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여수 영당(影堂)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여수 영당(影堂)
  • 입력 : 2019. 05.29(수) 14:16
  • 편집에디터

2006. 11. 26-여수영당 조사사진

여수 국동 영당은 우리나라에서 이순신 장군을 신격(神格)으로 모신 유일한 당산(堂山)이다. 도서해안지역에서는 줄여서 당(堂)이라 한다. 표지판에 간략하게 영당의 역사를 기록해두었다. "예부터 바다를 수호하는 해신당으로 1443년 단을 두어 고려 충신 최영 장군을 모셨다. 임란 후인 1763년 사당(해신당)을 건립,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벽으로 녹도만호 이대원, 정운 장군 영정을 같이 봉안하고 풍어제 및 용왕굿을 행해왔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영정이 철폐되고 당우는 1976년 국동어항단지 조성사업으로 해체되었다. 1980년 향토민속문화보존회가 당의 옛터에서 풍어제의 재현을 계기로 1982년 현 당우를 복원, 영정을 봉안하여 다시 풍어제가 열리고 있다. 이곳의 풍어제는 제3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표지판의 내용대로라면 영당의 역사가 15세기 이상으로 소급된다. 본래 영당은 여수 어민들의 해신당(海神堂)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당집이나 해신당이 그렇듯이 관련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술사적 성격 때문에 민속자료의 역사나 전통을 연대기적으로 고찰하기 난망하다. 다행히 몇 군데 기록을 찾아 고증한 바 있다. 어민들이 출어할 때면 항상 영당에 쌀 두말씩을 바치고 갔다는 고 정홍수의 증언은 구술사라는 측면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여수 국동 영당의 신격은 누구였을까

충무영당의 신격은 본래 최영이었다가 충무공 이순신으로 바뀌었다. 표지판의 내용이나 현지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임란 이후 바뀌었다고 하지만 구술자료 외의 기록 자료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1943년 일제에 의해서 강제 철거되기 이전의 사진자료를 참고해볼 수 있다. 이은상의 '태양이 비치는 길'에 수록된 사진이다. 이 당시의 신격은 충무공 이순신 및 녹도만호 이대원, 정운 장군이다. 가운데 이충무공은 무신(武神)이 아닌 문신(文神) 차림이다. 이 사진만으로 이순신의 배향 시기를 확정하기는 힘들다. 나는 이러저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어 논문을 쓴 바 있다. 1900년 영당의 기록을 비롯해 1942년 영당의 기록까지는 이충무공을 중심으로 한 영정이 있었다. 이에 대한 배향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각종 구술 및 이은상의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영정(影幀)은 1943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된다. 다행히 1933년 이우헌이라는 사람이 사진자료를 남겨 정황을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우헌은 영당이 일제에 의해 폐당(閉堂)되면서 이 땅을 불하받았던 사람으로 재력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관련 기록은 당시 연구책임자였던 목포대의 이경엽교수 외 연구자들이 단행본으로 출간한 바 있다.

여수 영당의 폐당과 신청이 관여한 풍어의례

"근디 1943년 일제가 그때 해체를 해부렀지. 긍께 대동아전쟁 일어나기 전후야. 항시 민중들이 모여가지고 그런 행사를 하기 따문에 자기들로서는 굉장히 불안허고, 집단 행위가 있을 우려가 있고, 또 유독히 축제를 통해서 의식 같은 것이 강해 지잖어요? 결집력도 있고. 그러니께 결집관계, 민족의식관계 결국 그것을 막기 위해서 관원들이 해체를 한 것이지." 남도지역 향토사와 국악사에 큰 기여를 하였던 고 정홍수의 진술이다. 조선 사람들의 결집과 애국심 발현을 저지하기 위한 일제의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폐당 이후 당에 지내던 의례도 단절되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여수 신청(神廳)의 대방(大房)에 의해 영당이 지속적으로 관리되어왔다는 증거들이 있다. 신청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꾸려진 무속인들의 연합체를 말한다. 박황이 펴낸 '판소리 이백년사'(1987)에 보면, 신청을 이렇게 설명해두었다. "신청은 조선후기 국가 관할에 의해 무인들에 의해 조직된 예능집단을 말한다. 이들 예능인들의 관허의 무계를 조직한 무단의 본부와 기관을 전라도에서는 '신청'이라 하고 경기도와 이북지방에서는 '재인청'이라 하였다. 이 신청은 전라도 각 고을마다 있었으며 전주, 남원, 광주, 나주, 장흥의 신청이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다. 이 신청의 장을 대방(大房)이라 하고 대방 아래 도산주 2명을 두었으며, 그 밑에 집강 4명, 공원 4명, 장무 2명을 두었다." 여기서 각종 의례와 연희, 교육 등이 이루어졌다. 1975년 여수 국동어항단지 조성으로 영당이 완전히 폐쇄되기 이전까지 풍어제를 지속한 기록과 구술 자료들이 이들에게 남아 있다. 관련된 기록 중에 영당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957년에 발간된'麗水市誌附錄(여수시지부록)'의 사진이다. 훼손되어 어렴풋하게 보이긴 하지만 여수영당의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다. 일제의 강제 철거 이후에도 어민들이나 신청 대방들에 의해서 영당이 관리되고 풍어제가 재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다. 신청의 대방에 의한 관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점은 여수신청의 마지막 대방인 방종선의 구술에 의해 확인된 바 있다. 이때의 풍어제의는 여수지역의 당골들이 주도하거나 참여하는 전형적인 풍어굿 형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을 거친 영당은 결국, 1976년 국동어항단지 조성으로 완전 철거되면서 풍어굿을 중심으로 연행되던 당제도 일시 단절되었던 것이다.

여수 영당의 복원까지

1979년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영당풍어굿이 복원되었다. 1980년에는 여수지역 향토민속보존회가 결성되었다. 2년 후인 1982년 현재의 당집이 복원되었다. 고 정홍수 등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지금의 자리가 본래의 영당터로 고증되었다. 이곳은 예로부터 당두 곧 '당머리'라 불려온 곳이다. 당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직접적인 증거다. 지금도 당머리 찻집 등 이 지명을 즐겨 사용하는 예들을 볼 수 있다. 여수지역의 유사 지명들이 있다. 닭머리(鷄頭: 남산동, 화양면 안포리 세포마을 끝), 쇠머리(牛頭: 돌산읍 우두리), 용머리(龍頭: 남면 유송리 북서끝) 등이다. 모두 어업 의례와 관련된 곳들이다. 나는 이를 '당'이라는 접두어의 또 다른 형태로 본다. 이후 당신격(堂神格)은 고래의 자료들을 고증해 보완했다. 해체 이전의 3위 신격에 본래의 신격이던 최영 1위를 더하게 된 이유다. 총 4위의 인격신을 모시게 된 것. 좌측에 용왕신, 우측에 산신을 모시는 형태로 정비되었다. 고증의 아쉬움은 영험설화다. 예컨대 여수지역 온동마을 당산이나 항호 마을의 당산, 초도리 대동마을 염씨당 등에 관한 영험설이 전해온다. 영당은 이것과 대조적이다. 온동마을 당산의 영험설화는 여순사건 때 반란군 혹은 반대편의 군인들이 마을 사람을 동네 앞에 모아놓고 마을 뒤 본당에서 기관총을 걸어놓고 쏘려고 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총알이 나가지 않아 도망칠 수 있었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항호마을의 영험설화는, 일본 순사가 긴 칼을 차고 당집을 없애고 신사를 모시려고 올라가다가 넘어져 목이 끊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여수지역 수산사의 핵심인 임진왜란과 여순사건에 대한 주민들의 대응방식이 설화라는 구성을 통해 드러난 사례다. 여수영당이 복원되어 거북선축제 등의 중요한 요소로 기능하고 있지만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영험설화의 부재다.

여수영당과 도시경관의 함수

엑스포 후 여수밤바다로 일약 유명해진 여수의 정체를 되물을 시기가 되었다. 전주 한옥마을이 그렇고, 인천을 포함한 군산 근대도시가 그러하며 조만간 목포의 원도심이 그러할 것이다. 이른바 역사적 장소 혹은 인문학적 장소란 무엇일까. 주종대가 쓴 '문화관광론'에 의하면, '장소'는 인간작업의 소산물이나 자연의 공동노력의 소산물, 역사적, 심미적, 민족학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닌 고고학적 장소를 포함하는 지역을 말한다. 가까운 과거로 보면 1970년대부터 시작된 여천석유화학단지의 개발로 인해 여수시의 도시화가 가속되었고 이것이 동인이 되어 공업도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석유화학중심의 연천산업단지는 항구로서의 지역적 위치가 갖는 이점을 최대한 발휘하여 우리나라 석유화학 최대의 공업단지로 성장하였다. 에틸렌 생산액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석유화학 생산량의 53%를 차지한다. 본래의 수산업도시라는 이미지에 화학공업도시라는 이미지를 덧입히는 계기였다. 다행히 여수밤바다로 리포지셔닝 되긴 했지만 짧은 역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 수 없다. 호국성지의 전통적 이미지에 일제강점기 이후의 수산업의 이미지로, 근대 이후 화학도시의 이미지로, 오늘날 다시 여수밤바다의 이미지로 변신을 거듭해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칼럼에서 다루었던 비보풍수가 인문경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화학도시의 이미지를 비보하는 경관과 일제강점기의 수산업을 상보하는 이른바 도시경관들을 어떻게 추출하고 배치하거나 설계했는지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겠다. 지금은 국동항 한쪽에 매우 쓸쓸하게 자리해있는 영당을 다시 톺아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컨대 도시재생이란 이름으로 들썩이는 도시들, 가깝게는 전주, 군산과 나주, 목포 등지가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오래된 것이 좋다는 이른바 전통의 고수를 주장하는 것 아니다. 연암 박지원이 말했던 법고창신(法古創新)을 말하려 함이다. 민속이든 장소든 경관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진행되는 것이다.

남도인문학팁

여수 영당의 역사

1900년 '湖南麗水邑誌'와 '順天續誌 書院祠廟', 1902년(光緖28)의 '麗水誌' 등을 전거하여 확인할 수 있다. 이외 1942년 발간된'여수지' 및 '여수향토사', '전라남도 여수읍지', '여수대관' 등에 유사한 형태의 기록들이 보인다. 연도는 달라도 내용은 호남읍지를 인용하거나 참조해서 기록한 것들이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여수영당이 관청(府)의 동쪽 삼십리에 있거나 군의 남쪽 5리에 있고, 이충무공을 배향하는 영당이었으며 충무공의 영정이 영당 안에 걸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의 자료로 1927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 기사, "觀光資源"이라는 제목을 살펴보면, 충무공을 배향하는 영당이 관광지 중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7월 15일자 발행의 <호남평론>에 실린 "忠武公影堂"이라는 한시도 참고한다. '麗水 鄭汕人'이라는 사람에 의해 쓰인 이 시는 여수에 충무공을 배향하는 영당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충무공을 국가적으로 배향한 곳은 충민사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忠愍祠는 順天 左水營 동문 밖 5리 되는 곳에 있고 충무공 李舜臣을 향사하였는데, 水使 李億祺와 寶城郡守 安弘國을 배향하였다." 현재의 충민사와 여수영당이 각기 다른 곳에 있었지만 이충무공을 배향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맥락이 같다. 충민사가 국가적으로 배향된 의례공간임에 비해 여수 영당은 민중들에 의한 자발적 의례공간이자 놀이공간이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여수시지부록

전라남도 여수읍지

호남여수읍지

옛 영당 사진(이은상, 태양이비치는길로 삽화-252쪽)

여수 영당 옛 신격 사진(1933년 촬영된 사진으로 1943년 일제에 의해 해체되기 전까지 걸려있던 영정)

옛 영당풍어굿 사진(1996년 5월 6일)

영당풍어제(1981년 5월)

2006. 11. 26-여수영당 조사사진

여수 영당 현재의 영정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