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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목포 공연 소사
  • 입력 : 2019. 05.01(수) 14:40
  • 편집에디터

1963년경 목포예술제 공연 장면-목포예총 제공

목포 최초의 극장은 어디일까

연극 혹은 공연이란 호명으로 소환할 수 있는 첫 번째 대상은 근대기 극장이다. 1904년 목포 복만동의 '목포좌'를 주목한다. 목포에 처음으로 들어선 근대적 극장이라고 할 수 있다. 목포좌는 운영 미비로 1908년 없어진다. 같은 해 상락동에 '상반좌'가 설립된다. 1914년에 증축하여 138평 규모에 이른다. 1929년 허가기간 만료로 문을 닫는다. '상반좌'가 폐쇄되기 이전, 무안동에 활동극영화 상설극장으로 '희락관'이 설립된다. 1926년 화재로 없어진다. 1927년 희락관 자리에 상설 활동극장인 '평화관'이 등장한다. 설립당시 목포극장과 평화관은 2층 목조건물이었다. 목포극장은 183평 규모, 수용정원 510명, 평화관은 86평에 정원 353명이었다. 식민시기 평화관은 다다미 관람석에 방석을 깔고 손님을 앉혔다. 주로 일본 전통극인 가부키를 무대에 올렸다.

위경혜는 '호남의 극장문화사'(다할미디어, 2007)에서 목포극장의 역사를 상세히 풀어쓰고 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목포극장을 운영했던 손인석의 구술을 참고한 기록이다. 이외 목포문화원에서 발간한 '목포근현대신문자료집성'을 참고할 수 있다. 식민시기 극장에서의 공연이나 영화 상영 선전은 '마찌마와리(町回り)'라고 했다. 영화 제목을 적은 깃발이나 악극단 깃발을 앞세우고 악대와 배우가 그 뒤를 따르면서 작품을 알리는 방식이다. 해방 이후 1960년대까지(기록상으로는 1950년대) 악극이나 창극 또는 영화 상영작품을 선전하는 방식이 남아있었다.

근대극장 운영과 전국 순회 공연

극장을 매개로 한 영화산업도 날로 발전했다. "목포부 죽동에 잇는 목포극장은 목포의 유일한 오락기관으로 유관오씨가 경영하야 오는바 지난 팔일은 동관의 이(2)주년 개관기념일임으로 이를 축하하기 위하야 최저요금으로 명화를 映寫하얏는데...." 1928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 기록이다. "일반적으로 보아서 영화가 착착 발뎐되여 간다함은.....목포극장 안에 모히여 '오리엔탈프로덕순'을 창립하고 조선에 영화계에서 일흠잇는 중요한 배우를 망라하야....." 같은 신문 1927년 5월 17일자 기록이다. 목포에 프로덕션이 탄생했음을 알 수 있는 기사다. 같은 날짜의 기사, "영화상설 목포극장은 대정 십오년(1926년) 십일일 팔일에 개관하여 미국 '유미바-살' 회사와 특약을 하고 '해설부'는 김성두군과 리상근군을 두고....."에서 알 수 있듯이 유니버셜 회사와 특약을 맺기도 한다. 다국적 공연 공간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목포개항백년사'를 보면 전국순회 공연에 대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1922년 7월 목포청년회가 해외의 고학생을 도울 목적으로 '목포활동사진대'를 주최하여 전남 나주와 충남 논산, 공주의 금강관에서 상영하였고, 8월에 들어 대구시의 대공관에서 이틀간 순회 상영하였다. 같은 해 8월 27일에는 전북미선조합의 적성야학교에서 조직한 '문예활동사진대활동'을 상반좌에서 개최하였다. 1923년 6월 전남도청의 지방개량활동사진 순회영사활동을 목포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하였다. 1927년 7월 30일 동아일보 목포지국이 시민위안 납량대회를 개최하여 활동사진인 <작은 어머니>와 <아리조나의 여무자> 등을 목포극장에서 상영하였다." 프로덕션이 탄생하기도 하고 극장을 휴관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은 정황들도 포착할 수 있다.

서남해를 중심으로 확산된 아마추어 공연들

목포상반좌의 소인극이 주목할 만하다. 음악, 무용, 연극 등이 공연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1925년에는 이발업친목회에서도 소인극을 개최하였다. "목포 조선인 이발업친목회에서는 該下 기근동포에 동정하야 각기 비용을 자담하고 금월 일일부터 이일간 당지 상반좌에서 소인극을 개최한다는데 일반 인사는 다수히 관람하여 주기를 희망한다..." 1925년 2월 3일 동아일보 기사다. 1934년에는 국악을 중심으로 하는 '목포예기권번'에서 수해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연극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장소는 목포극장이었다. "목포예기권번에서는 이번에 삼남 지방의 수해구제를 목적으로 조선, 중앙, 동아 삼 지국 후원 미테서 지난 이십칠,팔 량일간 목포극장에서 연극회를 열엇섯는대 대성황을 일우엇다 한다." 1934년 9월 1일 조선중앙일보의 기록이다. 1922년 4월에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에 거주하는 천도교청년회의 소인극단인 해삼위 연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음악, 무용, 연극, 러시아춤과 현악 연주도 곁들여졌다. 지금으로 말하면 불우이웃돕기, 재해나 재난 성금 모으기 공연에 해당되는 셈이지만 당시에는 독립, 민족 문제 등 운동의 측면이 강했다. 무안군에 속했던 임자도(현 신안군) 소년들이 마을에서 소인극을 개최했다는 기사가 눈길을 끈다. 1925년 3월 2일자, "임자소년 연극, 전남 무안군 임자도 소년들은 지난 2월 25일 야에 대기리 김상윤씨 댁에서 '事業(사업)에는 無階級(무계급)'이라는 각본으로 소인극을 행하엿다더라."라는 기록이다. 이들 레퍼토리를 포함하여 아마추어들이 진행한 공연 양식을 소인극이라 한다.

소인극(素人劇)의 유행과 연극운동

소인극이란 직업적 연극에 비해 아무추어에 의해 연출, 제작되는 연극을 총칭하는 말이다. 직장연극, 농촌연극, 청년연극, 학생연극, 학교연극 등이 이에 포함된다. 전문극단과는 달리 일반 대중이 창작과 향유의 주체가 되어 소속집단의 기념일이나 목적에 따라 공연하는 형태다. '한국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의 변천과정'(안광희, 2001)을 보면 관련한 상세 정보를 확인해볼 수 있다. 1910년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던 소인극은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일익을 학생들이 맡게 되면서 구체화되었다. 1920년 봄, 동경에서 유학생들이 '극예술협회'를 조직하고 근대극운동의 시동을 걸면서부터다. 1921년 이후 이러한 연극운동은 보다 구체화 된다.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한 도시 목포가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구사상 타파, 신사상 고취, 풍속개량 등의 주제를 내용 삼았다. 신파적인 공연물을 포함하였다. 청년회의 활동비나 지역의 사회교육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공연된 사례도 많았다. 소인극은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카프계열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1908년생인 김삼규는 영암 출신으로 동경제국대를 졸업하여 1931년부터 카프 서울지부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5년에는 조선예술좌를 설립한다. 소인극운동이 문화사회운동으로 퍼지며 소위 프롤레타리아연극의 일환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각 시군 자료들을 다 추적해보지는 못했지만 대개 섬 단위, 마을단위의 연극들이 유행했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소인극에 대한 기사는 1932년부터 점차 줄어들다가 1936년에는 완전히 신문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현해탄으로 사라진 김우진과 윤심덕을 소환하며

"지난 삼일 오후 열한시에 하관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 련락선 덕수환이 사일오전 네시경에 대마도 엽흘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명과 중년신사 한명이 서로 껴안코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남자는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엿스며.....윤심덕양은 총독부 관비 류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동경음악학교를 수업한 후.....작년 겨울에 다시 극단으로 방향을 뎐환하야 토월회의 녀배우로 잇서섯다.....김우진씨는 목포에서 백만장자의 맛아들로.....동경조도뎐대학 문학과 본과를 맛치고 극에 관한 연구와 조예가 깁흔 청년으로...." 동아일보 1926년 8월 5일자 기사다. 이외에도 연일 대서특필된 기사들을 다수 검색할 수 있다. 당시 김우진과 윤심덕이 우리 사회에 던진 파문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왜 이들이 현해탄에 몸을 던졌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추문과 소문, 심지어는 도피 후 숨어살았다는 설까지 난무했던 것은 이들이 그만큼 우리 공연계와 연극사에 끼친 영향이 컸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김우진의 극작과 활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1920년대 후반 창가의 정착에 기여한 윤심덕이 있다면 1930년대는 목포의 눈물 이난영이 있다. 이뿐일까. 극장과 연극, 공연의 이름으로 소환해야 할 사람들이 주마등을 이룬다. 예기권번에서부터 살롱, 극장까지 차차 소개할 기회를 만들어 보겠다. 이들에 대한 소환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근대극장의 확산과 진전뿐만 아니라 근대기 '살롱문화'에 대한 정황들을 포착하는 데 있다. 여기에는 국악을 포함한 각종 음악회, 연극, 이를 재구성하고 편성한 근대적 장르출현까지 톺아봐야 할 수많은 과제들이 있다. 유명인 염문 따위로 폄하하거나 미화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 내부로 들어와 있는 근대적 양식을 분석하고 성찰해야 할 대상이 필요한 시기다.

남도인문학 팁

목포 근대기의 음악활동과 확산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창가의 양상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서양식의 노래들을 창가라고 하였는데, 이때 윤심덕 등에 의한 유행창가가 완전한 대중음악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래의 민요가 창가의 영향을 받아 신민요로서 대중가요의 영역에 자리하였다. 서양의 재즈와 포크송 등이 국내에 유입되어 대중가요의 다양화에 기여하였다. 종전까지는 창가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어 왔던 모든 가요는 가곡과 동요라는 예술가요와 유행가라고 하는 대중가요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예컨대 목포희성유치원이나 정명여학교 등 학교가 음악회 발표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다. 1925년 양동 기독교여자수양대회에서는 오페라 장르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 음악회의 목적은 대개 기금모금이었다. 기독교 관련 외에는 양악과 국악을 같이 공연하기도 하고, 춤과 음악가극 등이 공연되기도 했다. 국악, 양악이 같이 공연된 예는 목포청년회관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한 신구음악대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춘음악대회나 스포츠와 함께 한 이벤트도 확인된다. 1926년 국악명창대회가 열려 춤은 물론 산조, 민요, 판소리 등 다양한 장르가 공연되기도 했다. 졸업식이나 학예회가 다수 개최되었고 시민 대상 음악회도 자주 열렸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빼놓을 수 없다. 윤심덕을 포함하여 한국가요사의 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가수 이난영(본명 이옥순)은 1916년 목포의 양동 산동네에서 태어나 제주도로 엄마를 찾으러 갔다가 가수의 길을 걷게 된다. 1932년 삼천리가극단 단원으로 정식 데뷔하게 되고 난영이라는 예명도 얻게 된다. 윤심덕은 평양 출생으로 도쿄음악학교 소프라노 전공이다. '사의 찬미'를 발표하여 인기를 얻었다. 목포사람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1926년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1963년경 목포예술제 공연장면-목포예총 제공

1963년경 목포음악발표회-목포예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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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경 목포예술인 공연 장면-목포예총 제공

목포예술제 종합발표회-목포예총 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