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청암 김성권을 통해 보는 고수론(鼓手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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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청암 김성권을 통해 보는 고수론(鼓手論)
  • 입력 : 2019. 06.05(수) 13:56
  • 편집에디터

청암 김성권 선생의 생전 공연모습.청암판소리고법보존회 제공.

일고수 이명창, 암고수 숫명창

"북치는 맛은 뭐니뭐니 해도 명창들이 할 때 신바람이 나지. 못하는 사람한테 북을 치면 답답하고 짜증나고 그래. 북을 궁글려 버리고 싶은 심정이제. 북은 소리에 따라 북이 소리를 내는 것이야. 이런 말이 있어. 일고수 이명창,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고수가 잘 쳐줘야 소리를 잘 할 수 있다 이런 뜻이지" 명고수 청암 김성권의 구술이다. 판소리 창자의 '소리길'을 도와주는 것이 고수의 일차적 역할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판소리를 진행하는 것을 '소리를 가지고 간다'고 표현한다. '일고수'라 함은 예컨대 소리를 잘 가지고 가지 못하는 창자들을 고수가 이끌 수 있어야 한다. 완급(緩急)을 미세하게 조절하기 위해서 템포를 밀고 당기는 역할을 고수가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장단을 맺고 푼다고 말하는 것은 소리가 맺으면 거둬주고(템포를 미세하게 당겨주고) 소리가 급해지면 늘여주는(템포를 미세하게 이완시켜주는) 것을 말한다. 암고수 숫명창이라고도 한다. 어라? 대개 창자가 여성이고 고수가 남성인데 반대로 생각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창자와 고수의 관계를 대칭적인 맥락으로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소리와 북이 서로 밀고 당기는 기술이라고 이해하면 보다 쉽다. 이 밀고 당김이 상당한 긴장감을 유발시켜 소리를 소리답게 한다. 그것이 판소리다. 우열의 문제나 상하의 문제가 아니다. 이 겨루기 기술을 김명환은 고법(鼓法)이라 했다.

판소리에 왜 추임새를 해야 할까? 끼어 넣기와 겨루기의 교섭 장치

나는 졸고 '민요의 혼자 부르기와 여럿이 부르기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끼어 넣기와 겨루기의 교섭 장치를 분석한 바 있다. 이 메커니즘이 민요뿐 아니라 판소리 등 전반적인 노래 양식의 예술성으로 정착되었다고 봤다. 판소리처럼 가창의 역할이 일인에게 주어져 있든, 남도잡가의 경우처럼 선창자들에게 주어져 있든, 향토민요처럼 공동의 참여자들에게 분담되어 있든, 이 판을 이끄는 토대 혹은 배경(컨텍스트)은, 모두가 참여하고 모두가 운영하는 소리판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소리판의 컨텍스트는 항상 공동의 참여자들이 일구어내는 공동의 장이며, '소리판'이라는 무대 안에서 마치 씨름판을 벌이듯 소리 양식을 전개시켜 왔다. 향토민요와는 다르게 전문 소리꾼들에게 판의 역할이 위임된 장르일수록 추임새 등으로 간접 참여하는 변화가 있다. 추임새를 반드시 해야 하는 판소리가 그렇다. 끼어 넣기와 겨루기가 여기서 일어난다. 나는 이를 '난장성'과 '시나위성'이라고도 말한다. 노래방에 가서 돌아가며 노래를 할 때 이 메커니즘이 강하게 나타난다. 민요에서는 이를 '벽돌림 노래'라고 한다. 예컨대 난장성이 강화되면 노래의 주체는 '모두'가 된다. 어떤 이가 노래를 주도하거나 우선권을 가지려고 하면 그때부터 겨루기가 일어난다. 판소리는 이 겨루기를 통해 소리를 잘 하는 특정인에게 소리를 위임한 형태라는 것이 내가 세운 '겨루기와 끼어 넣기'의 이론이다. 지금 주요 방송에서 행하는 노래 겨루기도 모두 이런 메커니즘과 다르지 않다. 중국 소수민족 중에 이 노래겨루기를 통해 배필을 정하고 결혼한다는 점, 연전에 소개한 바 있다.

청암 김성권을 통해 보는 반주와 지휘의 차이

판소리사에 남을만한 고수들이 많다. 김성권의 고법 특징에 대해서는 제자 임영일이 김명환과의 비교를 통해서 분석한 바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내가 발표했던 논문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청암의 고법은 반주자와 지휘자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김명환과 김동준이 적절한 비교 사례다. 김명환의 고법은 지휘를 선호하는 경우다. 소리의 완급을 좇아가기보다는 북의 완급이 더 심해 오히려 소리가 고법을 좇는 양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김동준의 고법은 반주를 선호하는 경우다. 김명환이 완급의 수위를 이끌고 나가는 반면 김동준은 창자의 호흡에 따라가는 패턴을 취한다. 김성권의 고법은 어떨까. 리듬의 급격한 완급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평탄한 고법을 구사한다. 창자가 편안함을 느끼면서 자유롭게 소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고수다. 추임새 등을 통해서 창자의 기를 북돋우거나 재담을 잘하는 장기도 있다. "나는 무대에 올라가면 재담이 절로 나와. 그저 평범하게 얘기를 하는데도 관객들이 웃어쌓더라고. 그런 사이에 긴장도 풀고 무대 분위기도 만들어가고. 그러니까 고수와 소리꾼이 하는 재담이지. 억지로는 안돼야" 생전의 청암이 즐겨 말하던 부분이다. 반주 형태를 선호하는 고법이라는 의미다.

청암 김성권과 남도의 고수들

청암은 김채만의 수행고수로 알려진 박선행으로부터 고법을 익혔다. 이후 호남국악학원에서 고법을 가르쳤던 성원목(명창 성창순의 부친)으로부터 고법의 법통을 보완하였다. 이것이 박시양 등 현재의 제자들로 이어졌다. 박선행->(성원목)->김성권->박시양, 송종호, 이명식, 윤진철 등으로 이어졌다. 주지하듯이 고법과 관련한 전설적인 명고들의 행적은 부분적으로만 보고되어 있다. 판소리처럼 가락의 특징이라든가 계보적 맥락이 충실하게 보고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단편적인 고수의 행적들을 살펴본다. 권삼득의 수행고수로는 가왕 송흥록의 부친인 송첨지가 거론된다. 송흥록의 수행고수는 동생인 송광록과 주덕기를 들 수 있다. 박기홍의 수행고수는 박지홍, 모흥갑의 수행고수는 주덕기를 거론한다. 박만순의 수행고수는 이날치, 이날치의 수행고수는 박판석이었다. 고종 말기와 일제강점기의 명고수로는 강경수, 신찬문, 박판석, 오수관, 오성삼, 주봉현, 신고주, 한성준, 이흥원, 지동근, 정원섭 등이었다. 일제말기에는 김재선, 이정업, 김명환, 김득수, 김동준, 한일섭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완도, 강진, 보성, 고흥 등지에서 고수로 활동하던 사람들로는 김연수의 수행고수였던 송의종과 벌교에서 활동하던 윤석강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독보적인 존재는 한성준이다. 아마도 고법사에서 한성준과 김명환이 중요한 기점들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 큰 이의는 없을 듯하다. 고흥 출신의 고수 오성삼을 거론하기도 한다. 김명환은 '북을 치는 법'이란 뜻의 '고법'개념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자세론, 고장론, 연기론 등으로 분화시켜 설명하거나 그 이론을 세웠다. 그래서 지금은 '고법'이라고들 한다.

판소리와 고수는 일체이형(一體異形)의 한 몸

지금까지는 판소리의 반주 역할이 주 임무였기 때문에, 고수들의 삶이 조명되거나 예술적으로 분석된 사례가 없거나 있었더라도 적었다. 판소리 수업의 일환으로 여기기도 하고 판소리 창자로 나서지 못할 상황-목이 좋지 않다든가-이 생기면 고수로 전업하는 사례들이 빈번하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개의 고수들이 이런 맥락 속에서 '고수의 길'을 걸어왔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판소리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고수의 길을 택했다는 식으로 일반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 다른 정황들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권의 생애를 통해 고수들의 삶과 고수의 길에 대해 생각해 본다. 판소리는 일찍부터 계보를 형성하여 전승되어 왔고 그 계보를 따라서 명인명창들을 구분하는 법이 생겼다. 그러나 고법에는 아직 명료한 계보형성이나 그것을 통한 명고들을 구분하는 법이 생긴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고법 자체가 판소리에 예속되어 있는 부대예술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고법은 판소리 없이는 홀로 존재하기 어려운 장르다. 존재의 이유가 판소리에 있다. 판소리는 고법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판소리에 주된 기능이 있는 것이고 고법은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이형의 한 몸이라는 역할론에 큰 변함이 없다. 고수와 창자간의 관계를 흔히 암고수 숫명창이라고 하는 것도 그만큼 소리와의 대칭성을 강조한 표현이다. 고법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어야 판소리사가 온전하게 자리매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법이 중요무형문화재 제59호 '판소리고법'으로 지정되었다가 1991년 해제되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에 통합된 것 또한 판소리와 불가분의 관계임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판소리 북에 법도(法道)가 있다. 고수(鼓手)는 고수(高手)다.

남도인문학 팁

청암 김성권의 생애

1926년 5월 25일 완도군 신지면 월양리 678번지에서 출생했다. 호적에는 1929년으로 나와 있지만 여러 정황을 분석해보면 1926년생이다. 1939년 13세, 김채만의 수행고수였던 박선행으로부터 판소리 고법을 지도받기 시작했다. 부친 김동욱의 강권으로 일본 외삼촌에게 보내져 중학교를 다닌다. 부친 김동욱은 협률사를 운영했다. 1940년 14세, 2월 30일 부친 김동욱(호적명은 김동수)이 타계하여 귀국하게 된다. 1942년 16세, 귀국하여 보성 정응민에게 소리를 배운다. 1945년 19세, 약 3년 동안 고성암에서 정권진에게 소리를 배운다. 실제는 동년배인 정권진에게 소리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1946년 20세, 조부 김길태가 사망한다. 호주가 되어 집안일을 떠맡게 된다. 강진 칠량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는다. 1951년 25세, 5년간 광주의 호남국악원을 다니면서 소리와 고법을 배운다. 소리는 당시 원장이었던 공대일(공옥진의 부친)에게, 고법은 성원목(성창순의 부친)에게 배운다. 수강료는 쌀 한 말 등 곡식으로 대신했다. 1954년 강진군 도암면 석문리 김삼림과 혼인한다. 혼인신고는 나중에 했지만 장남 광훈의 출생이 1955년이므로 그 이전에 혼인했다고 생각된다. 1955년 29세, 성원목에게 본격적으로 판소리와 고법을 배운다. 1960년 34세, 광주 시내를 전전하며 소리선생, 북선생 역할을 한다. 갖가지 행사에 고수로 활동한다. 서울로 올라가 명창 정광수의 수행고수로 활동한다. '성래만한 북이 없다'라는 칭찬을 들었던 시기다. 모색기를 거쳐 1964년 활동기로 들어선다. 1964년 38세 판소리 무형문화재 지정 당시 문화재관리국 지정고수로 활동한다. 박봉술, 박초월, 박녹주, 송순섭 등의 고수로 활동한다. 1979년 53세, 본적을 광주시 동구 계림동으로 옮긴다. 1994년까지 약 10연간 전남도립국악단 고수로 활동한다. 1991년 65세,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된다. 2006년 동리국악대상을 수상한다. 수제자 박시양을 비롯해 윤진철, 김대규, 송종호, 이원우, 조기만, 이명식, 박치현, 임영일, 정덕채, 이준수, 최덕림, 김재일 등의 제자를 양성한다. 고제단가 판소리도 전수한다. 2008년 81세, 광주에서 숙환으로 타계했다.

지난 2013년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 크라운-해태제과 임직원 100명이 판소리 효(孝) 공연을 펼치고 있다. 뉴시스

지난 2013년 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 크라운-해태제과 임직원 100명이 판소리 효(孝) 공연을 펼치고 있다.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