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의 통과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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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재생의 통과의례
  • 입력 : 2019. 04.10(수) 15:02
  • 편집에디터

목포시 목포신항에 세월호가 바로 세워져 있다. 뉴시스

범피중류(泛彼中流), 인당수에 이르는 역설의 미학

범피중류 둥덩실 떠나간다/ 망망한 창해이며 탕탕한 물결이라/ 백빈주 갈매기는 홍요안으로 날아들고/ 삼강의 기러기는 한수로 돌아든다/ 요량헌 남은 소리 어적이었만은/ 곡중인불견의 수봉만 푸르렀다~(후략) 산천경계를 읊어 내려가는 아름다운 노랫말이다. 전혀 비장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귀신들을 불러내어 대화하기도 하고 죽음 이후의 일들을 열거하기도 하는 의미심장한 노래다. 심청을 실은 남경장사들의 배가 망망한 바다를 떠나가는 풍경, 범피중류(泛彼中流)의 첫 대목이다. 죽음을 앞 둔 심청이의 심경을 읊었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송광록이 제주도에서 소리공부를 하고 돌아오던 길에 뱃전에 앉아 착상한 노래다. 갈까마귀와 귀촉도는 곧 일어날 심청의 죽음을 지시한다. 하지만 삼산은 반락청천 밖이며 이수중분백로주는 시인 이태백이 놀던 곳이다. 사설은 구구절절 중국의 시인묵객들을 장소와 더불어 소환한다. 한국문학의 사대(事大)적 조류, 당시의 학인들이 이 사설의 구성에 관여했을 것임을 짐작케 해준다. '범피중류'와 '혼령대목'은 수궁가에도 수용된다. 바다라는 공간적 배경 때문만은 아니리라. 심청이 죽으러 가는 대목이거나 토끼가 용궁으로 들어가는 대목의 역설이 있다. 심청은 연꽃이라는 배를 타고 환생하고, 토끼는 '고국산천'을 부르며 육지로 나온다.

인신공희 심청과 대신맥이의 역설

"제웅은 짚으로 단단하게 팔과 다리를 엮었는데 머리는 큼직한 뒤웅박을 씌워놓고 눈썹과 눈, 코, 입을 그려두었다. 여자임을 표현하노라고 양 뺨에는 붉은 연지를 찍었고 입술은 조그맣게 그려 놓았다. 선원이 제웅의 팔에 저고리를 입히고 치마를 바로 아래에 붙들어 매었다. 기다리고 섰던 중국인 장사치가 누런 종이에 붉은 결명주사로 용을 그린 부적을 제웅의 얼굴에 붙였다. 부적에는 또한 붉은 글씨로 '바라옵건대 황해바다 용왕님 드소서'라고 씌어 있었다. 제를 마친 그들은 아직 파도가 거친 갑판으로 나왔다. 모두들 두 손을 합장하고 빌면서 머리를 조아리는데 선원이 쳐들었던 허수아비를 어두운 바다로 내던졌다. 허수아비는 가파른 언덕처럼 솟아오른 파도 깊숙이 내리꽂혔다가 날름대는 물결 위로 치솟고는 다시 파도를 넘어가 이내 사라져버렸다."

황석영의 소설 '심청'의 앞부분이다. 우리가 아는 심청가 혹은 심청전과는 좀 다르다. 남경장사 상인들이 공양미 삼백석에 심청을 사다가 인당수에 제물로 바치지 않았나? 하지만 황석영의 소설에서는 제웅직성을 만들어 대신 바치고 동아시아를 돌아 한반도로 심청을 귀환시킨다. 황석영의 탁월한 아이디어는 사실 이런 설화적 전통에 기반 해 있다. 재생, 환생, 부활 등의 언설로 다루어지는 문학적 장치들, 곧 죽음을 승화시키는 여러 가지 방식들 말이다.

귀촉도(歸蜀道)의 미당은 독우청춘(讀雨聽春)하였을까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중략)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님아" 잘 알려진 미당의 시 '귀촉도'다.

중국 고서 '환우기'의 귀촉도 설화를 모티브 삼았다. 중국 주나라 말기 촉나라에 두우(杜宇)라는 왕이 있었다. '망제(望帝)'라 불렀다. 어느 날 문산(汶山)의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 오는 시신을 만났다. 물에서 건져내니 시신이 다시 살아났다. 살아난 이유를 물었다. "나는 형주땅에 사는 별령(鱉靈)이라는 사람이다. 강에 나왔다가 잘못해 물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별령은 예쁜 딸을 왕에게 바쳐 환심을 사고 마침내 망제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하루아침에 나라를 빼앗긴 두우왕은 원한과 울분을 삭이지 못한 채 죽게 되었다. 그 후 대궐이 보이는 서산에 밤마다 두견새 한 마리가 날아와 구슬피 울었다. 촉나라 사람들은 이 새가 망제의 넋이라 생각하고 '귀촉도(촉나라로 돌아가는 길)'라 했다. 귀촉도는 흔히 두견새라 한다. 불여귀, 자규라고도 한다. 통하는 주제들이 있다. 망제가 죽어 자규가 되고, 별령은 물에 빠졌다가 살아나 황제가 된다. 심학규는 물에 빠졌다가 몽운사 화주에게 구원을 받고, 심청은 인당수에 빠졌다가 연꽃을 타고 귀환한다. '재생의 피카레스크 형식'을 취하는 고사다. 미당은 두견새의 울음을 어떻게 독해하였나? 친일 행적이나 전두환에 대한 우호적 묘사 때문에 거론 자체를 터부시하는 이들이 많긴 하지만 이 고사에 기반한 두견의 울음을 이만한 수사로 엮어낸 이 많지 않다. 나는 연전 칼럼에서 봄비에 대한 애상을 그리며 '독우청춘'이란 조어를 만들었다. 비를 읽어(讀雨) 봄을 듣는다(聽春). 마치 심청의 죽음을 환생으로, 두견의 울음을 재생으로 독해하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범피중류, 심청이 인당수에 이르는 대목에서도 귀촉도가 등장한다. 나는 이를 심청의 환생에 대한 조짐이요 징조로 듣는다. 두견(杜鵑)을 붉은 피 진달래로 읽는 것처럼.

황석영의 연화(蓮花)와 진흙의 물위에 떠있는 꽃

황석영은 심청을 죽이지 않는다. 대신 제웅을 인당수에 바치게 한다.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다. 대신하는 공희(供犧)이기에 '대신맥이'라고도 한다. 질병을 막기 위해 벌이는 남도지역 굿의 총칭이기도 하다. 내륙 지역에서는 짚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제웅직성이 든 사람의 이름과 생년을 적어서 길가에 버린다. 해당자의 액을 대신 막아주는 역할이다. '나후직성'이라고도 한다. 나이에 따라 그 운명을 맡고 있다는 아홉별 얘기다. 내륙에서의 대신맥이는 주로 닭을 쓴다. 바다에서는 산 돼지를 통째로 바치기도 한다. 남도지역 도깨비고사에서는 소뼈를 망태기에 담아 헌식하기도 한다. 모두 죽음을 포함한 부정의 힘을 긍정의 힘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설에서도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대신 바쳐 심청을 살려낸다. 대신해서 죽은 '대신맥이'가 있었기에 가능한 설정이다. 중국에서는 렌화로, 필리핀에서는 로터스로, 류큐(오키나와)에서는 렌카로 이름이 바뀐다. 파란만장한 동아시아 여성의 삶을 묘사해낸다. 이들 이름 모두가 연화(蓮花), 즉 연꽃의 이칭이다. 나는 연꽃을 재생과 부활의 상징으로 읽는다. 진흙의 물위에 떠 있는 꽃, 물위에 떠 있으니 영락없는 배다. 연꽃은 오염된 것들을 정화시키고 죽은 것들을 살려내며, 가버린 것들을 다시 싣고 오는 배다. 성경으로 말하면 마치 요나가 물고기의 뱃속에 들어가 있다가 사흘 낮 사흘 밤이 지난 후 돌아온 사건과도 같다.

'넋당석'의 역설, 가버린 것들을 싣고 오는 배

덧없는 꽃들이 피고 지기를 다섯 해, 세월호 5주기를 맞았다. 또 그 얘기냐고 핀잔하는 이들 앞에 서면 그저 황망할 뿐이다. 개별적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이런저런 추모의 의례가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장례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통과의례란 것이 있다. 대를 이어 준행해 온 시간의 분절 방식이다. 돌잔치니 혼인식이니 장례식이니 따위가 모두 이 범주에서 논의된다. 흐르는 시간을 분절하고 그 마디마디에 의미를 부여하여 명절(名節, 마디의 이름)이니 절기니 따위의 의례를 행해왔다. 이 기점 중의 핵심은 태어나고 죽는 것이다. 지금은 큰 의미 없어 보이지만 육십갑자 회갑이 중요한 기점이었다. 육십년이 지나면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시간이 영구히 달아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된다는 관념이다. 세월호 5주기를 맞는 아침, 굳이 심청과 제웅직성을 들어 말하고 싶었던 것들이 있다. 남도의 무속 중에 망자를 저승으로 보내는 '질닦음' 거리가 있다. 흰 배를 펼치고 그 위에 '넋당석(넋을 담은 바구니라는 뜻)'으로 길을 닦는다. 반야용선(般若龍船), 용선, 신광주리 등으로 부른다. 이 길은 내륙의 길이 아니라 바닷길이다. 심청이 인당수로 갔던 길이기도 하고 토끼가 자라를 따라 용궁으로 갔던 길이기도 하다. 죽음의 길로 들어섰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나? 수많은 종교와 설화, 그리고 문학작품들의 묘사 말이다. 여기에 재생과 부활이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죽어서 행하는 의례를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라 명명하고 각각의 의례들이 사실은 '재생'과 '부활'을 염원하거나 수식하는 장치라고 해석해왔다. 세월호도 마찬가지다. 늦었지만 범사회적으로 떠나보내는 의례와 함께 재생의 의례를 행해야만 한다. 마치 심청이 살아 돌아오는 문학적 장치와도 같이. 이 의례를 위한 진상규명 등 선행 준비들이 있어야겠고. 이 같은 대사회적 통과의례가 없다면 정지된 시간이 어찌 다시 흐르겠으며 역사가 진보하겠는가. 보냄의 미학, 넋당삭의 역설, 이제 응답의 몫은 정부에게 있다.

남도인문학팁

시간의 마디와 절기의 매듭

지난 내 특집 칼럼 중에서 시간의 마디를 설명했던 글을 재인용해둔다. 시간의 마디에 이름을 붙인 것, 명절(名節)의 본 뜻이다. 시간을 묶었다가 풀어놓기도 하고 풀어놨다 묶어두기도 한다. 시간을 나누는 방식은 문화권마다 다르고 종교마다 다르다. 민족마다 다르고 나라마다 다르다. 왜 다를까? 자연 법칙으로서의 시간은 동일한데 말이다. 생태적 조건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개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는 설날이나 추수감사제 성격의 추석 등은 1년이라는 시간을 단위화 한 것이다.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력, 달을 중심으로 하는 태음력에서 나온 구분법들이다. 문화권에 따라 계절은 다시 월로 나뉘고 10일, 7일, 5일 등의 단위로 더 쪼개진다. 하루도 아침, 점심, 저녁으로 쪼갠다. 작은 단위의 시간으로 우주의 시간을 말하기도 하고 우주 단위의 시간으로 작은 단위의 시간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를 포함한 동양권에서는 사람의 평생을 60년으로 마디지어 구분하기도 한다. 땅의 수와 하늘의 수를 교직시켜 60갑자라는 철학체계를 만들어낸 이유를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궁금한 것은 왜 시간들에 마디를 두고 이름을 붙였는가 하는 점이다. 간단하다. 그 마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디는 매듭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마디를 짓는 것은 그 시간을 기점으로 매듭을 짓고자 함에 있다. 이전의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을 구분 지어 매듭을 짓고 싶은 것이다. 이 또한 문화권 종교권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공통적인 것은 이 기점을 형성하는 의례나 의식들이 대개 죽임과 살림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청에서 볼 수 있듯이 여기서의 죽임의 서사는 살림을 위한 사전 포석이다. 세월호 5주기, 우리의 시간 분절 관행으로 보면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심청을 소환하든 성경의 요나를 소환하든, 질베 닦아 넋당삭 연화선(蓮花船) 세우고 재생의 의례를 거행할 때다.

목포시 목포신항 세월호 조형물 뒷편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뉴시스

목포시 목포신항 세월호 조형물 뒷편으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