소녀는 고니시 유끼나가가 이끄는 군대의 눈에 띠었다. 이름을 물었을 때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자꾸 물어보자 "없다."라고 했다. 이것이 일본인의 귀에는 '오따아'로 들려 발음하기 쉬운 '오다아'가 되었다는 설이다. 둘째, 이름을 '오(呉)다'라고 했다는 설이다. 일본에서는 이름을 물을 때 '오나마에와(お名前は)'라고 하는데, 이때 대답하는 것이 보통은 성이다. 아마 이런 습관 때문에 어린 소녀에게 "성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가능성이 크며 존칭에 익숙하지 않은 소녀는 '오(呉)다'라고 대답했다는 설이다. 셋째, '吳茶雅' '呉多雅'설이다. 성은 '오(呉)'씨 이름은 '다아'였을 것이며, '다아'가 '茶雅' 혹은 '多雅'가 아닐까 하는 설이다. 넷째, '오십시오'에서 왔다는 설이다. '이랏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는 '오십시오'라는 뜻의 일본어다. 누군가 방문을 했으므로 '오십시오'라고 했는데, 이 인사어가 이름이 되었다는 설이다.

오다아 쥬리아의 납치와 유배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어린 소녀를 일본으로 데려와 양딸로 삼았다. 부인 미쯔(美津)의 시중드는 여자였다는 설도 있다. 부인이 크리스천 교육을 시키며 친딸처럼 키웠다 한다. 고니시 가문의 가업인 약초에 관한 지식도 알려주었다. 약초 지식이 치료의 수단이었던 까닭에 이를 습득한 쥬리아는 병든 사람들을 치료해주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며 포교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598년 임진왜란의 종전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이후 벌어진 세끼가하라 전투(지금의 기후현)에서 이시다 미쯔나리(石田三成)가 이끄는 서군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에게 패하고 고니시 유끼나가는 처형된다. 유끼나가가 다스리던 성은 멸망하고 가족들도 어디론가 끌려간다. 이시다 미쯔나리도 도망 다니다가 결국은 붙잡혀 처형을 당한다. 일가도 뿔뿔이 흩어진다. 어린 쥬리아는 도쿠가와가(家)의 시녀로 들어간다. 시녀로 있던 쥬리아는 자라면서 미모와 교양을 겸비하게 된다. 이에야스의 눈에 들게 되고 쥬리아를 첩으로 삼고자 개종을 강요한다. 하지만 쥬리아는 첩의 권유도 개종도 거절하였다. 결국 죄인이 되어 섬으로 유배된다. 고니시 유끼나가의 부하였던 이시다 미쯔나리는 세끼가하라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 다니다 결국은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참수되었는데, 남은 일족이 쥬리아가 있던 고즈시마에 몸을 숨겼다 한다. 고즈시마에 있는 보탑님이 이 섬에서 생애를 다한 쥬리아의 영을 모신 형태라 추정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유배된 죄인의 기록인 '유인장'이라는 장부도 참고할 만하다. 1899년 화재로 인해 중요 문서가 거의 소실되었는데 다행히 3인의 죄인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다아 쥬리아(おたあジュウリア)경장(慶長)17年(1616)"가 그중 한 명이다.

오다아 쥬리아를 보는 눈

오다아 쥬리아와 관련해서는 소설도 나오고 논문들도 나와 있다. 조선의 역사적인 한 인물을 놓고 종교관이 다른 섬사람들과 가톨릭 신자들, 또한 시민 단체들까지 서로 다른 입장으로 쥬리아를 수용하고 봉헌하고 있다. 우리나라 카톨릭 신자들도 순례삼아 다녀오는 이들이 많다 들었다. 한일간의 국가간 긴장이 다시 팽배해지는 시기, 각각 다른 입장을 취하면서도 오다아 쥬리아를 봉헌하는 현상을 주목할 이유를 상고해본다. 신격화된 역사와 민속현상을 추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현재', 그리고 '여기'에 살아 있고 또 어떤 형태로든 기능하는 맥락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쟁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던 쥬리아는 크리스천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녀가 최후에 일생을 보냈다는 고즈시마에서 섬사람들에게 베푼 숭고한 정신은 귀감이 된다. 사후에 수호신으로 받들어진 이유다. 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쥬리아의 묘비와 당 앞에는 사까끼와 꽃이 끊임없이 봉헌되고 있다. 섬사람들은 언제까지나 쥬리아가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오다아 쥬리아를 상징하는 후데지마(붓섬)에 대해 사람들이 말한다. 바람에 견디고 풍랑에 견디고, 맹렬한 위세에도 굴하지 않고, 항상 변함없는 자세로 대하는 모습이라고. 오늘 우리가 오다아 쥬리아를 주목할 이유이지 않을까. 국제관계는 물론 우리 스스로의 삶에 대한 태도 말이다.

남도인문학팁

고즈시마의 토속신이 된 조선인 오다아 쥬리아

도쿄에서 남쪽으로 178키로 위치에 고즈시마가 있다. 고즈시마 해변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언덕위의 흰 십자가다. 주변으로 오다이 해변이 펼쳐진다. 도쿄도 명승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일본의 둔치 100선으로도 지정되었다. 오다이 해변은 오다 쥬리아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해변 옆으로 우뚝 솟은 바위가 있다. 마치 붓을 세워 둔 것 같아 후데지마(붓섬)라 한다. 고즈시마 사람들은 이 붓섬을 '오네사마'라고 부른다. 오네사마는 언니의 존칭이다. 이 바위가 고즈시마의 언니이자 수호신 오다아 쥬리아라고 한다. 해변에 설명문이 있다. "청초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바위, 바람에 견디고 풍랑에 견디고, 자연의 맹렬한 위세에 굴하지 않고, 항상 변함없는 자세로 대하는 그 모습, 섬사람들은 크게 감동을 느끼는 동시, 그 신체에 신이 머물러 계신다고 생각해, 신으로 숭배하기로 한다. 섬사람들을 지켜주는 신으로, 해변의 초원에 당을 짓고 모신다. 이것이 오다이 묘진이다." 더 자세한 정보는 김태순과 내가 공동으로 발표한 논문 "고즈시마(神津島)의 조선인 '오다 쥬리아'의 수호신적 성격과 크리스천 추모제의 위상(비교민속학)" 연구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주저자 김태순이 고즈시마 현지조사결과를 토대로 초고를 작성하였다. 나와 함께 나가사키, 히라도 등 가끄레 크리스찬 현지조사를 통해 공동연구를 실시한 결과의 일부다. 지난해(2016. 11. 11. 전남일보)의 본지에 게재한 칼럼 '대흥사의 세스페데스 십자가'에도 관련한 정보를 소개해두었다.

오다아 쥬리아 헌창비와 영정

오다아 쥬리아의 묘탑

묘지의 벽쪽에 있는 쥬리아의 당

오다이 묘진

오다이 해변에서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