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소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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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소금비
  • 입력 : 2019. 10.02(수) 13:21
  • 편집에디터

제17호 태풍 '타파'(TAPAH)가 북상 중인 지난 9월 22일 부산지역에 태풍경보가 발령된 가운데 해운대구 해운대해수욕장에 파도가 몰아치고 있다.뉴시스

태풍을 타고 날아온 소금비(鹽雨)

짜디짠 비가 억수로 내렸다. 바람 또한 크게 일었다. 솟구쳐 오르는 파도가 하늘 끝에 닿았는지 모르겠다. 그 끝으로부터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비는 차라리 바닷물이었다. 염우(鹽雨), 곧 소금비가 이내 갯자락 들판을 뒤덮어버렸다. 다산시문집 제17권 기사로 풀어본 풍경이다. 소금비, 이로 인한 피해를 염해(鹽害) 혹은 염풍해(鹽風害)라 한다. 근대기에는 제방의 붕괴 등으로 인한 바닷물 침수 탓이 크지만 본래 태풍 따위의 영향을 말한다. 바닷바람이 실어온 소금물인 셈이다. 토양뿐만 아니라 물까지 오염시킨다. 그 피해가 막심하다. 대개 소금비를 맞은 식물은 잎이 말라죽고 수목까지 고사한다. 태종실록 태종7년 6월 29일 기사를 보니, 풍해도(황해도의 옛 이름)의 풍주, 장연, 은율 등지에 이틀 동안이나 큰 바람이 불었다. 밭곡식이 모두 쓰러졌다. 이로 인해 해주, 황주, 봉주, 경기 연안, 서북면의 선주, 삭주 등지에 황충(蝗蟲)이 일었다. 곧 풀무치가 무리를 지어 모든 잎들을 갉아먹어버린 것. 기사에서는 염해를 직접 거론하지 않았지만 황해권역이라는 점에서 소금비의 피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2014년 해남군 산이면 덕호마을에는 수십억 마리가 넘는 메뚜기 떼가 날아들어 수확을 앞둔 벼를 습격한 적이 있다. '두꺼비 메뚜기'로 추정되는 이 황충들이 뒤덮은 곳은 간척지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와 비교해보면 염해(鹽害)와 관련지어볼 만하다. 다산의 시 속에 나타나는 소금비는 어느 지역에 내렸던 것일까?

유배지에 남은 역모자라는 이름의 여자들

다산시문집의 내용이다. 기사년(1809, 순조 9) 가을이었다. 장현경의 아내가 고금도로 유배 온지 9년여 큰딸 22세, 작은 딸 14세, 사내애 10여세였다. 장현경은 누구인가? 정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상례가 아직 끝나지 않은 시기, 인동(지금의 구미, 선산, 칠곡)부사였던 이갑회가 기생을 불러 부친의 생신잔치를 열었다. 장씨를 초대했다. 장현경의 아버지는 국상 중 예의에 어긋난다며 거절하고 징계하려 했다. 다급해진 이갑회가 정조 독살설과 관련하여 모함을 했다. 서로 치받는 사이, 장씨 일가는 역모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일가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자 도망가거나 벼랑에 떨어져 죽고 또 유배되었다. 장현경의 처와 자식들이 1800년 8월에 고금도로 유배된 이유다. 하루는 진영의 군졸 하나가 술에 취하여 돌아가다가 울타리 구멍으로 큰딸을 엿보고 유혹했다.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뒤로 계속하여 유혹하기를 그치지 않더니 꾸짖어 말했다. "네가 비록 거절한다 해도 끝내는 나의 처가 될 것이다." 큰딸은 비분한 나머지 항구로 나아가 조수를 바라보다가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어머니가 재빨리 그녀를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했다. 7월 28일의 일이었다. 그때 작은딸이 따라 죽으려 하자 어머니가, "너는 돌아가 관가에 알려 원수를 갚고, 또 네 동생을 길러야 한다."하였다. 이에 멈추고 뒤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마치 전설과도 같은 통절의 사건을 다산은 매우 담담하게 기록해두었다. 가혹한 세금 때문에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던 사건을 다룬 시 애절양(哀絶陽)에 버금가는 기록이라 생각된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듬해 경오년 남쪽에서 태풍이 불어오더니 소금비를 뿌렸다. 이내 해변의 곡식과 초목이 모두 말라죽게 되었다. 그 다음해도 또 큰 바람이 불어 소금비를 뿌렸다. 사람들은 이 비를 실어오는 바람을 처녀바람(處女風)이라 불렀다. 장씨의 큰딸은 그렇게 비통하게 죽어 소금비 뿌리는 태풍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다산이 염우부(鹽雨賦)를 기록한 까닭

다산의 기록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듬해 경오년(1810년 순조 10) 7월 28일 큰 바람이 남쪽에서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바다에 이르자 파도가 은산(銀山)이나 설악(雪岳)처럼 일었다. 물거품이 공중에 날아 소금비가 되어 산꼭대기까지 이르렀다. 해변의 곡식과 초목이 모두 소금에 젖어 말라죽어서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나는 다산(茶山)에 있으면서 염우부(鹽雨賦)를 지어 그 일을 기록하였다. 또 이듬해 그날도 바람의 재앙이 지난해와 같았다. 바닷가 백성들은 그 바람을 처녀풍(處女風)이라고 하였다. 그 뒤 암행어사 홍대호도 그 사연을 들었지만 역시 묵인하고 가버렸다." 파도가 얼마나 크게 일었으면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을까? 예컨대 가거도 등지에 큰 태풍이 당도하면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들을 해안에 올려놓기도 한다. 강고하게 쌓아둔 방파제도 한 순간에 무너뜨린다. 파도를 비유컨대 은산이나 설악이라고 했으니 거품을 뿜어내는 거대한 산 같은 파도를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소금비는 이내 염해를 일으켜 모든 농작물과 수목들을 말라죽게 한다. 큰 재앙이다. 나는 일찍이 독우청춘(讀雨聽春)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한 바 있다. 비를 읽으니 봄이 들린다는 뜻이었다. 다시 인용한다. 비를 읽는 것은 천지음양의 조화를 독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소금비를 읽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천지의 조화를 듣는 것이기도 하다. 왜 장씨의 딸과 부인은 죽어서 소금비가 되었을까? 암행어사 홍대호마저 묵인하고 가버린 상부의 카르텔을 문제 삼는 이야기다. 다산이 우리에게 남긴 기사는 이를 시대에 비추어 독해하라는 숙제일 것이다.

고금도의 처녀풍이 남긴 것, 풍뢰감응(風雷感應)으로 풀어낼까?

처녀가 죽으면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린다는 말이 있다. 도처에 전설과 장소로 설정해 둔 처녀귀신 이야기, 그 함의를 가장 잘 표현한 속담 아닌가싶다. 우연이었을지도 모를 자연발생적 소금비를 이들이 굳이 처녀바람이라고 호명하게 된 까닭 말이다. 다산은 시문집의 기사를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동생이 돌아가서 보장(堡將)에게 알렸다. 보장은 현에 그 말을 상신하였다. 현감 이건식은 검시(檢屍)한 뒤에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윽고 수일 후 해남수군사 권탁이 장계를 올려 신지도 수장과 지방관인 강진현감을 아울러 파출(파면)할 것을 청했다. 이는 고례에 따른 것이다. 파출 당하게 된 건식이 곧 아전과 의논했다. 천냥을 비장에게 뇌물로 주었다. 이윽고 관찰사는 검안을 현청에 되돌려줬다. 장계는 수영으로 되돌려 보냈다. 관은 무사하게 되었다. 군졸의 죄도 불문에 부쳐졌다." 비통한 죽음을 알렸던 동생의 고발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유는 검은 거래에 있었다.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상부의 뇌물 카르텔이 소금비를 몰고 왔구나. 그렇다면 이 비 몰고 오는 바람은 처녀바람 아닌가. 장현경의 딸이 죽어 몰고 오는 바람 말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기근이나 흉년 등의 자연재해를 사회적 관계로 해석해오곤 했다. 지역에 따라서는 이에 대한 응징과 대응이 여성반란제의라 호명하는 도깨비굿 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다른 문화권의 사례이긴 하지만 고대에는 지도자를 바꾸는 '왕살해(기근이나 가뭄이 왕 때문에 일어난다고 해석하여 왕을 살해하는 행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소금비 내리던 때로부터 200여년이 지났으니 지금은 좀 더 개선되었을까? 어떤 중한 죄를 저질렀을지라도 뇌물이면 통하고, 가진 자들끼리 보위하는 커넥션이 합법이란 이름으로 가동되는 상황은 유사한 듯하다. 장씨 딸처럼 부당한 압력이나 강요를 받은 경우는 뭘까. 여성이란 이름으로 성적 차별을 받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숱한 사례들을 목격한다. 극심한 빈부의 격차로 상실감을 갖고 있던 이들이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 내몰리고 또 많게는 하루 40명 가까이 스스로 죽어간다. 사회적 타살이다. 올해 유독 잦은 태풍과 폭우가 있었기에 드는 생각들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다. 풍뢰감응(風雷感應)이라는 중국고사가 있다. 처음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을 의심하였을 때 태풍이 일어나 초목이 모두 넘어졌다. 하지만 주공의 충성심을 알고 난 후 의심의 마음을 푸니, 넘어졌던 초목이 다시 일어났다. 의심하는 마음을 맺고 풀어내는 것이 천지조화와 상관을 갖고 있다는 고사 아닌가. 염우전야(鹽雨戰野), 지금의 우리 정국은 소금비 내리는 들판에서 서로 다투는 형국일지도 모르겠다. 창밖은 여전히 큰바람 불고 험한 비 그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볼때기 부딪는 비 찍어 맛을 본다. 하릴없이 죽어간 이들이 원혼 되어 흩뿌리는 비일까. 분열의 시국 염려해 잠 못 이루는 식은땀일까. 볼을 타고 내리는 빗물이 심히 짜다.

남도인문학팁

다산시문집, 고금도(古今島) 장씨(張氏) 딸에 대한 기사

다산시문집 제17권 기사를 필요한 부분만 오려 인용해둔다. 원문은 다산시문집을 참고하면 된다. 고금도(古今島)는 옛날의 고이도(皐夷島)다. 장씨 딸은 망명인 장현경의 혈족이다. 가경(嘉慶, 경신년, 1800, 순조 즉위년) 여름에 우리 정종대왕께서 돌아가셨다. 인동부사 이갑회가 공제(公除, 국왕이나 왕비가 선왕의 상사를 마치는 일)가 끝나기 며칠 전에 그 아버지 생일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녀를 불렀다. 현경의 부자에게 함께 와서 놀기를 청했다. 현경의 아버지가 그에게 답했다. "공제(公除)가 아직 지나지 않았는데 잔치를 하고 술을 마시는 것은 옳지 못하다." 현경의 아버지가, "시상(時相)이 역의(逆醫) 심인(沈鏔)을 천거하여 그에게 독약을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 역적을 내 손으로 제거할 수 없다."했다. 이갑회의 아버지가 그 말에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 아전이 와서 전하는 말을 듣자, 이갑회는 자기의 죄를 성토하며 모함하려는 것이라 하고 재빨리 감영으로 달려가, 현경이 터무니없는 말로 남을 속여 임금 측근의 악한 사람을 제거하려는 반역의 기미가 있다고 고하였다. 관찰사 신기가 돌아가서 포위하여 그를 사로잡으라 명하였다. 갑회가 밤에 잘 훈련된 군교와 이졸 2백여 명에게 횃불을 들게 하고 현경의 집을 포위하니 불빛에 밤하늘이 환하였다. 현경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놀랍고 두려워 무슨 변고인지도 모른 채 담장을 넘어 달아났고 그 아우는 벼랑에 떨어져 죽었으며, 그 아버지만이 잡혔다. 갖은 방법으로 다스려도(장현경을 잡으려 해도) 잡히는 바가 없었다. 연루자가 수백인이었으므로 체포하기 위해 사방으로 나가니 온 마을이 소란하여 모두 머리를 움츠리고 나오지를 못했다. 그때는 마침 가을이라 목화가 눈처럼 피었으나 줍는 자가 없어 모두 바람에 불려서 굴러다녔다. 조정에서는 안핵사 이서구를 보내어 그 사건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압수한 문서라고는 서지(筮紙) 한 장뿐이었다. 그 점사에는 '건마(乾馬)가 서쪽으로 달아났다.'라는 말이 있었다. 누가 지은 것인지 또 무슨 뜻인지도 알 수 없었다. 평번(억울한 옥사를 살펴 그 죄를 감면해주는 일)하여 대부분 풀어주었으므로 영남 사람들이 칭송하였다. 현경은 마침내 망명하였으므로 이에 그의 처와 아들딸을 강진현 신지도(현재 완도군)로 귀양 보냈다.

지난 9월 22일 제17호 태풍 '타파'가 빠르게 북상중인 가운데 경남 남해군 상주은모래비치 해변에 큰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뉴시스

지난해 제25호 태풍 '콩레이(KONG-REY)'가 강타한 전남 해남군 한 지역의 농경지가 빗물에 침수돼 있다.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