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풍속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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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남도풍속과 여성
  • 입력 : 2018. 12.12(수) 13:15
  • 편집에디터

진도지역 결혼식사진, 1972년 이토아비토 교수 촬영

남도풍속과 여성

진실로 폐단의 근본을 헤아려 보면 요망한 무당과 교활한 박수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선인을 수천백년 간 더러운 구덩이로 빠뜨린 짓이 아님이 없다. 이 같은 요망하고 교활한 말은 부녀자가 혹 질병과 우환에 걸렸을 때 믿고 감동하면, 가장이 당연히 냉정하게 꾸짖고 엄하게 배척하여 감히 근접을 못하게 막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믿고 스스로 현혹되어 오히려 그들이 감히 신주를 옮기는 여부, 제사의 여부를 관여하게 한다. 슬프게도 남도의 준수한 자들은 본래 같은 이성(彝性, 타고난 떳떳한 본성)을 지녔는데도 어찌하여 지극히 슬픈 마음을 참고 어렵지 않는 일들을 포기하며 정상에 가깝지 않게 천륜 아닌 인정을 달게 받아 들이는가? 오늘날 풍속은 요망하고 허탄한 지관의 말에 많이 현혹된다. 자손이 영체(零替)하면 산화(山禍)탓이라 하고, 벼슬하지 못해도 산화 탓, 병에 걸려도 산화 탓, 의식(衣食)이 넉넉하지 못해도 산화 탓이라 하여 기어코 묘를 옮긴다. 그래서 아침에 쓴 묘를 저녁에 계장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보고 오래된 묘를 파내면서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는다.

김이익이 순칭록에서 비판한 여성

김이익이 순칭록에서 남도사람들을 일컬어 꾸짖는 장면이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순칭록이 가진 의미와 특징을 간략하게 톺아본 바 있다. 200여 년 전의 기록이지만 우리 시대에 전하는 역설적 메시지들이 유효하다. 꾸중을 달게 받고자 함이 아니라, 그 나무람의 진위를 쫓아 지금과 같고 다름을 재구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진도의 유배기간 중 기록한 글이어서 진도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본문 중에 자주 호명하는 남도 혹은 호남 등의 이면에 주목한다. 사안에 따라 다르긴 해도 겨냥하는 대상이 남도지역 전반이라는 뜻이다. 꾸중의 행간을 살피면 김이익이 폐단이라 표현한 기층 풍속의 담당자들이 주로 여성들임을 알 수 있다. "가장이 당연히 냉정하게 꾸짖어 배척해야"함을 강조하는 것, 유약한 가장들이 "신주를 옮기는 일, 제사의 일"등을 여성에게 관계하게 하는 일 등의 언급이 이를 말해준다. 당골과 박수무당의 폐해를 지적하는 내용에 이르면 이장(移葬, 묘지를 옮기는 일)을 하는 일에서부터 풍속 전반의 주도자들이 여성이다. 역설적이게도 지배집단의 '천륜(天倫)'에 대응하는 기층의 '인정(人情)'을 본문에서 확인하게 되는데, 이 인식이 사실은 여성적인 역할을 염두에 둔 것이다. 지배이데올로기보다는 사람을 풍속의 중심에 두는, 특히 여성을 의례의 결정자로 인정하는 풍속 말이다.

혼인 풍속의 같고 다른 점

혼인을 함에 있어, 구고례(舅姑禮)때 양종(兩種, 기러기 암수)의 폐백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 밖의 행동거지도 해괴하고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결혼하는 첫 날 한 번도 여자에게 절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라는 지적 또한 주자가례나 사례편람의 기준에서 해석한 것이다. 해괴하고 부끄러운 행동의 구체적 사례를 들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남도의 기층문화가 본래 가지고 있던 풍속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예컨대 전통혼례에 사용하는 기러기는 부부의 화합과 해후를 염원하는 것일까? 지난 내 칼럼을 참고하면 도움이 될 터인데, 기러기는 오히려 일부종사(一夫從事) 즉, 남편과 시댁에 대한 영원한 복종을 의미한다. 삼천년 가까이 되었을 시경(詩經)에서 이미 그렇게 밝혀두고 있다. 사주단자 보내기에 있어, 당골과 점쟁이의 속설을 믿는 어지러운 풍속이 많아 혹은 궁합이 불길하다는 핑계로 결혼 약속을 어긴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택일단자 보내기에 있어서도, 날짜에 구애받는 일이 많았고, 성혼 날짜를 멀리 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남도에서는 왜 성혼날짜를 멀리 잡았을까? 지금이야 모두 연애결혼이니 다년간 서로를 파악할 수 있지만 오로지 중매가 대세였을 당시의 혼인 배경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양반집안들은 대개 부모가 정해준 대로, 혼인을 미룸 없이 성사시켰음을 상기해보면 그 시절의 풍경이 손에 잡힌다. 납폐(폐백)에 있어, 남쪽지방 풍속은 오직 많이 보내는 것을 훌륭한 일로 여기며 의례 동안에도 잡담과 장난을 한다고 나무란다. 심지어 무식한 상놈들이 하는 짓거리라고 혹평한다. 과연 그럴까?

상·제례 풍속의 같고 다른 점

남도지역 상례에 있어 조석으로 슬프게 곡하는 풍속이 있는데, 수일 후에 갑자기 (곡하는 것을) 거두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조석으로 올리는 상식도 삼년 동안 하지 않는데, 이를 습속에 유혹되었다고 꾸중한다. 행간을 살피면 기층에서는 삼우제(三虞祭) 이후, 곡하는 것을 이행하지 않았고 삼년상도 지키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상주들은 3~4일 음식을 먹지 않고 다만 죽을 먹어야 하는데, 머리를 풀고 편안히 앉아 술잔을 잡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진도 지역의 다시래기가 전승되어 오는 이유가 드러난다. 이른바 유교식 의례와는 판이하게 달랐음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애고'라고 곡하는 것은 다만 상주 쪽에서 해야 하고 조객은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인데 모든 조객들이 '애고'하고 곡을 하는 풍속도 비판하고 있다. 상주들뿐만이 아닌 마을 사람 모두가 상주역할을 하는 듯한 이 풍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또한 상가에서 배불리 먹고 떠드는 것은 죽은 자를 생각지 아니하고 산자를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꾸중한다. 왜 남도사람들은 김이익의 주장처럼 죽은 자를 위하는 것이 아닌 듯 먹고 마시고 떠들며 상례를 치렀을까? 지금까지 전승되는 씻김굿이나 다시래기의 예를 보면, 조문객들과 더불어 웃고 떠들고 즐기고 먹고 마시는 것을 상례의 기본으로 생각한다. 부끄러운 풍속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상여의 운구에 있어 북장구 치고 노래 부르고 떠드는 풍속으로 전승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외에도 지난 칼럼에서 다룬 화려한 색깔로 상여를 꾸미거나 북장구 치며 상여를 운구하는 일 등이 포함된다.

제사를 지냄에 있어서도,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는 사람은 열에 한 두 명도 없다고 지적한다. 무슨 뜻일까? 90%의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데 사당을 짓거나 위패, 신주 등을 모시지 않고 지방(紙榜, 종이에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써서 붙이는 형태)으로 대신했다는 뜻이다. 유교적 질서가 남도까지 습윤되지 않은 이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방을 써서 기제사를 모셨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장지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호남은 의원이나 당골, 점쟁이의 역할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사람의 이목을 현혹시킨다거나 요사의 패설, 잡서의 이론을 탐내는 일 등으로 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도풍속 담당자, 여성과 신앙

권세의 크고 작음을 떠나 김이익의 순칭록이 주는 교훈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목한다. 20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풍속의 같고 다름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배집단의 질서를 천륜에, 기층민중의 질서를 인정에 대비하고 있음이 역설적이다.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 중심의 풍속을 미리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부모가 정한 배필과 망설임 없이 혼인하는 양반들의 중매 풍속과는 달리, 수년 동안 배필을 지켜보게 하고 심지어는 혼인약속을 파기하는 풍속들이 등장한다. 강강술래 놀이가 사실상의 짝짓기 놀이라는 점을 에둘러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부모의 묘를 나란히 쓰지 않고 따로따로 쓴다. 가뭄이나 역병이 왔을 때 '도깨비굿'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좋은 명당의 묘지들을 여성 전유의 반란으로 파헤쳐버린다. 풍수라는 이름의 공간 인식이 남도지역 특히 진도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있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 모든 결정에는 어김없이 풍속을 교란시킨다고 비판하는 당골과 점쟁이, 그 이면의 여성 혹은 여성성이 등장한다. 김이익은 줄곧 지관이나 무당, 점쟁이의 말에 현혹되는 일이 실로 호남처럼 심한 곳이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를 거꾸로 읽으면 역설의 풍경이 펼쳐진다. 그때의 당골과 점쟁이에 의존하는 습속이 현대의 고등종교 역할로 오버랩 될 수 있다. 의사결정의 패권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주어진다. 무엇보다 순칭록이 주는 교훈은 현재, 여기, 우리의 풍속을 읽고 이해하는 역설적 안목은 물론이고, 적어도 남도가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지 않은 여성적 권위의 기층 질서를 토대 삼았다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 기층문화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소환하는 중이다.

남도인문학팁

김이익의 순칭록이 가지는 의미

순칭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위 의식은 풍속에 사용하는 의식과 맞지 않더라도 모두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있는 내용을 따라 보태고 빼고 하였으니 혹시 행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따라 홀기를 만들어도 무방하다." 박진종이 후에 편집한 순칭록 서문에는 또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김공은 힘들여 원고를 쓰고 박옹은 고심하며 교정을 거쳐 인출한 뜻이 어찌 겨우 이 사례(四禮)를 행하다 그치려 함이겠는가? 어쩌면 이 책으로 인해 정확하고 자세히 구비된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에 맞게 점진(漸進)하고 싶어서였는지, 청향(淸向)한 진도 인사들에게 한편으로는 묻고 한편으로는 권면하노라." 다시 말하면 상례비요와 사례편람을 넘어서는 집필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순칭록은 사례편람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사례편람은 도암 이재(1680~1746)가 주자가례를 바탕으로 일상에서 관혼상제의 사례를 적용하는데 편의를 주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순칭록은 그보다 60여년 후인 1805년 초반에 쓰인 글이다. 다만 주목할 것은 실제 사례편람이 간행된 것이 이재의 사후에 수정, 보완 과정을 거쳐 증손 이광정이 수원 요수로 재직하던 1844년(헌종 10)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사례편람의 상례는 김장생(1548~1631)이 친구 신의경(1557~ 1648)이 지은 초고를 수정, 첨삭 보완한 상례비요를 적극 참조하였다. 상례비요 초고는 1620년에 전라도의 유생들이 1차로 간행한 바 있다. 어쨌든 사례편람 완성본으로만 따지면 오히려 1805년 집필 탈고한 순칭록이 더 빠르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보편적으로 인용된 이재의 사례편람에 비해 김이익의 순칭록은 진도지역 혹은 호남지역에 한정해 유통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한계를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기록으로서는 사례편람 완성본 발간 40여 년 전에 발간되었다는 역사성을 부여할 필요는 있다.

김이익이 집필한 원순칭록 초두 부분

순칭록 중 혼례 관련 도식도

진도지역 함장수 사진, 1972년, 이토아비토 교수 촬영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