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의 눈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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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들판의 눈발자국
  • 입력 : 2019. 01.02(수) 14:51
  • 편집에디터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에 위치한 백범김구선생은거기념관은 김구선생이 1898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를 응징하기 위해 일본 장교를 살해한 혐의로 인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탈옥해 40여일을 은거한 곳(집) 에 유품 등을 전시한 곳이다. 보성군 제공

눈 많이 내린 산야를 걸으려면/ 어지럽히지 말고 바르게 걸어야 한다/

오늘 내가 걷는 이 발자국은/ 반드시 뒤따르는 사람의 이정표가 된다/

穿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朝我行跡/ 遂作後人程/

눈이 차곡차곡 쌓인 날, 순백의 평지를 앞서 걸어간 발자국을 따라 걸어본 경험이 있는가? 누구에게나 낯익은 풍경,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애독하는 시 '야설(野雪, 들판의 눈)'이다. 서산대사의 시가 아니라 이양연(1771~1853)의 시라고 밝혀진지 오래되었다. 정민 교수 덕분이다. 백범 김구가 즐겨 읊고 썼으며, 김대중 대통령도 애호하던 시로 알려져 있다. 선지자의 행보에 비유된 이 시는 광범위한 사례들에 인용되거나 그 의미를 확장시켜왔다. 이양연 또한 개인적인 삶의 소회를 넘어 시국의 풍경들을 이 노래에 담아냈을 것이다. 분단 전후 파란을 겪었던 백범이 왜 이 시를 애송했겠는가를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다. 김대중 대통령 또한 오른 어깨위에 걸어두고 스스로 걷는 길에 대한 경구로 삼았다. 오늘 내가 걷는 길에 대한 경구이지 않겠는가. 그들이 걸어간 길을 우리가 따라 걸었고,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후예들이 따라 걸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모골이 송연하다. 고사리손을 한 낯익은 얼굴들이 주마등을 이룬다.

한해륙(韓海陸)에 스며든,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라.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 성경 신명기 32장 7절 말씀이다. 시 '들판의 눈'을 다시 풀어놓은 듯하다. 성경에서야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연대를 기록했겠지만, 우리의 처지를 겹쳐보면 한해륙(韓海陸)지경 여기저기 떠오르는 이름들이 있다. '한해륙'이란 동국대 윤명철 교수가 한반도라는 호명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해석해낸 용어다. 반도사관이라는 오명을 벗어 던지고 해양과 내륙의 교섭을 추동하는 동아지중해적 개념으로 확장시킨 용어다. 시 '야설'에 겹쳐 역대의 연대를 생각해보니 한해륙에 스민 그윽한 이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파와 이념을 넘어 정녕히 이 나라를 위했던 선지자들의 이름들이다. 잊어버린 이름들, 사실은 밝혀지지 않은 이름들이 더 많다. 시대의 이름으로 끄집어 올리지 못한 이름들, 분단의 장벽에 갇혀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배척당했던 이름들이 그 안에 있다. 김구는 이 시를 좌우명 삼으며 앞서간 어떤 이들의 발자국을 생각했던 것일까? 베트남의 호치민이나 중국의 마오쩌뚱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한해륙 깊숙이 스며든 어떤 이름이었을까? 설문을 하고 통계를 내보면 대강의 윤곽이 나올 것이다. 베트남인들이, 중국인들이 그들의 지도자, 곧 순백의 눈길을 앞서 걸은 자들에 대해 갖는 존경심을 치환해보면 안다. 아쉬움도 크지만 새겨야 할 이름들도 많다.ㅏ

보성 쇠실마을은 백범과 무슨 인연이 있나?

용산 효창공원이나 광주에만 백범기념관이 있는 게 아니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 마을에도 백범 기념관이 있다. 산등성이를 가로지른 국도, 높다란 도로 아래터널을 끼어 들어가는 곳이다. 2006년에 세워졌으니 10년이 넘었다. 생소하다. 왜 백범 기념관이 남도자락 계곡 깊숙한 시골 마을에 세워졌을까? 백범의 탈출, 은신, 분단을 온몸으로 가로지르며 여행했던 호남방문들이 모두 관련되어 있다. 백범은 1898년 5월 현재의 기념관 오른편에 있는 김광언(증손자 김태권)씨의 집에서 45일여 동안 은거했다. 1896년 청년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하수인 쓰치다를 맨손으로 때려죽이고 체포되어 인천감영에 있다가 탈옥한 이후다. 스치다 조스케는 일본 육군 중위 신분으로 조선에 밀파된 군사간첩이라고도 하고, 상인, 혹은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 등으로 주장된다. 해주감옥에서 인천감옥으로 이관되어 사형을 기다리던 중 고종의 지시로 사형이 중지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898년 3월 죄수들과 함께 탈옥에 성공한다. 삼남지방의 민가들을 찾아다니며 도피생활을 한다. 같은 해 가을 공주 마곡사로 들어가 출가하게 되는데 보성 쇠실 마을 김광언씨 댁에 있던 것은 이 도피기간 중이다. 현재 기념관 마당에 백범이 떠나면서 "동국역대"라는 책 표지에 남긴 시를 새겨두었다.

"이별은 어려워라. 이별하기란 참으로 어렵구나. 참으로 이별은 어려운데 이별한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구쳐 꽃나무 한 가지를 꺾어 절반씩 나누고 한 가지는 종가 댁에 남겨두고 한 가지는 가지고 떠납니다. 넓은 천지에 살아서 또 만날 것인지 이 강산을 버리고 떠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인데 네 사람이 한 달여 동안 한가로이 놀고 지내다 이별을 아쉬워하며 덧없이 떠납니다. 먼 훗날 이것을 보시게 되면 혹시 오늘의 나를 회상할까 생각되어 정표로 남겨두고 멀리멀리 떠나갑니다." 이 시의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 하여 좀 다른 방식으로 기술된 것들도 있다.

1946년 보은의 방문, 백범이 쇠실마을에서 꺾어간 꽃가지는 어디로 갔을까?

광복 후 1946년 백범은 다시 호남지역을 방문하게 된다. 환국 후 한국독립당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시작한 지방 순회의 길이다. 이승만과 정치적 대립을 이루던 시기였기 때문에 각처에서 군중들이 운집한 환영대회 등을 열었음을 알 수 있다. 방문의 기록이며 사진들이 이런저런 책과 사진들로 남겨져 있기도 하다. 이때 맺은 인연으로 광주 백범기념관을 만들기도 하였다. 당시 광주의 한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김구 환영대회가 열렸고 백범이 성금으로 받은 재산을 내놓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것. 해방 직후 귀향한 동포들의 어려운 처지를 듣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 종잣돈으로 조성한 곳이 '백화마을'이다. 아마도 자신의 상해생활과 독립운동을 하던 동포들의 생활을 상기했던 탓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쇠실마을 김씨의 후손들이 당시 백범이 건네 준 책과 글을 보존하며 자랑으로 여겼기 때문에 2006년 백범기념관도 세워지게 된 것이다.

백범 또한 쇠실마을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호남방문길에 옛 은거지를 다시 찾는다. 보성에는 당해 9월에 방문하였는데, 이를 일러 보은의 방문이라 한다. 안동김씨 종친들이기도 한 쇠실마을의 김광언과 이웃들의 친절이 보은의 방문까지 이어진 것임은 재론이 필요 없다. 그만큼 보성에서 얻은 안식과 재충전의 에너지가 컸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책 표지에 시를 적으며 당시 백범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한 가지는 꺾어 종가 댁에 남기고 한 가지는 꺾어 자신이 가지고 나선 그 마음 말이다. 종친의 우호를 넘어서는 남도의 그 무엇이 백범을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거쳐 종국에는 분단을 막아서는 한해륙의 아이콘이 되게 하였을까? 45여일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여기서 얻은 백범의 마음이 그를 지탱한 초심이었을 것임을 자주 생각한다. 마치 주몽이 그의 부인 예씨에게 칼을 부러뜨려 남기고 훗날 두 조각 맞추어 아들 유리를 확인하려 한 것처럼.

꽃 한 가지 꺾어 절반은 북에 두고, 절반은 남에 두는 기해년 첫 눈길이길

기해년을 축복하는 것인지 연말연시 많은 눈이 내렸다. 지혜롭지 못하고 덕망조차 없는 내 눈에는 앞서 간 이들의 발자국만 선연하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다가 종국에는 그 발자국을 따라 걷기 때문이다. 순백의 눈 내린 언덕, 분단의 질곡을 딛고 용기 내 걸어가는 그들이 내게는 스승이요 선지자다. 거슬러 오르면 마디마디 외쳐 부를 이들의 발자국이 있다. 이념이라는 미명 아래 채 길어 올리지 못한 이들의 발자국들도 있다. 무엇보다 이름도 빛도 없이 한해륙(韓海陸)의 바람과 물과 기운이 된 선대들이 있다. 옛날을 상기하고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고 걸어간 그들의 발자국을 따르려 하기 때문이다.

기해년 초입, 황금돼지의 연호가 난무한다. 맘몬이 삶의 중심이 되어버린 현실을 질책하는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다. 한낮에도 등불 켜고 사람 찾는 화두를 다시 오른 어깨 위에 걸어둬야 할 모양이다. 새해 초하루 칼럼을 통해 성찰을 주문했다.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사람은 이름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어디 중국속담뿐이겠는가. 역사를 털어 이만한 때가 없다 싶을 만큼 전쟁과 분단의 반전을 꾀할 기해년이다. 보성 쇠실 마을에 피신했다가 꽃 한 가지 꺾어 한 가지는 마을에 두고 한 가지는 가져가신 백범의 초심을 생각한다. 정치적인 사정은 내가 잘 모른다. 오로지 분단만큼은 막아야겠다던 그 초심을 상고할 뿐이다. 한 갑자를 훨씬 넘기고야 비로소 찾아온 평화와 화해의 시대, 백범이 못다 이룬 남북평화의 시대를 누군가는 헤쳐 나갈 것이다. 그 걸음걸음을 결단코 응원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따라 걸어야 할 발자국이기 때문이다. 백범이 못다 쓴 한해륙의 연대기를 완성하기 위해, 남녘에 일찍 핀 꽃 한 가지 꺾어 간직한다. 한 가지지는 내가, 또 한 가지는 북으로 가져가기 위해.

남도인문학팁

백범 김구의 생애

1876년 8월 29일 황해도 해주군 백운방 텃골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창암(昌巖)이고 호는 백범(白凡), 연상(蓮上)이다. 순진무구한 백성을 상징하는 백(白)과 보통 사람이라는 뜻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지었다 한다. 1893년 황해도 지역 동학에 가담했고 소년접주로 불린다. 1894년 동학혁명 때 최시형을 찾아가는 등 여러 일화들이 있다. 만주의병대에 활동하다 실패하고 귀국한다. 1896년 쓰치다를 때려죽이고 갇혀 사형을 기다리다가 고종의 특명으로 사면, 탈출하여 보성 쇠실마을에서 45여일간 은거한다.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생활을 하다가 애국계몽운동 등을 거쳐 망명,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임정 이후 활동은 주지하는 바와 같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안중근의 아버지와 안중근과의 관계 등이 주목된다. 광복 후 귀국하여 활동하다 전국순회를 한다. 이때 남도지역 방문기록이 김구의 남도길 등으로 회자된다. 기독교에 귀의하여 신자가 된다. 동학, 불교, 기독교로 개종한 셈이다. 북한과 남한의 단독정부에 반대하여 남북협상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결국 실패하고 1949년 6월 26일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총격당하여 7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효창공원 백범김구 기념관 외에 광주 백범기념관 보성 쇠실마을 백범 기념관 등이 있다.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에 위치한 백범김구선생은거기념관은 김구선생이 1898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를 응징하기 위해 일본 장교를 살해한 혐의로 인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탈옥해 40여일을 은거한 곳(집) 에 유품 등을 전시한 곳이다. 보성군 제공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에 위치한 백범김구선생은거기념관은 김구선생이 1898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를 응징하기 위해 일본 장교를 살해한 혐의로 인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탈옥해 40여일을 은거한 곳(집) 에 유품 등을 전시한 곳이다. 보성군 제공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에 위치한 백범김구선생은거기념관은 김구선생이 1898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제를 응징하기 위해 일본 장교를 살해한 혐의로 인천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탈옥해 40여일을 은거한 곳(집) 에 유품 등을 전시한 곳이다. 보성군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