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구림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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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영암 구림마을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 / 전라남도 대변인실||
  • 입력 : 2019. 03.27(수) 13:21
  • 편집에디터

회사정.

하미술관.

하미술관.

육우당-한석봉글씨.

죽림정(연주현씨 종가).

왕인 초상.

왕인동상-왕인유적지.

약무호남시무국가 비.

상대포.

마을길.

마을길.

국사암-도선설화.

도기박물관-조성남전시.

도기박물관.

3.1만세 기념탑.

봄과 '밀당'을 하던 꽃샘추위가 물러났다. 이내 완연한 봄이다. 움츠러들었던 봄꽃들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다사로운 봄의 기운이 금세 골목까지 파고들었다. 매화, 산수유, 동백꽃에 이어 벚꽃이 피고 있다. 까칠하던 가로수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흙담 아래에선 수선화가 노란 미소를 짓고 있다. 봄까치, 광대나물, 민들레도 제 세상을 만났다. 황량하던 텃밭도 초록의 옷으로 바꿔 입고 있다. 고샅을 걷는 발걸음이 봄볕에 취해 하늘거린다.

국립공원 월출산이 품은 영암 구림(鳩林)마을이다. 2200년의 역사를 지닌 전통의 한옥마을이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고목과 청태 낀 기왓장의 정자, 돌담으로 둘러싸인 고택이 즐비하다. 400년 넘게 보존된 창녕 조씨 종택이 보인다. 죽정서원의 내력도 깊다. 호은정, 간죽정, 요월정, 쌍취정에서도 전통사회의 흔적이 묻어난다.

울창한 솔숲 사이에 있는 회사정(會社亭)이 아름답다. 남도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누정이다. 향약을 실천할 목적으로 조직된 구림대동계(鳩林大洞契)의 모임 장소였다. 구림대동계는 규약을 어기는 사람을 훈계하고, 어려움에 처한 주민을 돕는 모임이다. 3·1운동 때 마을사람들이 한데 모여 독립만세를 부른 곳이기도 하다. 구림마을 역사의 산증인이다.

마을에 한옥도 많다. 전체 주민의 3분의 1 남짓이 한옥에 살고 있다. 한옥보존 시범마을이다. 투박하게 쌓아올린 돌담도 다소곳하다. 돌담길을 따라 싸목싸목 거닐며 마을을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과거와 현재를 함께 만나는 시간여행이다.

큰 인물도 많이 난 구림마을이다. 백제 왕인박사가 첫손가락에 꼽힌다. 백제 근초고왕 때의 인물이다. 8살 때 월출산 주지봉 기슭의 문산재(文山齋)에 들어갔다. 문산재는 수많은 선비와 이름난 유학자를 배출한 학문의 전당이다. 왕인은 그곳에서 유학과 경전을 익혔다.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등 다섯 경서에 능통하다고 오경박사에 등용됐다.

왕인은 405년 일본 응신천황의 초청으로 상대포(上臺浦)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손에는 논어 10권과 천자문이 들려 있었다. 일본에서 태자의 스승이 돼 백제문화의 진수를 전파했다. 일본 아스카문화의 초석을 닦았다. 그의 나이 32살 때다.

왕인박사의 숨결을 유적지 내 왕인사당과 영월관에서 엿볼 수 있다. 월출산을 배경으로 박사의 동상도 서 있다. 왕인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도 군데군데 남아있다. 성천(聖泉)은 왕인이 마신 샘물이다. 박사가 책을 보관해두고 공부했다는 책굴(冊窟)도 있다. 왕인의 제자들이 모여 공부한 문산재도 있다. 훗날 제자들이 스승을 그리워하며 돌에 새긴 왕인의 모습도 석인상으로 만날 수 있다.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갈 때 배를 탄 상대포도 복원돼 있다. 상대포는 당시 중국, 일본과의 교역로였다. 오래 전 이뤄진 간척 탓에 지금은 옛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풍수지리의 시조' 도선국사(826~898)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825년 신라 헌강왕 때다. 빨래를 하던 도선의 어머니 최씨가 물에 떠내려 온 푸른 외 하나를 건져먹었는데, 태기를 느끼고 아이를 낳았다. 처녀의 몸이던 그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마을의 큰 바위 위에다 아이를 가져다 버렸다. 며칠 뒤에 가서 보니, 비둘기들이 날개로 덮어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도선이다. 설화 속의 바위가 하미술관 옆 국사암(國師巖)이다.

구림의 지명 유래와 엮이는 얘기다. 도선은 13살 때 월암사로 출가했다. 20살 때 월출산 수남사지에 도갑사를 창건했다.

고려 왕건의 책사였던 최지몽(907~987)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건으로부터 닭과 오리가 한 둥지에 있는 꿈 이야기를 듣고 '삼한 통일'로 해몽을 했다. 태조 왕건 때부터 성종 대까지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그를 배향하고 있는 국암사(國巖祠)가 국사암 바로 옆에 있다.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가 글쓰기와 떡 썰기 시합을 한 곳도 이 마을이다. 개성에서 태어난 한석봉이 스승인 영계 신희남을 따라 영암으로 내려왔다. 마을에 있는 죽림정사에 머물며 글씨를 익혔다. 어머니가 떡장사를 한 곳은 가까운 독천시장으로 전해진다. 마을에 있는 '육우당(六友堂)'의 현판을 한석봉이 썼다.

팽나무 고목 두 그루가 든든하게 지키고 선 죽림정(竹林亭)도 눈길을 끈다. 연주 현씨 사직공파의 종가다. 충무공 이순신이 현덕승(1564~1627)에게 보낸 편지가 나온 집이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계사년(1593년) 7월 16일 보낸 편지에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집앞에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비가 세워져 있는 이유다.

마을 뒤편에 구림도기 가마 터도 있다. 경사진 곳을 이용해 아래에서 굴을 파고 들어간 반지하식 단실가마다. 통일신라 때 황토로 그릇을 빚고 유약을 칠하는, 시유도기를 굽던 자리다. 1200년 세월이 지났지만 가마의 원형이 비교적 생생하다.

구림도기의 역사를 영암도기박물관에서 만난다. 구림도기는 녹갈색과 흑갈색의 유약을 입힌 첫 시유도기다. 가마 터에서 발굴된 청동기시대 옹관묘도 전시돼 있다. 박물관에 펼쳐놓은 전시도 볼만하다. 영암 출신 조성남 작가의 도자작품 전시다. 작가의 감성과 지역의 정서가 작품에서 묻어난다.

박물관 옆 하정웅미술관은 전시 준비로 잠시 문을 닫고 있다. 굳이 실내로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 앞마당에 설치된 갖가지 조형물과 나무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봄날, 사부작사부작 하늘거리기에 더 없이 좋은 고샅이다. 기억 저편에 남아있던 옛 추억을 하나씩 꺼내주는 것도 오지다. 팝콘처럼 톡톡 터뜨리며 꽃잔치를 준비하고 있는 벚꽃을 보며 벙글어진 꽃너울을 떠올리는 것도 황홀하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월출산 풍경도 신비롭다. 월출산의 기(氣)를 호흡한 덕분일까, 발걸음도 마냥 가볍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