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근대목포의 공연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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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근대목포의 공연예술
  • 입력 : 2019. 05.08(수) 13:37
  • 편집에디터

1963년 목포 가족계획 계몽공연-목포예총 제공

유행가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질문이 적절치 않다. 유행가는 특정한 시기에 대중의 인기를 얻어서 많은 사람이 듣고 부르는 노래다. 이 풀이를 적용한다면 유행가 없는 시대가 어디 있겠는가. 시경의 풍요(風謠)으로부터 향가, 고려가요, 근대기의 가요, 지금의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모두 유행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박하게 장르의 하나로 호명했던 것은 근대기 대중가요부터다. 대중가요는 창가로부터 시작한다. 창가(唱歌)는 갑오개혁 이후에 발생한 근대음악 형식을 일컫는 말이다. 서양악곡의 형식을 빌려 지은 간단한 노래라고 풀이한다. 쉽게 말하면 전통 방식이 아닌 서양식 노래 전반을 이르는 말이다. 이후 남도지역에서는 '노래'를 범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까지 했다. 현지취재를 다녀보면 민요를 포함한 근대기의 노래를 창가로 호명하는 예들을 볼 수 있다.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이 창가의 양상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사의 찬미를 불렀던 윤심덕 등에 의해 완전한 대중음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 유행창가다. 전래의 민요 또한 창가의 영향을 받아 신민요로서 대중가요의 영역에 자리 잡게 된다. 서양의 재즈와 포크송 등이 국내에 유입되어 대중가요의 다양화에 기여하기도 한다. 종전까지는 창가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어 왔던 모든 가요가 가곡과 동요라는 예술가요와 유행가라고 하는 대중가요로 확연히 구분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목포권번(券番) 및 유곽, 전통음악의 부침(浮沈)

권번(券番)은 일제 강점기 기생들의 조합을 이르는 말이다. 예기조합이라고도 했다. "목포에 기생연주회, 목포예기 일동은 목포권번의 창립을 기회하야 희락관에서 연주회를 개최하고 본월 4일 밤부터 일주일간 예정으로 밤마다 자기들이 배운 재주를 자랑 하는 바 밤마다 만원의 성황을 이룬다더라." 1921년 9월 10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춤의 명인 이매방 등이 목포권번 출신이니 그 예술적 권위나 맥락들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국악으로 통칭되는 춤과 음악 연주뿐만 아니라 유곽(일종의 요릿집)의 부침이 상당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전통음악의 부침을 기억하는 것이 이후의 전개나 진전에 대한 시선들을 더욱 명료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 판소리 명인들 중 많은 이들이 포장극장(혹은 나이롱극장)류의 유랑공연이나 회갑 잔치 등의 연희 공연에 소비되었던 맥락을 점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류용철이 펴낸 '목포의 옛길을 찾아서'(2009)에 보면 목포 유곽의 발생을 1905년으로 소개하고 있다. "1930년대 금화동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유곽인 주길정, 현해루, 만직지루, 삼교루 등이 있었고, 조선인이 경영하는 유곽으로 일출정, 명월루, 영춘정 등이 있었다. 1936년 목포에는 요릿집이 12개소, 음식점이 336개소, 카페가 20개소, 청루가 7개소였는데 이들 업소에 수용된 도색노예가 모두 435명이었다. 이중 예기(藝妓) 49명 내 조선인 21명 외 여급, 창기, 작부 등이 있었다." 1935년 9월 11일 매일신보의 기록을 보면, 유곽의 인구와 이용현황이 보인다. 조선인 예기가 11명, 일본인 예기가 27명 등으로 나온다. 목포가 개항되면서 인구의 유입이 늘어나자 죽동에 유곽이 생겨 흥청거리다가 주거지가 확장되면서 1913년 일명 사꾸라마찌(櫻町, 금화동)로 옮겨졌다. 이른바 '향락산업'이라고 불리던 사업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만호동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1970년에 이르러 경찰에 의해 해체되었다. 향락산업이라고 폄하되긴 했지만 여기서 연행되었던 공연들을 톺아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국악과 양악이 더불어 공연되었던 시기

음악활동은 학교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다. 학교행사 가운데 음악은 독창, 합창, 기악연주를 비롯해 가극까지 끼어 있었다. 전국학생음악대회나 대한청년회 음악회도 꾸준히 개최되었다. 1955년 9월 6일 목포에 처음으로 음악협회가 발족되었다. 각종 음악관련 대회나 발표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목포희성유치원이나 정명여학교는 이러한 음악회 발표장소로 자주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5년 양동 기독교여자수양대회에서 음악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오페라 장르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 음악회의 목적은 대개 기금모금에 두고 있었으며 기독교 관련 외에는 양악과 국악을 같이 공연하기도 하고, 춤과 음악가극 등이 공연되기도 했다. 국악, 양악이 같이 공연된 예는 목포청년회관을 마련하기 위해 준비한 신구음악대회가 대표적일 것이다. 신춘음악대회나 스포츠와 함께 한 이벤트도 확인된다. 1932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목포부의 구역확장과 개항 삼십 오주년 긔념축하회를 오는 시월 일일부터 삼일까지 성대히 거행하기 위하야 목포부와 목포 각 상공단체에서는 준비에 분망중이라는데 축하회 총예산은 천칠백팔십원으로 부내 각 요처에 긔념탑과 각종 여흥 궁술대회 시가지는 찬란한 장식으로 목포개항 이래 처음 보는 장관을 이루리라 하며..."라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1926년에는 국악명창대회가 열려 춤에서 산조, 민요, 판소리 등 다양한 장르가 공연되기도 했다. '목포개항 백년사' 중 이생연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1926년 조선면작공진회와 전라남도 물산공진회를 축하하는 명창대회가 있었다. 공연내용은 검무, 승무, 북춤, 가야금, 명창, 새타령, 단가 등 다양했다. 출연자는 고채운, 이산옥, 최금옥, 최농원, 김매향, 전춘운, 전채봉, 한소옥, 김산호주, 김영무, 성춘봉, 도초선 등의 국악인과 광대로는 공창식, 박화섭이 있었다. 이외에 졸업식이나 학예회가 다수 개최되었고 시민 대상 음악회도 자주 열렸다.

여성 국극단과 창극의 성행

1960년대 목포는 국극단 공연이 성행하였다. 여성국극단과 악극단의 공연은 유명 영화배우를 앞세운 쇼 공연과 마찬가지로 인기를 누렸다. 흥행몰이는 1950년대부터 일어났다. 부족한 영화 대신 창극과 여성국극단의 공연이 극장 무대를 채운 셈이다. 목포시에서 가장 인기를 누렸던 국극단은 '임춘앵과 그 일행', '박옥진국극단', '진경여성국극단' 등이다. 위경혜가 쓴 '호남의 극장문화사'(2007)를 보면 '임춘앵'이 등장하는 날은 경찰서의 기마대가 출동하는 날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인기가 많았다는 뜻이다. 여성국극을 포함해 협률사라는 이름을 달고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던 것은 서울의 근대식 극장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10년대 초 서울의 대표적인 원각사, 광무대, 연흥사, 단성사, 장안사 중 원각사와 단성사, 연흥사는 주로 판소리, 창극을 공연했고, 광무대와 장안사는 주로 재래의 가무를 공연했다. 물론 다른 장르들도 공연하고 영화도 상영했다. 그런데 판소리, 창극을 많이 공연한 단성사, 연흥사, 원각사가 풍속을 괴란시킨다는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유민영이 쓴 '한국근대극장 변천사'를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때마침 친일재벌 김시현이 운영하던 원각사가 1909년 11월 말 폐지되자 전속 명창들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 중 주석이던 명창 김창환과 연식 간부로 있었던 송만갑이 고향으로 내려가서 각각 '김창환협률사'와 '송만갑협률사'라는 명칭의 창극단을 만들어 1915년경까지 유랑하였다. 남도지역 전역으로 순회공연을 다녔기 때문에 이후 국악 관련 유랑극단을 통칭해 '협률', '햅률'등으로 불렀다.

영산강의 예맥, 남도를 넘어 세계로

1897년 목포개항 이후 창가에서 유행가로, 판소리에서 창극으로, 그리고 극장이며 현대적 공연으로 전개 확장된 예들을 짧은 지면에 다 얘기하기 어렵다. 기억해야 할 수많은 이름들이 있고 이어받아야 할 전통들이 있다. 한 가지 꼭 기억해둬야 할 것은 한 세기를 넘기며 변화발전해온 목포 공연예술이 서남해와 영산강을 젖줄 삼아 전승된 소위 남도문화의 자양분을 먹고 자라 형성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영산강의 예맥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차차 섬진강이며 지리산의 예맥 또한 살피겠지만 이들 공연예술전통이 단순 이입되었던 것이 아니라 시대와 공간들을 부단히 넘나들며 재구성되었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두고자 한다. 근대기라는 새로운 질서와 문화적 배경 속에서 재창조되거나 때로는 뒤틀린 형태로 수렴되었음을 여러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수렴을 굳이 표현하자면 퓨전 보다는 컨버전스라고 할만하다. 한 데 섞여 새로운 장르를 창출하기 보다는 신구가 공존하는 형태로 교직되거나, 섞이지 않고 공존하는 형태로 발전되어 나왔다는 뜻이다. 현 단계의 남도음악들을 기획하고 재구성할 때 주목해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바라는 것은 그간의 목포 공연예술에 관여된 단체와 명인 명창들의 궤적들을 주목하고 존중할 필요다. 일제강점기에 공연되거나 민족동란기에 공연되었던 민족적이고 이념적인 공연들도 그 대상이다. 듣자하니 진도출신 가수 송가인이 트롯트 대회에서 일등을 했다 하더라. 어머니는 씻김굿 무녀이고 본인은 판소리를 전공하였으나 가요계로 진출하여 성공한 사례다. 목포의 눈물 이난영도 본디 민요가수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영산강 예맥의 큰 흐름들을 짚어볼 수 있겠다. 남도의 음악이 세계로 크게 뻗어나가기를 기대한다.

남도인문학팁

여성국극과 창극이 떠난 자리, 쇼공연이 이어받아

위경혜는 이 시기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950년대 영화와 비슷하게 또는 그보다 더 무대에서 인기를 누렸던 것은 여성국극과 악극, 그리고 쇼 공연이었다. 여성국극단 가운데 호남에서 가장 인기를 누렸던 것은 '임춘앵과 그 일행'이다. 50여 편의 작품에서 모두 남성 역할을 맡았던 임춘앵(함평 출신)은 승무와 검무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특히 삼고무에서 구고무까지 선보여 관객을 놀라게 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대중에게 사랑받았던 악극은 1950년대 가장 많은 단체가 생겨났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는 창극과 악극이 주요 무대에서 사라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 자리는 일명 '쇼'라는 타이틀 공연이 대신하였다. 쇼 단체 공연은 무대가 넓었던 남일극장에서 자주 열렸다. 목포시를 자주 방문하여 인기를 누렸던 단체는 박종구의 '라이온 쇼'가 대표적이었다. 1970년대 및 1980년대 목포를 자주 찾았던 가수는 역시 남진과 그의 라이벌 나훈아였다. 이들 공연에는 극장이 터져나갈 만큼 많은 인파들이 모였다. 이벤트도 많이 열렸다. 목포극장과 평화극장, 남일극장에서는 '미스목포 선발대회'가 열렸다. '목포 예술제', 연극발표회 등도 보인다. 1960년대 목포시 소재의 극장들은 영화와 악극, 그리고 쇼 등 대중오락을 경험하는 공간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교양을 갖추고 계몽적인 교육을 받는 공간이기도 했다.

1963년 목포 가족계획 계몽공연-목포예총제공

1965년 목포극장 제7회목포예술제-목포예총제공

1971년 무렵 목포예총공연-목포예총제공

1971년경 3고무 공연-목포예총 제공

1972년 목포예술제 가곡 피아노-목포예총제공

1972년 목포예술제-목포예총제공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