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과 한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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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왕산과 한산촌
  • 입력 : 2019. 03.06(수) 13:16
  • 편집에디터

갈마설화 조형물을 세워놓은 삼향읍 왕산 포구

나주 삼향포에 몸을 던진 사람들

임진왜란, 충민공 양산숙 일가의 살신성인 얘기가 전해온다. 양산숙은 양응정의 아들이다.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 등과 함께 진주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이어진 정유재란, 양산룡은 김천일을 도와 의병에 가담하였다. 역부족이었다. 가족들을 피신시키고자 나주 삼향포(지금의 무안 삼향읍)에 이르렀다. 뱃길로 막 떠나려 하는데 왜적들이 나타났다. 그와 어머니 박씨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 모두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1635년(인조 13) 나라에서 제각을 지어 찬양했다. 광주 광산구 박효동 양씨삼강문이 그것이다. 양산숙, 양산룡, 양산수, 아들 형제의 어머니인 죽산 박씨, 누이인 김광운의 처 양씨, 양산숙의 처 광산이씨 등을 모셨다. 삼향포에서 왜적들을 만나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까. 서남해 어느 섬에 숨어들었다가 항왜(抗倭) 활동을 재개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삼향포 인근 사람들은 양씨 일가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군산봉수 아래,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국

이들이 몸을 던졌다는 삼향포는 지금의 전남도청 인근이다. 조선시대 임성, 극포, 군산봉수(중등포)를 합하여 나주목 삼향면으로 삼았다. 영산강 안쪽으로는 극포가 있고, 밖으로는 임성과 군산봉수가 있다. 영산포에서 남포, 용포, 극포에 이르는 내안(內岸)의 물길은 사실상의 바다다. 나라에서 주관하던 삼해신사(三海神祠, 조선의 3개 바다에 제사를 지내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남포(지금의 영암)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군산 봉수는 서남해 섬으로부터 연결되는 중요한 간봉(間烽) 중 하나다. 남으로는 유달산 봉수, 북으로는 고림산 봉수로 이어진다. 임란 때 군산봉수에서 강강술래를 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이 봉수를 중심으로 삼향포의 외안(外岸)을 형성하는 마을을 왕산(旺山)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평산, 왕산, 금동, 마갈, 마동, 동뫼, 덕산 등 7개 마을을 합한 이름이다. 압해도 건너편 바닷가에 인접한 마을이 마갈(馬渴)이다. 봉수산 남쪽으로 마봉산(馬蜂山)을 주산으로 삼고 동쪽으로는 복룡마을로 이어지는 마갈 잔등이 있다. 지산마을에는 '질마제'가 있고 인근 몽탄에는 '마산'이 있다. 모두 말(馬)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풍수쟁이들은 이 지역을 갈마음수(渴馬陰水)형국이라 한다.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뜻이라나. 왜 이런 전설과 지명들이 생겨났을까?

더 이상 달리지 못한 말(馬)의 두 가지 함의

마봉산과 마주보는 곳 호랑이바위와 얽힌 전설이 있다. 삼향읍 주산 국사봉에 일곱 필의 말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말 한 마리가 이곳을 지나다가 호랑이바위를 보고 깜짝 놀라 서해안으로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바다가 가로막혀 가지 못하고 그대로 돌말(石馬)이 되어버렸다. 비운의 이야기다. 말과 호랑이는 각각 무엇을 비유하거나 상징하는 것일까? 글쎄다. 비틀고 꽈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설화임을 생각해보면 필시 뜻 깊은 사연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다. 이 설화를 듣고 삼향포에서 몸을 던졌던 양씨 일가를 떠올리는 것은 너무 억지일까? 왜적들만 만나지 않았어도 인근 섬으로 몸을 피했다가 척왜(斥倭)의 선봉에 서게 되었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더 이상 바다까지 달리지 못해 비운을 맞이한 누군가가 있었을 것임은 추정 가능하다. 사람들은 그 갈급한 처지에 공감했을 것이고, 정사(正史)에서 비껴선 방식으로 그들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비슷한 바윗돌을 호랑이와 말에 비유하여 전설을 만들어내고 마을이름이나 산과 언덕의 이름들도 관련하여 지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봉수산 왕산(旺山)의 지명들을 이렇게나 많이 목마른 말(馬)에 이입했겠는가. 수백 년에 걸쳐 이 지역 사람들이 투사해온 이야기들은 사실 그 이루지 못함에 대한 애석함보다는 다시 이뤄야 할 소망에 무게가 실렸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중등포 한 자락을 감싸고 들어선 한산촌 언님들이 떠오른다. 임진왜란과 양씨일가의 이야기가, 더 이상 달리지 못한 말(馬)에 비유된다면, 한산촌 언님(카톨릭 수녀에 해당하는 개념)들은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구원에 비유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산촌, 목마른 말들을 위한 보금자리

여성숙 원장이 왕산에 보금자리를 틀고 한산촌을 열었다. 이곳 지명전설과 비유해 말하자면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폐결핵환자들을 위해 한 몸을 던졌다고나 할까? 당시 한센병과 더불어 최고의 질병이라던 결핵을 퇴치하는 것은, 목마른 말에게 물을 주어 다시 살리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1965년 8월 15일 왕산의 평산 마을에 자리를 잡고, 한번밖에 못 사는 인생이라는 뜻에서 '한산'이라 이름 지었다. 이 지역이 왕산, 지산, 덕산 등 '산'자 지명이 많아, 그 이름들과 섞이고 싶었다고도 했다. 밝히지는 않았지만 혹시 선교사들과 여원장이 함께 생활하던 함경남도 원산 명사십리 바닷가의 송림(松林)이나 해당화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원산 명사십리를 이루고 있는 약 6Km의 모래뚝을 '갈마반도(葛麻半島)'라고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북한 땅, 이곳 왕산의 목마른 말 형국과는 다른 한자이긴 하지만, 여성숙 일행이 소나무 우거진 바닷가와 왕산의 지명을 차용해 '한산'이라 이름 지었던 까닭을 음미해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백용기가 편집한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25주년 자료(2005)"에 한산촌의 의미를 잘 설명해두었다. 결핵을 치료하는 방법을 배우고 요양하는 것을 넘어 '한 삶'을 배우게 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한산촌'의 의미에 대한 함축적인 설명이다. 사람들이 말했다. 살다가 지치면 이곳에 와서 '큰 숨'을 한 번씩 쉬고 간다고. 이 고백은 무엇을 말할까? 환우들마다 이곳을 '마음의 고향', '뜻의 고향'이라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몸의 질병을 넘어 영혼의 치유까지 감당해냈던 곳이라는 뜻이다. 이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진달래 지천이던 한산촌을 거쳐 간 사람들

함석헌, 안병무, 황석영, 김지하, 홍성담, 윤한봉, 김남주, 윤영규 등,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들 아닌가? 이분들이 왜 한산촌을 거쳐갔을까? 이 중에는 결핵환자로 왔던 이들도 있지만 서슬 퍼런 시국의 피난처로 삼았던 이들도 적지 않다. 봉수산 서편 계곡은 중증환자를 치료하는 곳이라 인적조차 드물다. 여기 숨어들면 쥐도 새도 모를 만하다. 입소자들도 이들이 환자인줄만 알았다지 않는가. 조현 종교전문기자가 인터뷰한 내용들을 참고해본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던 홍성담 화백이 추억하는 한산촌은 "내 무릎에 피를 토하고 절명한 젊은이만도 두 명, 봄이면 붉은 피처럼 진달래가 지천에 핀 한산촌은 불쌍한 환자들이 스러져가는 곳, 여선생의 헌신과 아름다운 자연으로 지상 낙원처럼 회상되는 곳"이다. 여성숙은 "너희가 살아나면 무엇을 하고 살 것이냐, 제 욕심만 채우려 사람들을 비참하게 내모는 결핵균이 될 것이냐, 세상을 살리는 이가 될 것이냐"며 심신을 부활하는 삶을 주문했다. 이 말씀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었던 것일까. 이들이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모순을 물리치고 완치된 사람처럼 온몸으로 헌신하였음이 결코 우연은 아니다. 여성숙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행한 행적이 놀랍다. 비단 이들을 한산촌으로 불러들인 것이 질병뿐이겠는가. 소용돌이 같은 시대를 한 몸으로 앓았던 시대병, 심신이 두 동강이 난 분단모순병, 강제와 억압이 횡횡하던 시국병 등이야말로 결핵균보다 더 무서운 질병이지 않았을까. 상고하건대 더불어 시대를 몸으로 앓았던 이들이 이곳을 마음의 고향으로 생각했던 이유일 것이다. 다시 진달래 만개하는 봄이 왔다. 목마른 말들이 물을 찾는 형국이라던 봉수산 계곡을 마치 들불처럼 진달래가 뒤덮을 것이다. 붉은 잎들은 홍성담의 무릎에서 절명했던 청년들의 핏자국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가로막혀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절명한 서남해 민중들의 핏자국일지도 모른다. 그 기억들은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절명한 석마의 이야기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여성숙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다시 달리게 해주었다. 목마른 말들에게 청정한 샘물을 제공해주었다. 그녀의 주문이 귓가를 울린다. 이 사회의 몸뚱이를 갉아먹는 결핵균이 될 것인가, 세상을 혁신할 사람이 될 것인가. 번져오를 진달래 계곡에 앉아 내 스스로의 갱신을 돌아보는 계절이다.

남도인문학팁

황해도에서 남도 한산촌까지,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와 여성숙 원장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는 1980년 5월 1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여성 수도공동체로 탄생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를 중심으로 사회봉사가 병행되는 수도공동체를 구상하게 된 것. 실천적 모델은 독일 개신교 기관사회봉사 기구의 하나인 여성봉사수도원 '디아코니아자매회'다. 남성봉사기관인 디아콘형제회, 병원, 장애시설기관 등이 기관사회봉사에 속한다. 한국도 설립 2년 후인 1982년 99번째로 세계 디아코니아자매회에 가입한다. 여성숙의 힘이 크다. 여원장은 황해도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도사의 힘을 빌려, 아버지 몰래 평양 소학교에 원서를 냈다. 우여곡절 끝에 평양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이후 원산에 있는 마르다 윌슨 신학원에 진학하였다. 어려운 시절을 겪으며 다시 일본의 릿교(立敎)대학과 군마겐(群馬縣) 교아이여학교(共愛女學校)를 거쳤다. 스물아홉 늦깎이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고려대 의대 전신)에 들어가 1950년 졸업했다. 한국전쟁 후 전주예수병원과 광주기독교병원 결핵과장을 거쳤고 1961년 목포의 한 선교사 집에서 목포의원을 개원한다. 1964년 12월 사회적으로 냉대 받아 갈 곳 없는 결핵환자들을 위해 무안 왕산에 임야 3만평을 매입하여 "목포의원 부설 결핵요양소 한산촌"이란 이름의 요양소를 개설한다. 1971년에는 환자들을 위한 치료센터를 완공한다. 1980년 5월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가 이곳 한산촌을 모원(母院)으로 정하고 운영과 간호를 맡아 돌보기 시작했다. 한산촌은 만성 난치성 결핵환자들을 섬기며 더불어 사는 공동체다. 가족이 없거나 의지할 곳 없는 만성결핵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치료, 신앙생활 지도, 상담, 호스피스(임종 중비)간호를 한다. 앞으로 백년쯤 지나면 한산촌에 몸을 던진 언님들의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질지 모른다. 그때는 호랑이에게 놀라 돌이 되어버린 석마(石馬) 설화가 아니라, 천국으로 날아 올라간 비마(飛馬) 얘기로 말이다. 여성숙 원장은 2019년 현재 102세(1919년 11월생)다. 더 오래 장수하시기를 빈다.

갈마설화 조형물을 세워놓은 삼향읍 왕산 포구

갈마설화 조형물을 세워놓은 삼향읍 왕산 포구

무안군 삼향읍 왕산리 한산촌에 들어선 디아코니아노인요양원 전경사진. 디아코니아노인요양원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