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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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망향의 노래
  • 입력 : 2019. 02.06(수) 14:48
  • 편집에디터

유치의 밤거리/ 아아 ~ 유치의 밤이여/ 보림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저 아주머니여/ 그 모습 아름답구나/ 아 ~ 유치의 밤거리여/ 사라져가는구나/

'유치의 밤거리', 언제 나온 노래일까? 어디서 많이 듣던 선율이다. 그렇다. 가요 '신라의 달밤'에 가사를 바꾸어 부른 일명 '노가바(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20년 전 장흥군 유치면 수몰지구 주민들이 지어서 부른 노래다. 이들에게 유치의 밤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댐 축조로 인해 수몰되어 사라져 가는 밤거리를 그리워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뿐일까? 댐을 막는 것이 부당하다고 호소하고 투쟁하기도 했다. 역부족이었다. 대의를 위해 소의를 희생했다고나 할까. 수몰되기 전 유치 골짜기를 여행해본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던가. 유치 계곡을 오르내리며 돌담 사이사이 고목들이 즐비하던 마을들, 그곳을 돌아 나오던 때가 그립다. 유양님(당시 65세)을 비롯한 늑룡 마을 주민들이 '한 많은 대동강'이란 곡에 가사를 바꿔 부른 노래가 심금을 울린다.

탐진강 유치댐을 누가 막으라 했드냐/고향산천 뒤에두고/어디로 가란 말이냐/유치댐이 바보더냐/수몰민이 바보더냐/아아~유치댐 막지마라/ 살기좋은 내고향아/

탐진강 유치댐을/누가 허락하였더냐/문전옥답 수몰되어/타향으로 가란말이냐/탐진댐이 바보더냐/유치민이 바보더냐/아아~유치댐 막지마라/살기좋은 내고향아

유치댐 반대를 위한 데모에 앞장서거나 뒤따른 사람들이 많다. 물론 적정한 보상을 위해 실력행사를 강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문전옥답 수몰되어 타향으로 가"는 것을 바보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노래했다. 갈두마을 문봉열(당시 72세)은 '가거라 삼팔선'이라는 노래에 가사를 바꿔 불렀다. 당시 전남도지사였던 허경만을 직접 겨냥하여 힐난하기도 했다. 마을을 강탈했던 논리를 '공유법'이라는 법률에 담았던 모양이다.

아아 ~ 산이 낮어 못오시나요~/ 아아 ~ 물이 낮어 못오시나요~/ 다같은 고향땅을 오고가건만/ 탐진댐이 왠말이요 '공유법'이 웬말이어요/ 허경만도지사는 잠자고 있구나/ 도지사는 이 자리에 나와서 해명을 하소/

"다 같은 고향 땅을 오고 가건만" 유치 주민들은 그 고향 땅을 오고갈 수 없게 되었으니 이 일을 집행하는 도지사에게 항의한 노래다. 그러나 보상금을 더 타내기 위한 조치가 아님을 강조하곤 했다. 실제로 당시 내가 만난 유치 사람들은 수몰에 대해 체념하고 있는 듯했다. '대의를 위해 국가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수용하는 자세였다고나 할까. 사실은 한국전쟁을 횡단하는 시대적 굴절들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 사람들은 노래를 참 잘 만들었던 것 같다. 자신들의 심정을 유행가는 물론 전통 민요의 선율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기 때문이다. 단산마을의 한영임(당시 75세, 일명 시국댁)과 돈지마을 임매자(당시 68세)씨가 지어 부른 '한나이라면'에 이런 풍경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산간지역으로 시집와서 고생한 이야기이면서 수몰되는 고향에 대한 안타까움이 배어난다.

너이라면 넓고 넓은 강남천지 갈데가 없어/ 깊고 깊은 산중으로 내가 가련만 내가 가련만/ 다섯이라면 다정한 나의 부모 영 이별하고/ 어찌하여 나의 고향 떠나가려나 떠나가려나/ 다서이라면 다정한 식구를 다려다놓고 다려다 놓고/ 어린아이 밥탈라니 속이 상하네 속이 상하네/ 여섯이라면 육태산 너룬시대 어느 곳으로 어느 곳으로/ 이시국을 따라 어찌 가리야 어찌 가리야/ 일곱이라면 일고 같은 청노고향 다버리고요 다버리고요 /산도 슬고 물도 선 나여기 왔네 나여기 왔네/

이 노래는 전형적인 숫자풀이 노래다. 이 민요를 구연해주셨던 한영임씨는 원래 열 번째까지 이어지는 노래에 열한 번째 가사를 넣어 "단산에 우리 각씨들이 지은 노래요/ 지은 노래요"라고 즉흥적인 가사를 붙이기도 했다. 혼인을 통해서 또는 이주를 통해서 "산도 설고 물도 선" 이곳 유치로 오게 된 이들이다. 이들에게 더욱 각별한 것은 한국전쟁을 통해 잃어버렸던 고향을 어렵게 찾았던 경험이다. 단산 마을 한영임씨가 불러준 '동냥치 노래(각설이 타령을 말함)'는 "육자 한 장을 들고 보니/ 육이오 사변이 났으니/ 보따리를 짊어지고/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시장판이로 들어가자/ 어얼씨구씨구 들어간다" 등의 노래가 이를 말해준다. 뿐만이 아니다. 늑룡 마을 위유신(당시 60세)이 불러준 "양양한 앞길"을 비롯해 마을 부녀들이 합창해 준 "역적의 반란군을 찾으러 가자", "용감한 빨치산이" 등 유치 계곡과 빨치산에 관련된 경험들도 녹아들어 있다. 한국전쟁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고향을 어렵게 찾은 그들인데 다시 고향을 빼앗긴다니, 그들의 외침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한국전쟁과 수몰, 유치 사람들이 겪은 두 번의 굴절

전북대 김익두 교수는 토마스의 '거울 이미지(mirror image)'와 빅터 터너의 '거울론'을 들어 민요를 설명한 바 있다. "문화의 거울은 이처럼 일차적으로는 반성적 기능을,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창조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임을 우리는 이 두 학자들의 견해를 통해서 생각할 수 있다. 문화를 삶의 거울로 본다면 그 거울의 기능이 반성적이든 창조적이든, 그 반영의 크기, 질, 굴곡을 세심하게 배려해서 살펴야 한다. 민요도 문화의 일부이기에 그 민요를 창조하고 향수하는 인간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민요라는 거울을 통해 그것들을 창조하고 향수한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한국전쟁은 유치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현대사의 비극이었다. 유치 산하의 수려한 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좌익과 우익으로부터 유린당하는 뼈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보듬어 주는" 조건을 노래하기도 하고,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온 사람들을 따라 산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망설이는 민중일 뿐이었다. 베틀노래를 통해 생사를 갈라놓은 갈림길을 노래하기도 한다. 이들에게 돌아온 희망이라는 "신랑"은 "시살틀에 연거 갖고 들끗에 실려"온 절망으로 변해버렸다. 평생을 제 몸처럼 붙들고 살았던 베틀을 비유해 그 위에 실린 시신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그려냈던 것이다. 그래서 수몰의 아픔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하마트라면 끊어질 것" 같던 삶을 회복하고 살아왔다 싶었는데, 수몰이라는 또 한 번의 절망을 맞이했던 상실감 말이다.

마을 스와라지 운동, 고향을 회복할 수 있을까?

장흥댐 수몰지역 사람들이 불러준 노래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얘기해준다. 유치 계곡의 19개 마을이 물에 잠겼다. 망향이라는 언설은 너무 느슨하다. 고향을 넘어선 뿌리에 대한 상실감이 언설의 묘사를 넘어선다. 어찌 보면 우리 또한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민족의 대명절 설 연휴에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1950년대 말까지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농촌, 전체 취업 60% 이상이 농업에 종사했다. 해마다 농어촌 인구가 급감했다. 통계청 농림어업조사에 의하면 2017년 현재 농가 인구는 5.3%에 불과하다. 불과 반세기 만에 65%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다는 뜻이다. 단순하게 말해 여기서의 농어촌은 고향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고향은 명절 때마다 한두 번씩 들르는 곳에 불과한 곳일까. 역귀성이나 아예 고향을 찾지 않는 사람들도 늘어간다. 수몰되지는 않았지만 고향이 이미 마음으로부터 떠나버린 것은 아닐까? 그래서다. 고향의 상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노스탤지어의 상실이다. 유치 사람들은 그래도 사라진 마을을 그리워하며 애향제를 지낸다. 하지만 현대인들의 마음으로부터 시나브로 떠나고 있는 고향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도시재생이니 천문학적인 예타면제니 말들이 많다.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물량공세와 돈 있는 자들의 기획부동산이 아니라 고향 회복하기 운동 아닐까? 예컨대 간디가 제안했던 물레질 하는 스와라지, 그 오래된 미래 말이다. 마을 스와라지(Village Swaraj, 신성한 말, 자기 통치, 자기 억제를 뜻함)의 기본 원칙들이 있다. 도덕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간과하는 경제학은 옳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평등하고 공정한 분배를 추구하고 여분의 부는 신탁한다. 자급자족의 종교적 평등, 특히 불복종과 비협력 등의 비폭력이 강조된다. 이즈음 목포를 중심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내셔널 트러스트 논의도 이 범주에서 해석 가능할 것이다. 용비어천가에서 이미 노래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꽃 좋고 열매 많다. 샘이 깊은 물이라야 가뭄에 그치지 아니하여 내(川)가 되어 바다에 이른다. 마을 곧 고향이, 내가 서있는 심신의 뿌리다. 판차야트 라지(마을정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중심 되는 고향 회복 투쟁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마음의 뿌리마저 수몰되기 전에 말이다.

남도인문학 팁

장흥댐 건설, 유치면 19개 마을의 수몰과 이산

2000년 즈음 나는 목포대 나승만 교수 보조자로 장흥 유치댐 수몰지구 민요 조사를 했다. 우리가 채록한 민요만도 100여곡을 상회한다. 노동요에서부터 유희요까지 방대한 영역의 노래들이 수집되었다. 지금은 잊혀진 마을 이름들 그리고 사람 이름들을 여기 남겨두고자 한다. 남자들로는 공수평 마을의 장진곤(당시 64세), 오복마을의 문재일(당시 77세), 당산마을의 임재근(당시 79세), 노루목마을 이정현, 건동 마을 문태진(당시 73세)등이다. 여성으로는 돈지마을 김순애(당시 75세), 단산마을 한영임(당시 75세, 일명 시국댁)외 김순금(당시 65세), 고영임(당시 68세), 임덕순(당시 70세), 박행임(당시 65세) 이귀순(당시 71세), 돈지마을 임매자(당시 68세), 늑룡마을 유양님(당시 65세) 등을 들 수 있겠다. 민요 외의 제보자들은 기회가 생기면 거론하기로 한다. 20세를 더하면 지금의 나이니, 그들의 노래처럼 생사의 갈림길을 몇 번씩 반복하셨을 것이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 지금은 물속으로 사라진 그 아름다웠던 마을 풍경들이 주마등을 이룬다. 이들의 망향이 내게 전하는 메시지가 크다. 국가 정책으로 고향 회복에 대한 구상들을 해가야겠다. 유치 사람들, 돌아가신 분들에게는 옷깃 여며 영면을, 살아계신 분들에게는 건강과 마음의 평화가 함께 하기를 빈다.

1996년부터 10여 년간 장흥댐 공사가 진행되었다. 19개의 마을이 물속에 잠겼다. 사진은 1995년 장흥군 유치면 송정리 댐 반대운동 . 마동욱 사진작가 제공

1996년부터 10여 년간 장흥댐 공사가 진행되었다. 19개의 마을이 물속에 잠겼다. 사진은 1995년 장흥군 유치면 송정리 댐 반대운동 . 마동욱 사진작가 제공

1996년부터 10여 년간 장흥댐 공사가 진행되었다. 19개의 마을이 물속에 잠겼다. 사진은 1997년 유치면소재지 모습 . 마동욱 사진작가 제공

1996년부터 10여 년간 장흥댐 공사가 진행되었다. 19개의 마을이 물속에 잠겼다. 사진은 2001년 유치면 덕산리 모습 . 마동욱 사진작가 제공

1996년부터 10여 년간 장흥댐 공사가 진행되었다. 19개의 마을이 물속에 잠겼다. 사진은 늑룡마을 모습 . 마동욱 사진작가 제공

1996년부터 10여 년간 장흥댐 공사가 진행되었다. 19개의 마을이 물속에 잠겼다. 사진은 단산마을 모습 . 마동욱 사진작가 제공

1996년부터 10여 년간 장흥댐 공사가 진행되었다. 19개의 마을이 물속에 잠겼다. 사진은 유치면 일대 모습 . 마동욱 사진작가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