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시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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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세시의 변화
일 년 중 마지막 절기가 크리스마스라고?
  • 입력 : 2018. 12.26(수) 10:54
  • 편집에디터

광주 동구 국립아시아문화당 앞 5·18민주광장에 빛고을성탄트리가 오색불빛을 밝히며 온누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나건호 기자

일 년 중 마지막 절기가 크리스마스라고?

연말이다.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해마다 이 시기가 되면 차분히 한해의 성과를 돌아보고 다음 해의 계획을 세워보리라 다짐하지만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한 해를 마디마디로 잘라 이런저런 명절을 배치하고 그 의미들을 톺아보는 지혜에 대해서는 지난 칼럼에서 여러 차례 언급하였다. 그 시간의 마디에 이름을 붙인 것을 명절(名節) 즉 마디의 이름이란 이치도 덧붙여 해석한 바 있다. 명절이라 함은 보다 중요하다는 마디 이름을 들어 설이니 추석이니 따위의 이름을 내세웠을 뿐이다. 명절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세시절기들도 사실상 시간을 분할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마디의 이름임은 불문가지다. 그렇다면 24절기의 마지막 마디 이름, 곧 명절은 무엇일까? 크리스마스다.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이 있는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세시절기의 인식을 말하는 것. 양력이 음력을 대체한지 오래되었다. 일 년 주기를 대부분 양력으로 셈한다는 뜻이렷다. 양력 1월에 포진해 있는 소한과 대한을 제외하면 양력 12월의 마지막 절기는 동지다. 그런데 이 동지를 크리스마스가 복속해버렸다. 크리스마스에 동짓죽을 나눠먹는 풍속이 낯설지 않음은 이런 변화에 기인한다.

크리스마스와 동짓날의 접속

동지가 팥죽 한 그릇 먹는 날로 인식 된지 오래되었다. 팥죽에 대한 정서라도 남아있으니 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세시의 풍속으로 자리 잡으면서 이 동지를 대체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개신교의 풍속을 어찌 세시풍속의 하나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고 비판해도 소용없다. 이미 명백한 절기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 원인을 따져 묻고 과정을 이해하는 정도다. 크리스마스는 일제강점기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 속에서 두드러지게 정착되었다. 전통적인 시공간의 변화를 기반으로 세시풍속이 변화의 기로에 서 있을 시기였기 때문에 더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다. 특히 개신교의 종교적 틀에 벗어나 동지를 대체하는 소비적 연말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데서 한국적인 특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정보는 염원희가 쓴 '크리스마스 도입과 세시풍속화 과정에 관한 연구-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국학연구, 2011)'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등 세시적 현상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사이의 딜레마가 여기서 지적될 수 있다. 이른바 세계화와 토착문화간의 괴리에 관한 담론들 말이다. 지역 간의 문화적 같음과 다름으로 연결하여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서울 중구의 한 상점에서 시민들이 다양한 초콜릿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빼빼로데이와 가래떡의 날

발렌타이데이며 빼빼로데이 또한 세시절기의 하나로 스며든지 오래다. 이 또한 누가 반대하거나 대안을 마련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부 관련 기업을 숙주삼아 상업적으로 성행하는 날이긴 하지만, 이에 대한 이해나 대응방식이 전근대적이다. 예컨대 이에 대응해 가래떡 데이를 창안했다.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빼빼로데이에 모두 나서 가래떡을 먹을까? 발렌타인데이에 모두 나서 초콜렛 대신 전통 엿을 먹을까? 풍속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탁상공론일 뿐이다. 세시풍속을 활성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접근하는 이런 방식이나 이해 자체가, 뒤떨어진 생각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세시와 절기가, 시간에 마디를 부여하여 의미화하고 그 의미들을 통해 생활의 갱생을 도모하는 이치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헛발질들이다. 이런 방식의 탁상공론자들이 말하는 전통은 그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은닉된 이데올로기의 강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를 일러 전통이라는 이름의 족쇄라 비판해왔다. 수단이 목적을 강요하는 이른바 가치 전도(顚倒)이기 때문이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접근이나 추적이 오히려 선순환 발전의 걸림돌이 되는 예들을 수도 없이 목격한다. 현실을 좀 더 치밀하게 분석하고 대응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다음 세대로 연결시킬 것이 있고 없애야 할 것이 있다. 아니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있고 없어지는 것이 있다. 시대정신이라 함은 이를 명료하게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행사장에서 직원들이 빼빼로데이를 맞아 판매하는 상품을 소개하고 있다. 뉴시스

김장일은 한민족의 전통 절기일까?

연말 세시절기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것이 김장이다. 반겐넵의 지적을 인용하자면, 사람의 일생에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통과의례가 있듯이, 일 년을 주기 삼은 절기 중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의례 같은 것이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되면서 더 한층 관심의 대상이 된 듯하다. 이를 국가나 민족의 이름으로 강제하거나 강요하는 주장들을 심심치 않게 접한다. 김치를 포함한 명절음식 자체가 이런 모양새다. 전국적인 획일화의 단면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민족적 혹은 국민적 정체성을 표상하기 위해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지역문화의 다양성보다는 전국적인 획일화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들을 곰곰이 들여다볼 필요를 느낀다. 주영하는 '초등학교 사회교과서와 아동도서에 나타난 명절음식의 서술내용 분석'이란 논문을 통해서, 각종 민속현상에 대한 20세기의 변화과정을 추적하고 설명하는 해석 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920년 이후 진행된 민속의 변화, 소멸, 변용 양상을 면밀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글로컬(글로벌+로컬)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탄생된 이유를 설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음식의 사례에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절기나 명절 등, 시간을 분절화 하여 이해하는 우리 삶 전반에 걸친 이해방식이라 할 만하다. 예컨대 김장을 하지 않는 독신자 세대의 풍속은 어찌 해석할 것인가?

자연력에 덧붙여 정치력을 강요한 절일(節日)들

세시라고 호명하지 않지만 유사한 풍경들도 있다. 수능시험일, 발렌타인데이, 빼빼로데이 등 변화 생성되는 풍경들이 그것이다. 협의의 세시가 자연력이라면, 광의의 세시를 정치력(종교 문화를 포함하여)이라 부르고 싶은 이유다. 굳이 전통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이는 것은 대개 전통적으로 절기의 의미로 이해되어 온 세시라는 뜻이다. 이미 세시적 의미로 통용되는 크리스마스를 포함하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기왕의 세시는 농사력이나 어업력으로 치환 설명되어왔다. 자연 순환의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적 행사라는 맥락에서는 정치적 의미가 강조된다. 이른바 국경일이나 공휴일 지정의 메커니즘이다. 고대로부터 국가적 제사가 중요시되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는 5월 1일 노동절과 10월 1일 국경절 등이 포함된다. 도교 기반의 절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각각 1월 15일, 7월 15일, 10월 15일을 기념한다.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오봉이 7월 15일이 되었고 11월 15일이 신사참배 하는 절일이다. 우리도 3.1절이니 개천절이니 하는 따위의 절일이 여기 속한다. 건국일을 놓고 격한 논쟁을 벌였던 이유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narcissism)적 개인들이 해체하는 세시 풍경

세시와 절기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좁혀 말하면 국가기념일 및 설과 추석 등 몇 개만 제외하면, 전통적 의미들은 이미 해체되었거나 해체되고 있다. 아니지, 부단하게 변화 생성되어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자연 순환이라는 마디에 부차적 의미들을 덧입힌 것들이기 때문이다. 세시기절기 풍속의 와해 혹은 변화 생성은 현대인들의 개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명구는 그의 글 '유교적 가족 안에서 개인은 어떤 모습으로 사는가-한국과 중국 텔레비전 드라마에 나타난 개인성의 변모(언론과 사회, 2014)'에서 근대적 인간형인 '합리적 개인'을 넘어 기성 사회조직에 대한 불신, 탈정치화의 경향을 지적한다. '나르시시즘적 개인'으로 변모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 후기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동안 한국과 중국 사회의 가족관계 내에서 유교적 전통과 개인성(individuality)이 어떻게 실천되고 변모되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나르시시즘은 일반적으로 자기애(自己愛) 곧 스스로를 사랑하는 심리를 가리킨다. 연말이니 어떤 절기가 중요하고 연시이니 어떤 의례를 따라야한다는 등, 기왕의 풍속을 강제하는 담론들은 사회에 대한 불신, 탈정치화의 경향 속에서 오히려 반감과 일탈을 종용할 수 있다. 머지않아 나르시시즘적 개인들이 추동하는 절기의 생성이 이어지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며, 나의 무엇을 성찰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의 어떤 무엇을 상고할 것인지 거듭 되새김질 해본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남도인문학팁

세시절기의 의미

세시가 일 년 단위의 시간을 분할한 특정한 때를 말한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음력으로는 삭망(朔望, 초하루와 보름)의례를 포함한다. 양력으로는 24절기가 대표적이다. 초파일과 크리스마스가 세시의 중요한 절일이 되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고려의 세시가 삭망 등의 자연력에 근거한 삶이 중심이었던 데 반해 조선에서는 자연력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속절은 시간을 관념하는 중요한 단위였기에 국가에서 정책을 시행하는 차원에서 활용하기도 했다. 사회적 이념을 실현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지방에서는 명일을 축하하여 공물과 물선을 바쳤다. 삼명일(三大節)은 국가뿐만 아니라 온 백성들이 중요한 날로 인식했다. 임금의 탄신일, 정월 초하루, 동지 등을 말하거나 단오, 추석, 동지 등을 말하기도 한다. 왕실 조상이나 외가 묘소에 치제하는 날로 육명일이 지정되었다. 단오와 중양에는 국가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치르는 특별시험을 절일제(節日製)라고 했다. 본래 시간단위의 마디들은 농사력과 어업력의 중요한 기점이 되기에 기억해야 할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것의 일부가 국가의 중요한 제도와 중첩되고 또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기점들이 절기화 되었다. 자연력이라는 마디 안에 은닉된 의미들이 있다. 정치적, 종교적 의미들이 덧입혀진 것. 있던 세시가 없어지고 새로운 세시가 삽입된다. 누차에 걸쳐 이 변화는 반복되어왔다. 새로운 절기들이 새롭게 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