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품격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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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
고품격의 정치
  • 입력 : 2019. 05.13(월) 15:29
  • 박간재 기자

 612년. 고구려 영양왕 때 수나라 양제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적장 우중문은 30만 대군을 앞세워 살수를 건넜다.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이 이들 앞을 막아섰다. 우중문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의 신기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다하였고/기묘한 헤아림은 땅의 이치를 통하였네/싸움에 이겨 그 공이 이미 높으니/만족함을 알고 그만두기를 바라노라'

 우중문의 신기한 책략과 기묘한 계책을 잔뜩 칭찬하고 있지만 '네가 수나라의 위대한 장수인지 모르나 넌 여기선 어림도 없어'라는 패기가 담겨 있다.

 문장 어디에도 직접적인 비난과 힐난이 없다. 반어적·풍자적 비유를 곁들이며 한껏 야유와 조롱을 보낸 글이다. 격분한 우중문은 30만 대군과 함께 살수를 건넜지만 살아 돌아간 병사는 2700여 명에 그쳤다. 불리한 상황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그의 호기와 담대한 패기가 느껴진다.

 645년. 당나라 두번째 황제 태종 이세민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안시성을 침공했다. 성주 양만춘과 군·민은 결사항전을 펼쳤다. 눈에 화살을 맞은 이세민이 패배를 인정하고 퇴각할 즈음 믿기 힘든 장면이 벌어졌다. 양만춘이 성루에 올라 이세민에게 큰 절을 올리며 작별을 고했다. 이세민도 성을 지키며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 양만춘에 비단 100필을 선물하며 격려했다.

 배수진을 치고 싸웠지만 상대 적장을 예우할 줄아는 고품격을 갖췄다.

 2019년. 1500년 전 보다도 못하는 저급한 행태가 펼쳐지고 있다. 자유한국당이 장외투쟁을 하며 비판수위를 높이고 있다. "독재타도" "좌파독재"를 외친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단어를 쏟아내는 등 '아무말 대잔치'가 극에 달하고 있다.

 반공시대 웅변하듯 외친다고 지지자들이 모이지 않는다. 대안을 제시하고 유머와 조크를 곁들이며 국민의 마음을 파고들줄 아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적국 황제에 큰절로 예를 갖춘 양만춘이나, 품격높은 비유와 풍자로 적장을 한방에 보낸 을지문덕의 대국적 스케일 정도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 차기 지도자가 되겠다는 대표가 국민에게 어필하는 방법이 전라도 말로 '하도 짠해서' 해본 얘기다. 박간재 경제문화체육부 부국장

박간재 기자 kanjae.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