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서도의 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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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여서도의 당제
  • 입력 : 2019. 02.20(수) 14:10
  • 편집에디터

전신탑에서 바라본 윗당과 아랫당

여서도의 당제

윗당, 아랫당, 갯당의 풍경이 고즈넉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듯, 끝 간 데 없는 하늘만 청청하다. 누가 밀어냈나. 먼 바다 칼바람이 내안(內岸)의 풍경들을 자꾸 밀어 올린 탓이리라. 곧 영등 바람이 딸 혹은 며느리를 데리고 왕림할 것이다. 사람들은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전해왔다. 아마도 수백 년 혹은 반 천년은 되었을 성싶다. 정씨할머니가 밭을 매다 절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풍경(風磬)을 줍게 되었다. 경이롭게 생각하고 그 종(鐘)을 고이 모시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도 기이하게 생각했다. 이내 풍경을 모실 당집을 짓고 마을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사후에는 정씨할머니까지 신격으로 추대하였다. 아랫당의 효시(嚆矢)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온다. 어느 시기, 어장(漁場)이 잘 안 되는 때가 있었다. 밖에서 한 스님이 오셨다. '당할머니가 배가 고파 당집을 나가버렸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갯가로 나가 당할머니를 모셔오는 의례를 했다. 지금의 아랫당에 다시 모시게 되었다. 어느 게 먼저인지 중요하지 않다. 종과 정씨할머니가 당제의 효시라는 점이 초점이다. 현재 그 종은 사라지고 없다. 왜 이런 이야기가 전해졌을까? 사찰이 없던 마을, 혹은 어떤 시기 사찰이 있던 섬, 아랫당의 종교적 기능을 설명하는 방식일 수 있다. 흉어(凶漁)의 문제를 신격의 문제로 투사시키는 문화적 장치를 보면 그 행간이 보인다.

완도군 청산면 여서도의 당제

해마다 정초부터 대보름 어간에는 각 마을마다 마을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대개 내륙지역에서는 당산제라는 이름을 선호하고, 해안지역이나 섬 지역에서는 당제라는 이름을 선호한다. 지역마다 수십 가지의 다른 이름들이 있다. 먼 바다의 섬, 가까운 바다의 섬, 해안을 접한 마을들의 의례가 작게는 다르고 크게는 같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시기나 특성을 들어 문화권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곳 여서도의 당제는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남해안 먼 바다 섬의 대표적인 당제다. 규모나 시기는 변했지만 다른 지역의 당제들이 사라져버린 상황을 감안한다면, 전통을 면면히 이어오는 곳이다. 나는 2013년 정월 대보름에 행해진 여서도 당제를 기록하여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보고했다. 오늘 그 자료를 토대로 정월 대보름 이야기를 풀어본다. 여서도는 30여 년 전만 해도 400여 호 넘는 세대가 살았다. '헛가사리(작은방 살이라는 뜻)'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을 만큼 인구가 많았다. 이때만 해도 당제를 지내는 것 자체가 마을의 큰 경사였다.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지는 매굿(마당밟이)은 잡색들까지 포함한 구성진 굿판이었다. 상당한 규모의 의례가 행해졌다. 매년 당제를 지내는 날이면, 배를 소유하고 있는 선주들의 만선기 경주가 벌어진다. 당주(堂主)가 한지를 깃대에 묶어주면 뱃전까지 달리기 우열을 겨루는 경주다. 가장 먼저 뱃전에 깃발을 꼽는 선주가 그 해 풍어를 누린다는 속설이 있다.

윗당, 아랫당, 갯당은 하늘, 땅, 바다의 가이아(Gaea)

여서도의 당은 윗당, 아랫당, 갯당으로 나뉜다. 동, 서, 중앙에 있는 마을 샘도 의례 공간이다. 섬 지역 샘의 기능은 그 비중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의례공간의 신격들은 가족관계 혹은 서열관계로 구성된다. 윗당산의 당할아버지, 아랫당의 당할머니, 갯당의 고석바위가 그것이다. 마을의 동, 서, 중앙에 있는 샘에는 반드시 고목이 우거져 있다. 숲의 기능이 지하수를 포함한 물의 보존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다. 윗당산과 아랫당산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윗당과 아랫당에 당샘을 두어 제수준비와 목욕재계에 활용했다. 가장 아래쪽 바닷가에는 고석바위라는 갯당이 있다. 정확하진 않지만 4~50년 전까지만 해도 아랫당에 돌담이 없었다. 마을 모씨가 제사를 지내면서 당집과 당 숲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당산에 무엇인가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돌담을 쌓게 되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바람막이 할 의지가 필요하다는 게 생각의 골자였다. 하지만 돌담을 쌓은 후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혹시 돌담을 쌓아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여 마을사람들의 구설에 오르게 되었다. 문제가 되자 돌담을 헐어냈다. 당제를 다시 지내거나 당산 경관을 바꾸는 일을 마을의 대소사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사례다. 몸이 아프면 아픈 곳을 치료하고 추우면 갖가지 옷을 만들어 입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특히 물때와 바람과 파도에 생명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섬지역에서는 경관과의 일체감이 높다. 윗당과 아랫당, 그리고 갯당이 사실은 나누어져 있지 않은 가이아(Gaea)의 세계다.

당제를 자시(子時)에 지내는 까닭

여서도의 당제는 일 년에 두 번 지낸다. 중심이 되는 당제는 정월 대보름 당제다. 음력 7월 1일도 당제 날이다. 여서도의 주업과 관련되어 있다. 멸치잡이, 갈치잡이 어장을 위한 의례다. 본당제는 본래 섣달 그믐날 했다. 약 20여 년 전 마을 회의를 거쳐 정월 대보름으로 옮겼다. 우리나라 당제들이 전반적으로 축소되거나 폐지되었다는 점에서 이유를 찾아봐야 할 듯싶다. 정월달에 초상이 나거나 출산하는 집이 생기면 달을 넘겨 날짜를 따로 받는다. 이런 일들이 겹쳐 당제를 못 지내게 되는 해에는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다. 2013년 정월 대보름의 경우에는 14일 오후 8시경 당산에 올라가 15일 새벽 1시가 되어 제사를 시작했다. 이윽고 아랫당으로 내려와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동틀 무렵이면 '고석바우'라 호명하는 갯당에서 당제를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바닷가에 나가 헌식을 하여 당제를 마친다. 해가 떠오르면 마을의 샘과 회관에서부터 시작하여 가가호호 마당밟이를 한다. 정월 초하룻날 시행하던 시절에는 대개 대보름까지 마당밟이 굿이 진행되었다. 의례를 자시(子時)에 시작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시작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루를 사람의 평생이라 생각하면, 자시는 마치 출생과도 같은 시간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의 전통적인 관념이자 시간의 체계이기도 하다. 하늘의 수와 땅의 수는 시간의 수이기도 하고 공간의 수이기도 하다. 달이 이지러지고 만개하는 시간들, 아침에 닭이 울어 해가 뜨고 노을빛의 손짓에 해가 지는 묘사들, 하늘의 수와 땅의 수를 교직시켜 60갑자를 만들어 내는 일련의 체계들이 모두 이런 관념과 연관되어 있다. 여서도의 당제를 자시에 지내는 까닭은 일 년 혹은 여름 당제까지의 반년이라는 시간 분할의 기점의 의미다. 이 시작이 마치 한 사람의 출생과도 같으니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었겠는가.

당숲을 인격체로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당숲 안쪽으로 고인돌 크기의 넙지락(너럭)바위가 있다. 주위에 큰 자연석들이 늘어서 있다. 사방으로 팽나무와 보리똥나무(보리수나무), 비자나무, 동백나무 군락이다. 큰산에서 내려온 물줄기는 당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갈라져 마을로 흘러내려온다. 그 수맥에 샘들이 있다. 아랫당산은 돌담으로 쌓여 있다. 주변으로 팽나무, 비나자무, 동백나무 군락들이 늘어서 있다. 동쪽으로 난 솟을대문은 스레트 지붕이다. 당집은 기와모양 전통한옥 스타일의 슬라브다. 사방 돌담 밖으로도 후박나무, 팽나무와 동백나무 등 사철나무 군락이 이어진다. 아랫당집 안에는 항아리가 두 개 있다. 해마다 벼와 보리를 갈아 넣는다. 정월 대보름 당제에서는 벼를, 7월 초하루 당제에서는 보리를 넣는다. 항아리를 두 개 존치하는 것도 당신격과 관련되어 있다.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해 아는 사람은 없다. 당산을 이루는 모든 것들을 신체(神體)라 한다. 나무와 숲과 돌과 바위들이 모두 신의 몸이라는 뜻이다. 혹자들은 애니미즘(animism)이라 풀이한다.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영적, 생명적인 것이 있다는 원시 신앙 관념이다. 어떤 경우가 있어도 이 신체들은 보호한다. 단순한 보호를 넘어 보전(保全)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나는 이를 영구적인 보전공간과 일시적인 보호공간으로 나누어 설명해왔다.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신격화하는 방식과 기피하는 방식이다. 신격화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당숲과 당산, 우실 등이다. 기피하는 방식의 대표적인 사례는 초분골, 풍장터, 도깨비 출몰지 등이다. 영험담에 이런 원리들이 들어있다. 당숲의 나뭇가지를 꺾었더니 급사(急死)했다던가 사고를 당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전국 각처에 전해져 온다. 문화권별로 다르긴 하지만 이런 스토리텔링을 통해 숲과 샘과 정주공간들을 보호해왔다. 나는 이를 전이지대(轉移地帶)의 맥락으로 정리해두었다. 다양한 사례들이 있으니 차차 풀어 소개할 예정이다. 특히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식수와 지하수를 보존하는 일은 스스로의 생명을 지키는 일과 같다. 샘은 숲의 보전과 연관되며 숲은 신성과 관련된다. 당숲을 인격체로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 정초 대보름에서 2월 초하루에 집중되어 있는 전국 마을의 당제를 톺아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도인문학팁

여서도 당제의 상차림

당제 진행에 특별한 도구는 일명 '노구지(놋쇠) 밥솥'이다. 나무로 만든 절구통을 지고 올라가 손수 쌀을 찌어 밥을 하고 떡을 한다. 쌀이 있는 독에서 딱 한 번에 걸쳐 쌀을 떠낸다. 그래도 항상 노구지 밥솥이 그득하게 밥이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떡은 백설기 시루떡이다. 제수음식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맷밥(제사밥)이다. 노구지 밥솥에 맷밥이 소복히 올라오면 그 해 풍요와 풍어가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제수에 육고기는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예부터 전해오는 전통이다. 본래 물고기도 사용하지 않았다. 30여 년 전부터 물고기를 놓게 되었다. 근래 들어서는 선착장에서 헌식을 할 때 돼지머리를 사용하기도 했다. 육고기나 물고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수음식 자체가 매우 간단했다. 노구지 밥솥에서 지은 맷밥과, 시루에 찐 밥, 돌갓(여서도의 도라지), 콩나물, 고사리 세 가지를 사용한다. 물고기를 사용하면서부터는 맷밥, 반찬 3종류, 어류 3종류, 과일 3종류를 사용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육고기는 금지하고 있다. 윗당에는 본상에 5그릇를 차린다. 본 신체인 넙지락(너럭) 바위에서 좌편으로 떨어져 있는 곳에 차리는 1상은 산신 대상이다. 문지기 신격에게 좌, 우 각각 1상을 합하여 7상을 차린다. 윗당이나 아랫당 모두 맷밥의 개수는 같다. 하지만 근래에 변화되어 아랫당의 본상을 진설할 때 맷밥을 한 그릇만 놓기도 한다. 문지기 맷밥을 차리는 것은 동일하다. 2013년의 경우, 아랫당은 네 상을 차렸다. 당집 안으로 1상, 당집 바로 문밖에 1상, 솟을대문 양쪽으로 문지기상 각각 1상을 차렸다. 사당 내의 할머니 신격은 독상을 받고 사당 밖 문지기는 두 상을 받게 되는 셈이다.

윗당 전경

윗당 당숲(동백나무와 팽나무 등)

아랫당집 전경

아랫당집 내부

아랫당집 원경

서쪽샘

동쪽샘

고석바위(갯당)

아랫당 당집안 진설

아랫당 당집밖 진설

유왕거래(용왕헌식)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