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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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소록도 연가
  • 입력 : 2019. 04.17(수) 15:19
  • 편집에디터

아열대 식물부터 오래된 나무로 잘 가꿔진 고흥 소록도 중앙공원과 구라탑(求癩塔). 고흥군제공

이층창집의 세레나데, 그 총각은 어느 곳에서 알콩달콩 늙어갈까

부산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층 창집이었다. 무슨 노래였을까? 정확한 기억은 없다. 그는 맞은편 염선화(가명)씨의 방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앉아 노래를 불렀다. 익숙하지 않은 기타 소리였지만 그런대로 들어줄만한 노래들이었던 것 같다. 컨츄리 음악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기였으니 한국동란 직후였을 것이다. 컨츄리 소울, 컨츄리 록 음악 등이지 않았을까? 이때만 해도 세레나데를 실행한다는 것이 무척 어색하지 않았나. 무슨 대학을 다녔다고 했는데 지금은 다 잊어버렸다. 오로지 기억나는 것은 창문 틈사이로 내리쬐던 춘사월의 햇살들 뿐이다. 천연덕스럽게 딴 짓을 하는 척했지만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곤 했다. 세레나데, 이국풍의 그 노래들이 이층 창문에서 흘러나오던 때를 추억한다. 노래의 힘이었을까. 연정의 선율은 급기야 약혼으로 이어졌다. 영도의 어느 사진관이었을 것이다. 거기서 함께 사진을 찍었지. 그래, 약혼 사진 말이야.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어느 날이었던가 염선화씨는 손 감각이 무뎌지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상했다.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다. 갈수록 정도가 심해졌다. 인근의 병원을 찾았다. 진단결과는 청천벽력이었다. 한센병(당시는 문둥병이라고 했는데, 한센인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호명방식이라는 점에서 '한센'으로 통칭한다)이라고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병원을 오가는 치료생활이 시작되었다. 세레나데를 불러주던 그를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소록도로 가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앞도 뒷도 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소록도로 향했다. 그것이 그와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아열대 식물부터 오래된 나무로 잘 가꿔진 고흥 소록도 중앙공원과 구라탑(求癩塔). 고흥군제공

고흥 소록도 중앙공원의 구라탑(求癩塔). 고흥군제공

고흥 소록도는 한센인 18만명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감금실과 검시실로 사용된 붉은벽돌 건물 모습. 고흥군 제공

고흥 소록도는 한센인 18만명의 피와 땀이 서려있다. 감금실과 검시실로 사용된 붉은벽돌 건물 모습. 고흥군 제공

진남포에서 백령도, 목포를 거쳐 부산까지

염경화씨는 북한 진남포 출신이다. 피난 오던 시절의 풍경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불 호청을 다 뜯어 갖고, 옛날에 광목, 다 뜯어 갖고 개나리봇짐(괴나리봇짐), 식구대로 만들어 갖고, 다 짊어지라고, 그래 앙끗도 갖지 말고 입은 대로, 니꾸사꾸(Rucksack, 배낭) 만든 택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작은 아버지, 작은엄마까지, 애들까지 다 그날 저녁에 만들어 갖고, 거기다 쌀을 담으라 하더라고요, 아부지가, 다 우리 힘대로, 담어 갖고 짊어지고 어둑어둑한 데로, 선창으로 나오락해요. (진남포로요?), 예, 선창 부둣가로 가자 그러더라구요. 갔는데 그, 그거를 지다랗게(길게) 째가지고(찢어가지고) 잇어(이어)갖고, 그거를 빠(밧줄을 말하는 듯)를 만들어가지고 배에 부둣가에 같이, 전부다 우리 허리에다가 엮으는 택이라. 할머니가 앞에 섰고, 할아버지 뒤에 서고, 작은 엄마, 작은아버지, 우리 형제간들 모두 다 끈으로 연결했어. 싹 연결하고 내가 맨 뒤에 가 묶여가지고 아버지는 배위에서 잡아당기는데, 사람이 얼마나 빡빡한지 뭐, 배 서로 탈라고요. 빡빡한께 줄을 땡겨갖고, 내가 맨 마지막 땡겼는데, 뱃머리가 여가(여기가) 선창이면 배가 출발해서 둥둥둥둥 뜨고 있는기라. 나는 여가(손으로 방바닥을 가리키면서) 묶여 갖고 달랑달랑, 마지막 타고 배는 떠났어요. 떠갖고 얼마쯤 갔는데, 다르륵 다르륵(총소리가?) 예, 총소리가... 그래, 살아나갖고, 나오면서 문열어놓으니까(배 타기 전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 그 우리 집 뒷길에 시체가 주욱 깔렸어요. 핏물이 또랑처럼 내려오고, 그걸 내가 봤거든요, 어릴 때. 그 후로 사이렌만 불면, 우리는 인자 피난 간다고, 방공골(방공호)로, 같이 가다보면 따르르르(총소리를 말함). 옆에서 픽 쓰러지고 또 픽 쓰러지고 그 새에서 어떻게 내가 살았는가 싶어요." 그녀의 구술은 시종 담담했다. 총소리의 주체가 누구인지 피해자가 누구인지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염경화씨 가족이 진남포에서 야밤중에 배를 타고 피난 오던 시절의 마치 꿈같은 묘사다. 염씨는 이 경험 이후로 비행기 소리만 나면 떨린다고 했다. 총소리만 나면 머리가 하얘진다고도 했다. 열네 살 때의 일이다. 담담히 말하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을 진정할 수 없다고.

무망(無望)했던 소록도 생활, 아들을 낳고 힘을 얻어

아무도 모르게 소록도로 들어와 치료생활을 시작했다. 부산의 약혼자가 4~5년 동안이나 염경화씨를 찾아 헤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뿐이었다. 몸은 자꾸 아픈 기억들을 몰아내기만 했다. 잊을 수 없는 일들을 스스로 몰아내기 위해서 몸이 아팠을까. 지치고 힘든 몸은 기억의 조각들을 뒤섞기도 하고 새로 배치하기도 하는 일종의 기계였다. 다행히 초기에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서로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에 의형제나 의부모를 맺는다든가 부부의 연을 맺는 일들이 중요했다. 소록도에서는 그렇게 맺어진 인연들이 대다수다. 어쩌면 피붙이보다 더 진한 부모요 형제요 자매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남편을 그렇게 만났다. 중매가 무슨 형식을 거쳐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알음알음으로 소개해준 이들이 있었다. 소록도로 들어간 첫 해이던가 결혼을 했다. 이전의 일들을 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스물네 살 되던 해인가 애기가 들어섰다. 당시 소록도에서는 혼인은 할 수 있어도 애기를 낳을 수 없었다. 결혼을 하려면 남자는 정관수술을 받아야 했다. 당시만 해도 의료 환경이 열악해 자녀에게 병이 전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방법도 있었다. 애기를 낳으려면 육지로 나가야 했다. 일종의 추방인 셈이다. 강제된 정관수술에 대해서는 추후 지면을 만들어 소개하겠다. 일제강점기의 소록도 탈출 얘기들은 눈물 없이 듣기 어렵다. 어쨌든 애기가 들어서지 않도록 남편이 정관수술을 했는데 수술이 잘못 되었던 모양이라. 애기가 들어서버렸다. 두 가지 선택이 강요되었다. 불법으로 중절 수술을 하던가, 내륙으로 추방당하던가, 남편과 상의 끝에 육지로 나가기로 했다. 육지의 모처에 마련된 정착촌이었다. 혈혈단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그렇게 나와 얘기를 낳고 기르게 되었다. 물론 애기는 모처로 격리하여 양육되었다. 열심히 농사짓고 가축을 키우며 학비를 마련했다. 아이를 또 하나의 정착촌에 마련된 학교에 보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다른 걱정이 없었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심했던 모양이더라. 결국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사업체를 운영하게 되었다. 지금은 장성하여 혼인하였고 훌륭하게 생활하고 있다.

소록도 한센인들의 기억과 소망

지난해 나는 소록도 한센인들 일곱 분의 살아오신 이야기들을 정리했다. 구술사, 일명 라이프스토리(Life story, 생애담) 혹은 라이프 히스토리(Life hestory, 생애사)라고도 한다.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 주신 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귀한 기회를 주신 소록도박물관 관계자들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공개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고 공개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공개 가능한 이야기들은 차후 기회가 된다면 가명 처리하여 소개할 수도 있겠다. 구술 받는 내내 지금, 현재, 여기에 공존하는 우리가 이 소중한 기억들을 어떻게 사회적 동력으로 소환시킬 수 있는지를 묵상하였다. 한 사회의 전쟁과 혁명과 투쟁의 수난사들을 성찰의 방식으로 에너지화 하는 것처럼, 이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기억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끄집어 내 보존하고 성찰해야 하는가, 그 실천을 서둘러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 말이다. 이들의 존엄과 인권, 나아가 소록도라는 공간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 활성화될수록 우리 사회가 보다 건강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들의 고난과 핍박의 역사가 비단 이들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능하면 일본이나 중국과 더불어 유네스코 무형유산으로 등재를 시도하시라 권유 드렸던 것도 이런 맥락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일본의 사례도 기회가 되면 소개하기로 하겠다. 소록도는 그만한 가치와 정보를 충분히 갖고 있다고 판단된다. 내게도 이 소중한 가치를 어떻게 우리 사회에 담아내고 또 미래 에너지로 확산해낼 것인가 하는 숙제가 주어져 있다. 우리는 이들의 희생과 고난을 거룩한 물증삼아 근대와 인권과 국가와 인류를 유의미하게 확장해갈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말씀, 어려운 마음속의 얘기들을 꺼내주신 구술자들에게 거듭 감사드린다. 여생 부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시기를, 이들의 희생과 고난의 역사가 인류의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남도인문학팁

북한 진남포에서 소록도까지 염경화씨의 삶

염경화(가명)씨는 북한 진남포 출신이다. 실제 태어나기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본명을 말씀하셨으나 장성한 아들이 있으므로 가명을 쓰기로 한다. 아버지가 오사카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무역선을 운영했다. 매우 유복한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동란 때 진남포에서 야밤중에 배를 타고 피난오던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으시다. 따발총 소리와 길에 즐비하게 죽어나간 사람들의 핏자국, 매우 어렵게 배를 타고 백령도, 인천, 목포, 부산까지 피난 왔던 길들을 구술해주셨다. 부산에서 무역업을 하며 부유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사고사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풍지박산, 가정이 무너진다. 기억에만 의존하는 구술이라 한계가 있다. 예컨대 실제로는 한국동란 때인데 시기를 잘못 말씀하시기도 한다. 구술의 아귀가 맞지 않는 점들이 있다. 기억이 뒤섞여 있다는 뜻이다. 외동딸이던 염씨에게는 약혼한 총각이 있었다. 염씨가 병을 얻어 소록도로 온 이후, 5년간을 약혼녀 찾아 헤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 총각은 어디서 알콩달콩 늙어갔을까? 부산의 집과 재산들을 계모에게 사기 당한 것 같다는 진술도 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소록도로 들어온 이후 다행히 치료가 잘되어 겉으로 보기에는 정상인처럼 보인다. 혼인하여 남편이 강제정관수술을 당하였지만, 수술이 잘못되어 아이가 들어서게 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정착촌으로 나가게 된다. 가축을 키우며 열심히 살면서 살림을 모았다. 아이는 지금 결혼하여 잘 살고 있다. 결혼하기 전 상견례를 할 때, 한센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대목이 많이 아프다. 이제 다시 소록도로 귀향(소록도를 고향으로 생각하니까)하여 삶을 마무리하고 있다. 염경화씨는 북한 태생(출생은 오사카)이기 때문에 유년시절의 북한 이야기나, 피난오던 시절의 진남포 얘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계모와 북한의 강원도 깊은 골짜기에서도 살았던 경험도 기억하고 있다. 북한 출신 한센인들의 이야기를 주목하기 위해서라도 매우 소중한 구술이라 판단하고 있다. 여생 보다 편안하고 행복하시기를 소망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