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테로토피아의 섬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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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헤테로토피아의 섬에 서서
어느 곳에도 없는 섬, 유토피아(Utopia)의 세계
  • 입력 : 2019. 03.27(수) 14:58
  • 편집에디터
다도해.
산무도적(山無盜賊), 도불습유(道不拾遺), 산에는 도적이 없고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는 일조차 없다. 홍길동의 율도국(栗島國) 얘기다. 공자가 노나라에서 형조판서인 대사구(大司寇)로 있을 때 한 말이다. 공무원들이 정치를 잘 해서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법을 잘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도적은 누구인가? 대대로 권력을 승계 받아 이익을 갈취하는 탐관오리들이다. 종교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민중을 현혹하는 지도자들이다. 노력한 대가(代價)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능력을 대접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권력자가 혹여 떨어뜨린 부스러기들을 주우려 땅만 쳐다보고 다닌다. 만유의 공평을 논할 틈도 능력 발휘를 노래할 여유도 없다. 길동이 창안한 세계는 이런 혐오스런 현실을 벗어난 세상이었다. 도교의 이상향에 비견된다. 괴롭고 힘든 현실세계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자 정신적인 도피처다. 영국의 모어가 공상사회 소설을 통해 창안한 '유토피아'는 사실 어느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인 체제와 교육, 종교의 자유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가상의 나라다. 현실이 각박할수록 유토피아에 대한 욕망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허생전'에서는 '무인공도(無人空島)'로 그려진다.

낙원의 땅, 홍길동의 율도(栗島)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이 유명한 언설이 주는 함의가 깊다. 홍길동은 서자(庶子)라는 신분사회에 반동한다. 아무리 총명하고 능력이 있어도 임용되거나 채용되지 못하는 이른바 '흙수저' 얘기다. 부와 권력은 제도적으로 상속되었다. 와 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을 모티프 삼은 소설이다. 이윤석에 의하면 홍길동전의 작가가 허균이 아니라고 한다. 허균 이후 200년이 지나고 나서야 완성된 소설이라는 얘기. 이름 없는 서민작가(들)의 작품인 셈이다. 길동은 무예와 학문에 출중하였으나 신분의 제약이 있어 그 뜻을 펴지 못하였다. 결국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 우두머리가 된다. 흙수저들의 무리이니 '활빈당(活貧黨)'을 자처한다. 탐관오리와 타락한 승려를 징치하여 전국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와 땅의 법도를 말하지만, 해가 지면 해괴망측한 일들을 벌이는 이들을 징치한다. 호풍환우(呼風喚雨), 바람을 부르고 비를 오게 하는 등 갖은 둔갑술을 부린다. 하지만 현실은 변함이 없다. 출구가 이상의 세계뿐이었을까? 길동이 공중으로 부양하여 홀연히 사라진다. 첩의 신분이던 어머니와 부하들을 이끌고 무명의 공간, 섬으로 날아간다. 이 섬의 이름이 '율도(栗島)'다. 매양의 민담처럼, 흙수저이던 이 무리들은 유토피아의 땅 섬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던 것일까? 글쎄다. 이상의 세계를 현실로 가져오고 싶었던 사람들은 율도국을 전북 부안의 위도니, 일본 오키나와의 한 섬이니 하며 또 다른 소설을 쓰기도 한다. 나는 실제 목포에 있는 '율도'라는 섬과 유달산 주변 양을산이니 태을곡이니 하는 지명들도 이런 이상세계에 대한 욕망과 관련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디스토피아(Dystopia) 악마의 섬, 빠삐용은 나비가 되었을까

섬이 유토피아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디스토피아의 공간으로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유배의 대명사였던 섬들의 지난 과거가 그렇고 고흥 소록도니 여수 애양원이니 하는 사회로부터 격리된 공간들이 그렇다. 물리적인 섬뿐만 아니라 심리적 격리 공간들을 '섬'으로 표상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고독이나 배제, 격리의 의미로 섬을 그렸음을 기억한다. 심지어 인권유린이 첨예화되었던 사례들이 보고되기도 한다. 이상향 유토피아가 어디에도 없는 공간이라면 디스토피아는 어디에도 있는 공간 곧, 현실세계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섬으로의 유배는 인류가 사는 땅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영화 빠삐용은 실존인물 앙리 샤리에르(Henri Charriere)의 실화를 다룬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몸에 새긴 나비문신 때문에 빠삐용(Papillon, 나비)이라 불리던 프랑스 남부군 출신이다. 프랑스령 남미 동북부의 기아나 카옌(Cayenne)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탈옥한다. 베네수엘라에 정착하여 자신의 경험담을 담은 소설을 출간해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가 마지막으로 갇혔던 감옥은 악마의 섬(Devil's Island)로 불렸다. 정치범 수용소였던 이 감옥은 정글로 가로막히고 바다가 가로막고 있어 사망률이 75%에 이르렀다고 한다. 빠삐용은 코코넛 포대를 이용하여 탈출에 성공한다. 프랑스 정부는 악마의 섬 감옥을 1953년에 폐지한다. 영화의 장면들이 생생하다. 소설이 어디까지 사실인 것인지 영화가 어떤 허구를 상상하여 그려낸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이곳이 악마의 섬이었다는 것, 유토피아와의 반대 개념인 디스토피아의 공간이었다는 점이다. 디스토피아는 현대사회의 부정적 측면이 극단화된 암울한 미래상을 말한다. 역유토피아의 공간을 섬으로 표상한 사례다. 나비를 문신했던 빠삐용은 그래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았던 것일까.

섬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나는 이를 도서의 이중성이라 한다. 섬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다. 섬을 고립과 단절공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태도다. 하지만 인류는 끊임없이 유토피아의 공간을 현실의 무대로 끌어오려 한다. 섬에 대한 상상력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주로 낙원 및 유배라는 격리공간으로 형상화된다. 섬에 대한 유토피아적 세계관은 설화, 소설, 시 등의 인문학적 접근이나 영화, 애니메이션 등의 영상콘텐츠 속에서 두드러진다. 홍길동전에서 율도국을 상정하고 심지어 오키나와로 비정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세계를 현실화하고 싶은 지극한 욕망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天空)의 섬 라퓨타"를 기억한다. 영화 "그래비티"는 4D로 표현한 우주공간, 또 하나의 섬 이야기다. 영화 "인터스텔라" 혹은 "아바타"에서 얻은 공간에 대한 영감이 크다. 내식으로 말하자면 무릉도원(도연명의 도화원기)의 이상향을 그린 작품들이다. 디스토피아를 상정한 작품 또한 엄존한다. 절해고도의 고립공간이라는 점, 낙원이든 유배든 메커니즘은 유사하다. 현대사회의 배척과 버림, 외면의 질곡들, 그리하여 급기야는 고독사나 극단적 자살에 이르는 사회적 질환에 비유할 수 있다. 서해, 남해의 대부분의 섬들이 유배지로서 기능했던 역사적 사실을 조망하는 시선 중 하나다. 가장 극단적 유배 공간은 소록도(한센병 환자들을 집단수용한 섬)다. 일본 오카야마현 세토우치시 나가시마(長島) 국립한센병 요양소도 마찬가지다. 어느 나라라고 어느 세계라고 격리와 단절이 없었을 것인가. 우주공간의 영상을 통해 상상하듯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섬인 것을.

섬의 이중성,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의 세계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그 이중성을 교직하는 성격이 있다. 나루를 통한 소통이다. 지난 내 칼럼 중 목포의 부잔교를 독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소설이나 영화 등 각양의 분야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 섬을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으로 명명하고 줄곧 이 용어를 사용해오고 있다. 이 개념은 복수의 문화적 정체성을 띤 공간 혹은 사회를 말한다. 예컨대 율도국 등의 유토피아 공간, 천형의 유배지로서의 격리 공간, 포구를 통한 지속적인 소통공간을 더불어 상정한 개념이다. 표류를 감내해야 하는 부유의 개념적 혼재를 말한다. 이것을 공간적 혼종성 즉 헤테로토피아의 세계로 표현했다. 음악 용어에서 따왔다. 헤테로포니(Heterophony)는 복수의 성부(聲部)를 연주할 때 원래의 선율과 그것을 장식하고 변화시키는 선율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말한다. 인도네시아의 가믈란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다성 음악에 대한 이해를 대변한다. 이를 섬의 이중적 특성에 대입하여 개념화했다. 섬은 포구를 통해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였다. 해안지역을 포함해 섬지역은 표류의 장소적 기억이 늘 뒤섞여 있다. 질병의 표류와 쓰레기의 부유를 포함한다. 월경하는 것들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이상과 기피가 공존하면서 이를 교직시키는 공간이다. 그것이 섬의 정체다. 포구의 연결하는 성격과 표류의 부유하는 성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헤테로토피아의 공간이란 개념을 내가 만들었던 이유는 사실 나루를 통한 연결에 더 큰 방점이 있다. 그간 내가 주목하고 개념화했던 민초들의 철학,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는 개펄과 작은 여(嶼)들의 공간, 독립된 개체이면서 서로를 연결하는 나루의 철학들을 말하는 대대(對待)의 원리 말이다.

남도인문학팁

홍길동전의 율도국과 허생전의 무인공도를 상고하는 까닭

홍길동전의 율도국은 중국을 섬기지도 않고 조선 사람들이 출입하지도 않는 나라로 그려진다. 그야말로 이상향이다. 서얼(庶孼)이라는 신분격차가 없다. 길을 가다 물건을 줍지 않아도 풍족하게 살 수 있는 나라다. 정해진 음서(蔭敍)제도 혹은 가진 자들의 담합으로 직장을 만들어주거나 실력 없는 자들이 횡재하지도 않는다. 공평무사하고 노력한 만큼 대우받는 나라다. 하지만 봉건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무명의 작가 혹은 작가군(作家群)은 왜 유토피아의 낙원 율도국을 그려냈을까?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무인공도(無人空島)를 그린다. 허생전의 무인공도는 중국의 남방과 일본의 서쪽을 잇는 바다라는 구체적인 위치가 상정된다. 주인공은 이 공간에서 유가사상을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꾸리고자 모의한다. 결국 이 공동체로부터 떠나게 되지만 유토피아의 실험을 섬이라는 공간을 통해 그렸다는 의미가 있다. 이외 전우치전도 도술행각이나 부패한 정치상의 폭로, 빈민구제 사상 등 홍길동전과 유사한 측면들이 많다. 무명씨들은 홍길동전을 그려내며 부당한 사회구조에 반항했다. 박지원은 허생을 앞세워 유토피아 무인공도를 건설하려다 실패했다. 빈부격차가 첨예했던 그때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진보했을까? 노력한 만큼 대우받고 능력 있는 만큼 인정받는 사회로 탈바꿈했을까? 여전히 누군가는 뒷손을 써서 자녀를 취직시키고 권력 있고 돈 많은 자들은 이른바 '별장'에 숨어들어 입에 담지 못할 폭력을 일삼는다. 그래서다. 여전히 자기만의 율도국을 건설하고 있고 끊임없이 현실세계로부터 도망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이 사회는 병들어 간다. 허생이 무인공도의 실험에 성공하지 못한 까닭을 상고해 본다. 체념사회를 거쳐 분노사회로 접어든 지금,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율도의 섬 유토피아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느 곳에도 없는 율도를 만들 것인가 디스토피아의 현실에 저항하여 개벽할 것인가. 햄릿의 입을 빌려 적는다. "To be, or not to be".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