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왜덕산 사람들과 교토 귀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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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왜덕산 사람들과 교토 귀무덤
  • 입력 : 2019. 07.17(수) 13:14
  • 편집에디터

2018년 9월 교토 코무덤 위령제 장면. 이윤선 촬영

적장(敵將)의 후손들이 진도를 찾는 이유

2006년 8월 15일 광복절이었다. 일군의 일본인들이 진도를 방문했다. 일본 수군의 후손들이라고 했다. 임진왜란 때의 수군을 말한다. 방문단은 일본의 시코쿠(四國) 에히메(愛媛)현 출신들이었다. 명랑해전에서 왜군을 지휘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 현창 사업회 임원과 수도대 학생들. 이즈음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매해 방문이 이루어졌다.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조상들을 찾아온다는 것. 그들의 조상이 진도에 묻혀있기라도 한 것일까?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2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진도신문의 박종호 기자가 잘 정리해두었다. 당시 80세였던 이기수 옹의 제보로 왜덕산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명량해전이 있었던 울둘목 인근의 마을,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 아마도 1960년경이었을 것이다. 뒷산을 개간하다 사람 뼈가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산 이름이 왜덕산인 것부터가 수상했다. 왜인들과 관련이 있을 성싶었다. 진도의 향토사학작 박주언씨가 관심을 갖고 추적해봤다. 여러 곳을 답사하고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도 정리했다. 이 사실을 '진도사람들'이라는 잡지에 소개한 것이 2004년이다. 이후 '아름다운 여행 진도'에도 소개되면서 세상에 더 알려지고 행정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켜 일부 발굴조사까지 이루어진다. 왜덕산이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왜군들을 묻은 곳인가?

왜덕산(倭德山)에 전해오는 이야기

왜덕산이 위치한 곳은 진도군 고군면 북동쪽이다. 산 아래는 내동리와 마산리가 있다. 향토문화사전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왜덕산은 일본 수군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이다. 명량대첩 때 일이다. 이순신 장군의 군대가 일본 수군을 이겼다. 12척의 배로 무려 133척을 물리친 해전사상 초유의 일이다. 대패한 일본군의 시신 100여구가 내동리 마을 앞으로 떠밀려 왔다. 주민들은 어떤 이유인지 이 시신들을 거두어 묻어주었다. 그 후로 왜덕산이라고 불렀다. 왜군(倭軍)에게 덕(德)을 베풀었으므로 왜덕산이라고 한다." 반대로 왜군이 덕을 베풀었다는 해석도 가능할까? 그럴 정황이나 맥락은 전무해 보인다. 왜덕산은 높지 않은 언덕이고 완경사면은 밭이다. 앞쪽은 진도의 동남해다. 한해륙의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접점이기다. 명량대첩 현장에서 가깝다. 묘지는 개간 과정에서 일부 유실되었다. 현재는 50여기가 남아 있다는데 내가 답사한 바로는 구체적인 묘지들을 확인하기 어렵다. 마을사람들은 기와를 굽던 장소(기와 瓦)라는 뜻에서 '와덕산'이라고 한다. 왜구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부 지도에 '와덕산'으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왜 왜구와 연결시킨 이야기가 전해져 온 것일까? 박주언씨의 제보를 전해들은 히로시마 수도대 히구마 다케요시 교수가 구루시마 후손들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깜짝 놀란 일본인들이 진도를 찾게 된다. 당시 진도군은 물론 전남도까지 나서서 위령탑 건립과 추가 발굴 작업을 벌인다 했다. 어찌 진행되었는지 이후 상황은 체크하지 못했다. 왜덕산에 전해오는 이야기는 사실일까 아니면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일까.

물에 빠져죽은 이를 처리하는 방식

왜덕산의 공동묘지에 묻힌 이들이 왜인들인지 아닌지는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왜구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는 것, 백여 명에 가까운 이름 없는 사람들이 묻혀있다는 것 정도다. 이들 무주고혼의 정체는 뭘까? 알려진 대로 명량 앞바다에 밀려온 수사자(水死者)들을 진도사람들은 왜 거두고 묻어주었던 것일까? 이야기대로 한다면 조선이 없어질 수도 있었을 중차대한 전쟁의 적군들 아니었던가? 백번 양보하여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라 하더라도, 이 설화의 유포자들은 왜 적군에게 은혜를 베푸는 방식의 공동묘지와 전설들을 고안해낸 것일까? 또 다른 측면이 있다. 해안이나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익사자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이 그것이다. 이른바 물에 빠져죽은 이를 대하는 초혼제(招魂祭), 수륙재(水陸齋), 위안제(慰安祭), 여제(癘祭) 등의 방식이다. 관련하여 김효경이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水死 관련 신앙의례 고찰", 한국무속학 제24집, 2012). 수륙재나 위안제는 물에 빠져죽은 당사자에게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고 여제는 수사한 존재를 악귀로 간주하여 베푸는 제사다. 바닷가의 사람들은 바닷물에 떠밀려 오는 시신을 마주치면 반드시 건져내어 매장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냥 보내는 것은 시신 유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시신의 머리와 다리 방향을 봐서 수습할 것인가 그대로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고 매장을 점치기도 한다. 무연고 시신을 거두어 매장하는 것은 선행에 속하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원귀를 예방한다고 믿었다는 것. 이것이 진도를 비롯한 섬지역에서 수사자의 원귀를 해원하는 굿들이 발달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우위를 갖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진도사람들이 명량해전에서 죽은 왜인들의 시신을 거둔 이유가 혹시 여기 있지 않을까? 왜구들이 다시 원귀가 되어 해칠 수 있다는 염려 말이다.

수많은 죽음들을 거두어 낸 명량의 바다

해석이야 달리 할 수 있다. 보는 입장에 따라 처한 환경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이래 수많은 죽음들을 한 목에 담아낸 명량의 바다는 보태고 뺄 것이 없는 팩트다. 이 장소와 관련한 원삼국과 삼국시대 이야기는 전설로 남아 있으니 논외다. 고려 이래 몽골의 침입과 삼별초 항쟁에서 죽어간 사람들 이야기는 전설이 아닌 역사다. 울둘목 명량해협이 바로 삼별초의 주둔지였던 용장산성 앞바다라는 점에서 그렇다.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왜덕산의 앞바다이기도 하다. 명량해전으로 불리는 임란의 전투는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인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열 두 척으로 133척의 왜구를 물리친 역사가 결국 조선을 구하지 않았는가.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충무공 이순신의 고백이 사실은 여기서 나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역사가 얼마나 소중했으면 후세들은 왜선의 수를 300척, 혹은 더 이상으로 늘려 조상들의 무용담을 즐겨하였을까. 그만큼 명량해전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동학 이야기도 마지막 전투 장흥 석대들에서 끝나지 않는다. 석대들에서 죽지 아니하고 섬으로 섬으로 도망갔던 무리들이 마지막으로 잡혀 처형된 곳이 진도이기 때문이다. 진도 동학수괴 유골과 관련한 정보는 따로 지면을 할애해 소개하기로 하겠다. 우리 국토 중에서 명량의 바다만큼 역사 이래의 죽음들을 받아낸 곳이 또 있을까싶다.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라는 문학적 수사를 동원해 진도의 씻김굿이며 만가며 다시래기 등 상장례를 설명해오고 있다.

교토의 코무덤(귀무덤)으로 간 왜덕산 사람들

2018년 9월 교토의 코무덤 앞에서 평화제라는 이름의 혼령제가 열렸다. 주최는 놀랍게도 진도 왜덕산 사람들, 향토사학자 박주언을 중심으로 하는 일군의 진도사람들이었다. 4년째 개최하고 있다고 했다. 재일 한인들이 합세했다. 혼령을 씻기고 달래는 의례에서부터 각양의 몸짓과 노래들이 연행되었다. 코무덤은 무엇인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조선 민남녀의 코와 귀를 베어가 모아둔 곳이다. 당초에는 귀무덤이라고 했다가 여러 학자들의 연구에 따라 코무덤이라는 수식을 부가해두었다. 귀보다는 코가 더 섬뜩해 귀무덤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전언이다. 당시 왜군은 조선의 민중들을 죽이고 코를 베어갔다. 왜군 장수들은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고 히데요시는 코영수증을 써주었다. 일설에는 이 무덤에만도 조선인 12만 6천명의 코가 묻혀있다 한다. 교토뿐만이 아니라 몇 군데 코무덤을 더 찾았다는 얘기도 있다. 400년이 훨씬 더 지났지만 참혹하다. 일부를 경남 사천시로 옮기기는 했지만 온전한 이장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룬다. 그런데 왜덕산 사람들 곧 진도사람들은 멀리 교토의 코무덤까지 찾아가 위령제를 지내고 있는 것일까? 해마다 9월에 진행하는 이 행사는 명량의 바다에서 연행했던 평화제의 확장이기도 하다. 박주언이 오랫동안 연행해온 진도평화제라는 축제는 지금은 없어져 명량해전축제로 탈바꿈해버렸지만 원혼을 달랜다는 의미만큼은 여전히 살아있다. 경제 전쟁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는 지금의 정세를 본다. 적군의 시신들을 거두고 매장해준 왜덕산 사람들을 떠올린 이유다. 백번 양보하여 누군가 지어내 이야기라 하더라도 왜 진도사람들은 왜덕산이라는 선행의 이야기를 만들어 유포하고자 했던 것일까? 수사자를 대하는 민속 관념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피아를 굳이 나누지 않고 위령한다는 심성만큼은 이견이 없다. 지금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 백가쟁명의 해법들이 난무한다. 무엇인가는 해야 할듯한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다. 나 같은 땔나무꾼은 그저 역사를 상고하여 교훈을 얻는 수밖에 없다. 코무덤을 위령하는 왜덕산 사람들 이야기가 길을 알려주지는 않을까.

남도인문학팁

교토 호코지(方廣寺) 귀무덤(耳塚, 미미츠카)

2003년 교토시가 세운 귀무덤 안내판을 여기 소개하여 자료로 삼는다. "이 무덤은 16세기 말 일본 전국을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대륙진출의 야심을 품고 한반도를 침공한 이른바 분로쿠 게이초의 역(한국에서는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1592~1598)과 관련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예로부터 전공의 표식이었던 적군의 목 대신 조선 민남녀의 코나 귀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왔다.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거행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귀무덤(코무덤)>의 유래이다. <귀무덤(코무덤)>은 사적 오도이 토성과 함께 교토에 현존하는 히데요시 관련 유적 중 하나이며 무덤 위에 세워진 오륜석탑은 1643년에 그려진 그림지도에 이미 그 모습이 나타나 있어 무덤이 축조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건되었다고 추정된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이 전쟁은 한반도 민중들의 끈질긴 저항에 패퇴함으로서 막을 내렸으나 전란이 남긴 이 <귀무덤(코무덤)>은 전란하에 입은 조선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교훈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1979년 교토시가 세운 안내판에는 귀무덤(耳塚)으로만 표기되었는데 2003년에 세운 안내판에는 耳塚(鼻塚)으로 귀와 코가 함께 기록되었다. 코무덤 앞의 오랜 비석 내용이 더 자세하나 지면상 차후 소개하기로 하겠다.

2006년 진도 왜덕산을 참배한 일본 학생들. 사진 박주언 제공

2018년 9월 교토 코무덤. 이윤선 촬영

2018년 9월 도쿄 코무덤 위령제를 준비하는 진도사람들

교토 코무덤 앞 옛 비석

2005년 진도에서 열린 정유재란과 왜덕산 관련 학술회의 장면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