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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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동굴의 노래
  • 입력 : 2019. 04.03(수) 13:48
  • 편집에디터

강진군의 천년고찰 백련사(白蓮社) 동백림에서 동박새 한 마리가 동백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빨고 있다. 뉴시스

가위눌린 꿈, 카오스의 동굴로부터

깊고 어두운 동굴이었다. 시야가 미치는 공간으로만 빛이 들어왔던 것 같다. 동굴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좁고 긴 터널 같은 그 공간에 새 두 마리가 서 있었다. 까마귀 혹은 까치, 그 나이에 인식했던 날짐승들의 총체였을까. 그 새가 나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꿈은 스스로의 예지를 그리고 욕망을 투사하는 것이겠기에.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동굴 속에서 시작한 나의 울음은 급기야 현실로 돌아와 계속되었다. 어린 가슴을 쥐어짜는 울음소리에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놀라 깨셨다. "아가 어찌 그러느냐. 나쁜 꿈을 꾸었느냐?" 아버지는 나를 다독이셨다. "이런, 가위 눌렸구나" 어머니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한동안을 그렇게 울었던 것 같다. 두 마리의 새에게 왜 나를 투사하였을까? 동굴로부터 돌아 온 우리 방, 심지가 닳아 희미한 등잔불빛은 방구석까지 비추지 못했다. 창살에 비추인 아버지의 굽은 등이 마치 거인 같았다. 또 하나 나의 동굴이었다. 늙으신 부모님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아마도 나는 다시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서너 살쯤 되었을 그 기억들이 반백년을 넘긴 지금까지 선명히 남아있는 이유가 뭘까. 불혹의 어느 날, 들뢰즈와 가타리의 글을 읽으며 소스라쳐 놀란 적이 있다. 내 꿈 이야기, 그 노래를 증언하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래하는 동굴, 리토르넬로

"어둠 속에 한 아이가 있다. 무섭기는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음을 달래보려 한다. 아이는 노랫소리에 이끌려 걷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길을 잃고 헤매고는 있지만 어떻게든 몸을 숨길 곳을 찾거나 막연히 나지막한 노래를 의지 삼아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간다. 모름지기 이러한 노래는 안정되고 고요한 중심의 스케치로서 카오스의 한가운데서 안정과 고요함을 가져다준다. 아이는 노래를 부르는 동시에 어딘가로 도약하거나 걸음걸이를 잰걸음으로 했다가 느린 걸음으로 바꾸거나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노래 자체가 이미 하나의 도약이다. 노래는 카오스 속에서 날아올라 다시 카오스 한가운데서 질서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노래는 언제 흩어져버릴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기도 하다. 이처럼 아리아드네는 언제나 한 가지 음색을 울려 퍼뜨리고 있다. 오르페우스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장황하게 노래 혹은 소리의 이면을 설명하는 저자들의 언설이 이어진다. "리토르넬로는 영토적인 배치물이다. 새는 노래를 지저귐으로써 자기 영토를 나타낸다. 그리스 음악의 선법(旋法)이나 인도 음악의 리듬도 자체가 이미 영토적이며 지방과 지역을 나타낸다. 리토르넬로는 이 외에도 다양한 기능을 할 수 있다. 연애의 기능, 직업적 기능 혹은 사회적 기능, 나아가 전례(典禮)나 코스모스적 기능 등. 어느 것을 취해도 리토르넬로는 반드시 대지의 일부분을 동반한다. 예를 들어 정신적인 의미의 대지라 하더라도 통상 하나의 대지를 수반하며 본질적으로 <타고난 것(Natal)>이나 <선천적인 것(Natif)>과 관계를 맺고 있다." 새의 지저귐이 그들의 세계를 영토화하고 어떤 변인들을 통해 탈영토화하기도 한다. 나는 지역간 특성을 지니고 있는 민요에 이 리토르넬로 이론을 대입해 설명해온 바 있다.

섹시한 주먹도끼를 만들고 노래와 춤을 추던 네안데르탈인

스티븐 미슨은 그의 책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에서 음악과 언어의 기원을 장황하게 추정한다. "Hmmmmm'은 새들이 지저귐을 통해 영토를 구축한다는 설명과도 같다. 음악과 언어의 전구체(공통의 뿌리)로서 의사소통 체계라는 것, 네안데르탈인의 의사소통 체계가 전일적(Holistic), 다중적(Multimodal), 조작적(Manipulative), 음악적(Musical), 미메시스적(Mimetic)이었다고 말한다. 이들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다. 전일성은 노래하기 혹은 메시지 전달하기가 개별단위로 쪼개지지 않고 덩어리로 이해된다는 뜻이다. 조작성은 타인의 감정상태와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뜻이다. 다중성은 소리와 몸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뜻이고, 음악성은 멜로디와 리듬을 사용한다는 뜻이며 미메시스성은 제스처와 공감각을 이용하여 소리를 전달한다는 뜻이다. 마치 개가 자신의 영역표시를 위해 전봇대에 오줌을 싸거나 새들이 영토화를 위해 지저귀는 것을 상기시킨다. 몸을 흔들어 춤을 추고 노래하기만 했을까. 네안데르탈인 남성들은 주먹도끼를 섹시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성선택의 진화 얘기다. 균형 잡힌 돌도끼를 만들어 상대 여성을 매혹시키려 했다는 이론이다. 분명한 언어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기 전에는 멜로디와 리듬으로 서로를 매혹시키려 했다는 것이 다윈의 주장이기도 하다. 언어의 기원이라고나 할까. 다윈 이후 고삐 풀린 성선택, 핸디캡의 원리, 지표 형질, 미적 형질 같은 개념들이 발견되었음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새의 수컷이 번식기에 주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 시기 우리는 이것이 수컷들 간의 영역 경쟁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왔다.

35만 년 전 아타푸에르카 동굴에 서서

하지만 수컷들의 영역 경쟁 이론이 인류의 공동 음악활동을 온전히 설명해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주변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조작하고, 자연세계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잠재적 짝짓기 상대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자식의 인지력과 정서발달을 촉진하는 데 노래를 사용할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명료하지 않다는 뜻이다. 스티브미슨이 이끄는 대로 35만 년 전, 스페인 북부의 아타푸에르카 동굴로 들어간 본다. 고고학계에 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뼈의 동굴)로 알려진 곳이다. 1976년 최초의 표본이 발견된 이후 2,000개가 넘는 표본이 출토되었다. 해골의 모든 뼈가 가장 작고 가장 약한 것까지 존재한다. 시신이 고의적으로 이 구덩이에 던져졌다는 뜻이다. 발굴조사를 이끈 루이스 아르수아가는 이것을 인간의 장례행위를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라고 한다. 중세 유럽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이 퍼졌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 집단적이고 일시적인 장례의식에 생존자들의 감정적인 상황을 추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동의 감정상태를 유발하기 위해 어떤 것들이 동원되었을까. 이들 모두는 죽은 이들을 알고 있었고, 집단의 젊은 성인들을 잃는 일이 자신들의 생존에 무슨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거룩한 장례의 순간은 이 집단의 유대를 다져야 할 때였고, 미래의 협력을 다짐해야 할 때였을 것이다. 공동의 노래와 춤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공동 음악활동이 사회적 유대와 집단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스티브미슨이 굳이 상기시키지 않더라도 상식 수준의 이야기다. 경계 상실, 우리성, 결합, 집단 내 편향성 등을 유발하는 공통된 감정상태를 불러일으켜 협력적인 행동을 촉진한다는 것이다. 호모 에르가스테르가 출현하고 완전한 직립보행이 진화함에 따라 'Hmmmmm'에는 음악적 성질이 더해졌고, 자연세계에 대한 정보전달, 배우자 경쟁, 육아에 대한 필요성이 선택압으로 작용하여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했음을 다시 체크해둔다.

망각과 기억의 4월,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들

카오스의 동굴, 이름 모를 새 두 마리의 꿈으로부터 나는 반백년을 더 지나왔다. 구석조차 비추지 못했던 우리 방 등잔불 기억은 항상 늙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반한다. 내 유년의 리토르넬로, 내 동굴의 세계였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흥그레타령과 아버지의 쟁기질 소리가 있다. 지금은 잊혀진 내 흥얼거림들도 있다. 이 노래들은 스티브미슨이 인용했던 에디의 공감각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삶의 코스모스를 재구성해왔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리토르넬로 확장의 언설에 다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진화론에서 말하는 새들의 지저귐, 그 영토 확장만으로 이 모두를 설명해낼 수 없다는 점이다. 탈영토화, 재영토화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네안데르탈인들의 장엄한 장례, 아타푸에르카 동굴을 상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을 것이다. 지금은 거의 고인이 된 마을 사람들, 모두 나서 상여소리를 불렀다. 장엄했을까 슬펐을까. 어린 나는 그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내 가위눌린 꿈을 달래주던 아버지, 나의 안온하던 동굴의 세계가 마을사람들까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다시 봄이 왔다. 엘리엇을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4월은 잔인한 기억을 환기시킨다. 4.16으로부터 제주 4.3, 그리고 세월호까지, 기억의 강은 너무도 힘들고 길지만 망각의 강은 찰나처럼 가볍기도 하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겠다. 왜 풀빛이 서러울까. 이수복의 노래가 아니어도 더불어 불러야 할 노래들이 있다. 우리는 4월에 죽은 이들을 알고 있다. 우리 집단의 정체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알고 있고, 미래 협력을 위해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알고 있다. 나만의 리토르넬로 안온한 동굴을 벗어나 탈영토화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이유들이다.

남도인문학팁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

35만 년 전, 아타푸에르카 동굴에서 아마도 거룩하게 연행되었을 네안데르탈인들의 장례의식을 상상해본다. 그들이 공유했던 공감의 몸짓과 'Hmmmmm'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쁨과 슬픔, 걱정, 부끄러움, 죄책감을 전달하고 도상적인 제스처, 춤, 의성어, 목소리 흉내, 소리 공감각을 통해 전달했던 자연세계에 대한 자세한 정보들 말이다. 스티브미슨의 해석이 과도한 측면이 있더라도 사회정체성을 창출하기 위해 연행되었던 음악의 효용을 주장하는 맥락만은 높이 사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인용한 음악 백치천재 에디의 묘사가 울림을 준다. 우리 주위를 둘러싼 음악 같은 소리에 얼마나 무감각해져있는지를 일깨우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에디와 함께 산책을 하는 것은 소리의 파노라마 속으로 여행하는 것이었다. 그 아이는 철문을 손으로 만지며 철커덩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거리에 늘어선 가로등을 일일이 탕탕 쳐보며 만일 좋은 소리가 나면 그 음높이에 해당하는 이름을 말했다. 자동차 오디오 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었고, 비행기와 헬리콥터가 지나갈 때면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흉내 냈고, 거리를 덜커덩거리며 내려가는 트럭을 가리켰다....에디는 들을 수 있는 모든 것에 귀를 기울였고 그 소리에서 남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들었다." 에디는 태어나서부터 언어능력이 전무한 아이였다. 스티브미슨이 주목한 것은 이 아이의 감성이 네안데르탈인과 근본적인 유사성이 있다는 점이었다. 이 아이에게 들리는 자연의 멜로디와 리듬을 언어가 진화한 호모사피엔스는 듣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물음과 함께. 들리지 않는 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봄이었으면 좋겠다.

동박새 한 마리가 동백꽃 주위를 날아다니며 꿀을 따고 있다.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