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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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아리랑고개
  • 입력 : 2019. 01.23(수) 12:56
  • 편집에디터

문경 새재 1관문. 문경시청 제공

아리랑고개

이윤선 (사)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이사장 문화재청문화재전문위원 전남도문화재전문위원

암 환자로 3년을 살았다. 그 고개를 넘어 아내와 여기에 올수 있어 무한히 행복하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내려오면 따뜻한 마음들이 맞아주는 희망이 있는 고개/ 아이 셋을 낳아 기르던 시절. 힘들고 고된 고개이지만 행복하고 보람된 고개이기도 했던 나의 아리랑고개/ 어릴 적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 대신으로 살기가 어린 나에게 너무 벅찬 시기였다. 그 시절 나에게는 도저히 지나갈 것 같지 않던 그 시간들, 험난한 고개였다/ 오십 고개를 넘으면서 참으로 많은 아리랑고개를 무사히 넘어왔다. 죽을 때 후회 없이 죽는 게 아리랑 고개다/

정선아리랑박물관 고개 특집전 관람객들이 남긴 포스트잇이다. 저마다의 인생을 고개에 투사하고 있다. 이들의 생각들을 종합해보면 아리랑고개는 인생 고개다. 이 고개를 넘겨야 순탄한 시절이 왔음을 고백하고 있다. 나는 지난 달 나를 업어 키운 누나를 잃었다. 예순 여섯, 죽기에는 너무 억울한 나이였다. 예순의 고개를 넘지 못한 셈이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학교도 거의 다니지 못했다. 일찍이 서울로 나가 공장생활을 했다. 혼기가 되어 돌아와서는 또 가난한 남자를 만나 혼인을 했다. 억척스레 농사일을 했다. 가난은 대물림 되었다. 소도시로 나와서는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했다. 아이들 뒷바라지 끝나고 이제 허리 펼만한 시간, 가난한 이들에게는 죽음이 평화라도 된다는 말인가. 뜬금없이 쓰러져 죽음에 이르렀다. 이 굽이굽이가 모두 고개였다. 아리랑 고개, 노랫말처럼 그냥 스리 살짝 넘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아리랑 고개, 스리 살짝 넘을 수는 없는 것일까

아리랑 쓰리랑 아리랑 쓰리랑 아리랑/ 아리 쓰리 아리 쓰리 아리랑 쓰리랑 아리랑/ 꼬불꼬불 첫째 고개/ 첫사랑을 못 잊어서 울고불고 넘던 고개/ 꼬불꼬불 둘째 고개/ 둘도 없는 님을 만나 정을 주고받던 고개/ 꼬불꼬불 셋째 고개/ 새마을운동 하려고 삽 들고 넘던 아리랑 고개/ 꼬불꼬불 넷째 고개/ 내가 내가 내 간장을 스리 살짝 넘던 고개/ 꼬불꼬불 다섯째 고개/ 다섯 여섯 일곱 여덟아홉 열 열 하나 열 둘/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지금은 잊혀진 노래, 영암사람 하춘화의 아리랑 열두 고개다. 경쾌한 리듬으로 노래하지만 내용은 시련과 극복에 관한 것들이다. 첫사랑을 못 잊어서 울고불고 고개를 넘는다. 첫사랑 한번쯤 안 해 본 이 없을 것이니, 형용 못할 아픔들 견디어 낸 용기가 가상할 따름이다. 예컨대 로미오와 줄리엣은 첫사랑의 고개를 극복하지 못한 사례일 것이고, 춘향이와 이도령은 그 고개를 꼬불꼬불 넘어 극복한 사례일 것이다. 직설적으로 울어내니 마음이 가벼워진 것일까. 고비들을 넘기면 이내 스리 살짝 넘어가는 지혜가 생기는 모양이다. 두 번째 고개에서는 다시 둘 도 없는 임을 만나 정을 주고받는다. 셋째 고개에서는 새마을운동의 핍진함 혹은 역동성을 노래한다. 이 노래에서 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시련과 극복의 과정을 묘사하는 고개는 모두 열 두 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하춘화의 노래뿐 만이 아니다. 박시춘이 만든 아리랑 삼천리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창작된 대중가요 아리랑들이 있다. 고개 이야기인데 왜 아리랑을 이야기할까? 우리의 노래 아리랑이 고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아리랑 가사가 그렇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고개는 시련의 은유다. 노랫말들은 보다 직설적으로 고개를 직유하기도 한다. 전통 아리랑에 대해서는 몇 차례 언급하였으니 지난 칼럼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어쨌든 근대기 이후 광주사람 정율성 등 아리랑 노래나 이야기들을 만들어 민족혼을 고취시키던 사람들도 포함된다. 김산의 아리랑이나 광복군 아리랑이 대표적이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로부터 최근의 아리랑 가요들까지, 특히 백두산 천지에서 알리가 부른 진도아리랑까지, 사실은 모두 시련의 시대, 고난의 고개를 이겨낸 불굴의 의지를 노래한 것들이다. 노래뿐일까?

호랑이와 열두 고개, 무조신화 바리데기까지

어느 가난한 홀어머니가 세 아이를 데리고 살았다. 고개 너머 부잣집에 품팔이를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부잣집 떡방아 일을 해주고 떡 아홉 개를 얻어 돌아오는 길, 열두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런데 웬일일까 첫째 고갯마루에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 떡 하나 주면 안 잡어 먹지" 어머니는 떡 한 개를 호랑이에게 주었다. 두 번째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또 호랑이가 길을 막았다. "그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어머니는 다른 떡 한 개를 내어주었다. 세 번째 고개에 이르러서도 호랑이가 나타나서 떡을 요구했다. 떡 한 개를 또 내어주었다. 넷째 고개, 다섯째 고개를 넘어 아홉째 고개에 이르러 마지막 떡 한 개까지 던져주었다. 열 번째 고개에서 호랑이가 말했다. "왼팔 하나만 주면 안 잡어 먹지" 떡이 다 떨어진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왼팔을 내밀었다. 열한 번째 고개에 이르니 호랑이가 나타나 오른팔을 요구했다. 어머니는 남아있는 오른팔을 내밀었다. 열두 고개에 이르니 호랑이는 어머니를 냉큼 잡아먹어버렸다. 이후 아이들이 해와 달이 되는 버전 등으로 연결된다. 노랫말에서는 대부분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이 묘사되는데, 호랑이 고개 이야기에서는 어머니의 비극으로 끝난다. 이를 여성과 한(恨)으로 해석해야 하나. 유사 각편들과 확장된 버전들을 보면 무조신화 바라데기에 이른다. 바리데기가 갖가지 환란을 무릅쓰고 저승국에 가서 아버지를 구하는 생명수를 구해오기 때문이다. 열두 고개의 시련을 극복한 원형이라고나 할까. 대체로 열두 고개에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나의 누나처럼 육십 고개를 넘기지 못하거나, 무조신 바리데기처럼 죽음의 고개마저 넘기고 다시 살거나.

굽이굽이 열두 고개, 굽이와 고비

호랑이 고개는 어머니의 한(恨)일 수도 있고, 바리데기의 극복일 수도 있다. '굽이굽이'의 '구비' 혹은 '굽이' 또한 고개의 다른 표현이다. '굽이'의 사전적 풀이는 '휘어서 구부러진 곳'이다. 골짜기를 여러 굽 돌기도 하고 굽이가 많은 산길을 걷기도 하며 강물이 굽이굽이 흘러가기도 한다. 모두 구부러진 곳이라는 고개와 유사한 말들이다. '고비'의 사전적 풀이는 '일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나 대목 또는 막다른 절정'이다. 예컨대 열두 고개로 상징된 삶의 고난에서 가장 중요하거나 막다른 위험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수난이 경과하거나 어려움을 극복해냈을 때 '한 고비 넘겼다'고 말한다. '고비'와 비슷한 말이 '절정', '위기', '곤경', '기로' 등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또한 고개와 비슷한 말이다. 모두 삶의 환란과 역경을 나타낸다. 개인사로 보면 한 사람이 일정한 주기 동안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일 수도 있고 민족이나 나라 전체로 보면 나라를 잃거나 독립하는 등 위기와 기로 등일 수도 있다. 대개 민족 수난기에 아리랑 노래가 널리 불려지며 고개를 노래한 사례가 많음도 이런 취지로 이해된다. 나라 전체를 놓고 보면, 문경새재가 상징적 고개다. 상징을 넘어 '고난'이나 '기로'를 말하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북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상황 설정이 좀 다르긴 하지만 고난을 이겨낸 기쁨이나 애환 등을 노래할 때 여지없이 문경새재를 호출하기 때문이다.

열 두 고개 넘은 성취감으로 설날을 맞이해야

숫자 12의 민속 풍경에 대해서는 책 몇 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많다. 그만큼 사람들의 의식적 무의식적 관념들이 투사된 숫자다. 12지신은 말할 것도 없고 일 년 열두 달, 하루 열두 시, 가야금 열두 줄 등 헤아릴 수 없다. 일 년 열두 달 등의 12라는 숫자가 가진 상징으로 읽을 필요를 말해준다. 마치 열두 달을 넘겨 일 년을 보내듯이, 열 두 시간을 넘겨 하루를 보내듯이, 고개는 공간의 굽이이기도 하면서 시간의 분절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설날이다. 열두 달이란 시간의 분절을 의미화하고 그 기점에 설날을 둔 것은 일 년 열두 고비를 잘 넘겨 비로소 새로운 시작점에 서라는 뜻이다. 무조신 바리데기가 저승국에서 생명수를 얻어오는 것을 상기한다. 마치 기독교에서 예수의 부활을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다. 해마다 설날이 되면 일 년이라는 시간 혹은 열두 달이라는 시간이 고개를 넘기는 의미를 되새긴다. 다시 열두 고비를 맞이하긴 해도 한 해 혹은 한 시절을 잘 극복해내고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음을 상기하라는 천지운기의 명령이다. 나라로 치자면 올해 남북 화해와 평화가 안착되는 중요한 시기다. 이 고개를 잘 넘어야 한해륙(한반도)의 새날을 맞이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질병에서 학업, 가정에서 직장의 일까지 넘어야 할 고개들이 산적해 있다. 영암사람 하춘화의 노래를 다시 듣는다. 내 간장을 스리 살짝 넘는 고개 아리랑 고개.

남도인문학팁

우리에게 아리랑고개는 무엇인가?

정선아리랑박물관 고개 특별전 관람객들이 남긴 포스트잇 내용들 중 몇 개를 더 골라 고개의 의미를 톺아본다.

"나에게 아리랑 고개는 인생을 넘어가는 사십대의 마음/ 인생을 숨 가쁘게 살아오면서 정상에서 하산하는 느림의 미학/ 좋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걷는 길/ 살아온 날들 어려웠던 인생고개들/ 어려웠던 가난과 학창시절의 어려움 이제 인생 제2막의 고개로 넘어 간다/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아리랑 고개다/ 강아지들과 전쟁 치루는 매일 매일이 행복한 아리랑 고개/ 남편을 길러야할 나의 두 번째 인생/ 인생을 살면서 한해 한해가 나의 아리랑 고개/ 어려운 시련과 고난을 이겨내고 행복과 기쁨을 기다리는 것/ 혼자인줄 알았는데 함께인 것/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고개/ 인간의 인생 굴곡 자체/ 힘이 들어도 넘을 수밖에 없는 고개/ 힘든 고개를 누군가와 함께 넘어가는 삶/ 언젠가는 혼자가 아닌 함께 이겨내길/ 혼자 넘어오던 길을 함께 넘어보는 것/ 세월 흐름을 간직하고 있는 어떤 것, 꿈이 있는 것/ 나의 아리랑 고개는 삶의 전환점 새로운 출발이다/ 슬픔을 잊어버리는 고개. 희망을 넘어가는 고개/ 우리의 역사를 담은 아픈 고개와 더불어 이제는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고개"

장성 갈재. 장성군 제공

장성 갈재. 장성군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