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당골 박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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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당골 박병천
  • 입력 : 2019. 11.13(수) 14:29
  • 편집에디터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보유자 故 박병천. 진도군 제공

뼛속만으로는 부족하여 누대를 이어/ 무(巫)를 받아 무(舞)를 전하네/ 온몸이 악기요 숨마저도 춤이라/ 보면 흥이요 들으면 눈물겨워/ 백 년을 기다려야 님의 모습 보려나/ 창자를 우려내어 토하는 소리는/ 시김마다 처량하고 마디마디 슬픔이네/ 한(限)도 연(緣)도 혜량할 수 없는데/ 사자의 귀성인가 절절함 끝이 없고/ 그리움 소름 돋아 그대 넋이 분명코나/ 팔 벌려 비켜서면 바람도 긴장하고/ 디딤은 거침없어 눈부시게 맵시 나네/ 두 손의 쌍채는 신명의 여의주인가/ 사위는 차고 자취는 현란한데/ 일거일동 흥의 암호 그 누가 풀리

수년 전 김명호씨가 박병천 선생에게 바친 헌시다. 박병천이 누구길래 이런 절절한 헌시를 바친단 말인가? '당골'임을 천명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아마 유일한 사람일 것이다. 이후 그런 분들이 더러 나왔나 모르겠다. 사실 '당골네'란 용어를 씻김굿을 연행하는 사람들이 용인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비하하는 의미로 쓰였기 때문이다. 국어사전에서는 '당골'을 '무당'의 방언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용례로는 '당골어메' 등이 있다. 늦동이 아들을 낳으면 명(命) 길게 살라고 당골을 새엄마로 부르게 하는 풍습을 말한다. '단골'로도 표기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당골'로 발음한다. 남도지역에서는 여자 무당을 얕잡아 이르는 말로 사용되어왔다. 결혼한 여자를 낮잡아 부르는 말인 '여편네', 늙은이를 호칭하는 '노인네', 소인을 좀 더 낮춰 부르는 '쇤네' 등의 용례가 있다. 하지만 친족 호칭이나 사람 이름 뒤에 붙어 그 집안이나 가족 전체를 이르는 관형어로 쓰이는 예컨대, '언니네', '어르신네', '아낙네', '할마니네' 등의 용례를 보면 그 대상을 더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당사자들이 당골로 불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는 것. '당골'로 호명되었을 뿐 스스로를 당골이라 부르지도 않았고 그렇게 호명받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진도문화원장 박주언이 '뿌리 깊은 나무'에 진도씻김굿 원고를 쓸 때의 일화가 있다. 박병천에게 '당골'이란 용어를 써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함부로 쓸 수 없는 용어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허락을 받아 원고를 게재할 수 있었다. 당골이라는 표현이 민감했었음을 보여주는 얘기다. 이처럼 기피하던 호명을 당당하고 자랑스럽게 바꾼 사람이 박병천이다. 시김마다 처량하고 마디마디 슬픔인 음악을 평생에 걸쳐 당당하게 연행하다 가신 분이다.

내 유년시절의 박병천가(家)

내 어렸을 때는 그의 존재감이랄까 위상에 대해 잘 몰랐다. 우리집안의 '당골'이었다는 말만 전해 들었다. 내가 이런저런 정보를 이해하기 전에 그 집안의 당골판을 이웃마을 당골 채둔굴에게 팔았기 때문이다. 당골판은 무엇인가? 예컨대 지금의 천주교나 기독교가 권역을 관리하는 것과 유사하다. 신부나 목사 등 사제자가 일정한 권역을 관리하듯 당골 또한 자신의 권역을 관리했다. '당골판'이라고 한다. 더불어 '도부제'라 부르던 제도가 있다. 권역 사람들에게 여름과 가을 일 년 두 차례 보리쌀과 나락(벼)을 수금해가는 제도다. 가가호호 방문하기 때문에 일종의 신도들께 걷는 방문 헌금이라 할 수 있다. 형편에 맞춰 낸다. 지금의 종교들과 다른 점이라면 당골끼리 이 '판'을 사고 팔수 있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어린아이들도 나이든 당골에게 '하게'체를 썼다는 점. 본래는 상대 높임법의 하나다. 나이 든 사람이 손아랫사람이나 동일 연배의 친숙한 사이에 사용하는 호명방식이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당골에게 하게체를 썼던 것은 하대하는 의미였다. 세월이 흘러 위상이 바뀌었다.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단계를 거치면서 존재감 자체가 달라졌다. 어느 시기부터인가 박병천이라는 이름이 성공의 대명사가 되었다. 진도에서 민속음악이 일종의 문화 권력이 된 것도 박병천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젓대(大笒)산조의 시조라고도 하는 작은 할아버지 박종기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고나 할까. 그렇지만 당골 가문이 천대를 받았던 시절의 이야기는 세간에 많이 알려져 있진 않다. '성공'의 이면에 깔린 '삭임'의 과정들이 거의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예술세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그 삶의 총체적 측면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그의 예술이 오랜 시간 쌓여 온 한과 삭임의 과정을 통해서 추출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이들이 연행한 씻김굿 자체가 죽음을 다루는 의례이자 예술이라는 점을 전제해야 삭임의 질적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

클래식의 명가 바흐(Bahc) 혹은 시선(詩仙) 이백에 견주어

"노래한 사람은 나이 칠십여세다. 그의 노래에 우아함과 속됨이 깃들어 있고 맑음과 탁함이 교류하며, 느림과 빠름이 교통한다. 슬픔과 기쁨이 또한 능숙하게 노래들 사이를 유영한다. 춤에도 능하여 그 몸짓에 정중동이 있고 가야금과 퉁소를 연주하는 데도 절도가 깊다. 놀라운 것은 그가 노래하기를 그만 둔지 20여년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나를 위해 향연을 베풀어주었으니 어찌 시를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긴 시를 지어 감상을 남긴다."

무정 정만조가 박덕인에게 바친 시 "노래하는 사람, 박덕인에게 바침(贈歌者 朴德寅)"을 내가 맥락에 맞게 해석해봤다. 은파유필에 남긴 원문은 "歌者七十余歌曲雅俗淸濁緩促哀愉無不極善廢止二十余年爲余如發云又能舞尤工於伽倻琴及吹簫笛"다. 박덕인은 누구인가? 박병천의 작은 할아버지 박종기의 부친이다. 여기서 말하는 노래와 춤과 악기 연주 등은 무속음악의 또 다른 호명이다. 김명호가 박병천에게 바친 헌시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집안 대대로 정중동(靜中動) 혹은 동중정(動中靜)의 음악을 구사해 온 명가(名家)였다는 뜻이다. 박병천의 가계에 대해서는 이미 연구자들에 의해서 소상하게 밝혀졌다. 박주언이 집필한 「진도의 무속」(예향진도)이나 박미경이 집필한 「진도 세습무 박씨 계보와 인물 연구」(한국음악연구 41집)등이 그것이다. 연구에서도 밝혔듯 가계를 온전하게 추적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정만조가 은파유필에서 언급한 박덕인으로부터 젓대의 명인 박종기를 거쳐 박병천으로 이어지는 가계도가 중심을 이룬다. 박미경은 8대를 거쳐(박병천은 9대조부터 무업을 했다고 말한바 있다) 지속된 음악가 혈통, 독일의 바흐(Bahc)가문에 버금가는 명가라고 정리하고 있다. 박병천의 아버지 박범준이 당시 신청(神廳, 전라도와 경상도에 있던 무당과 악공의 연합단체)의 대장이었다. 어머니 김소심은 진도에서 굿을 제일 잘한다고 소문나 있었다. 진도의 김, 이, 박, 한, 강, 함, 전, 채, 노, 안 씨 등의 당골 중에 가장 으뜸이었다고도 전한다. 어디 그뿐일까. 광주MBC 얼씨구당 진행을 맡고 있는 백금열은 박병천을 시선(詩仙) 이백에 견주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이백은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박병천의 구음 시나위 혹은 북춤을 바흐나 이백에 비유하는 이유는, "한(限)도 연(緣)도 혜량할 수 없는데, 사자의 귀성인가 절절함 끝이 없는" 그의 예술에 대한 찬탄이기도 하지만, 가장 낮은 곳에 있던 음악을 융숭한 격조로 끌어올린 그의 가문에 대한 내 헌사(獻辭)이기도 하다. 가장 천한 이름 당골의 신분으로 어쩌면 가장 격조 높은 음악을 연행했던 이들에게, 나아가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간 민중들이 연행하고 향유했던 음악에 대한 나의 마땅한 태도와 믿음이다.

청즉람 남즉천(靑卽藍 藍卽靑), 쪽풀과 물감의 상관

박병천의 예술이 진도씻김굿의 난장 기능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당골이라는 신분의 제약으로 인한 한의 삭임이 구음 시나위 등의 예술로 승화되었음도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죽음을 다루는 씻김굿의 성격이 박덕인으로부터 혹은 더 먼 선대들로부터 박병천까지 나아가 후손들이며 제자들의 음악으로 이어졌음도 반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당골이라는 신분을 숨기거나 쉬쉬하며 움츠려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로라하는 명인들마저 신분을 숨긴다. 회자 자체가 마뜩잖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병천의 공표는 의미가 크다. 최초로 당골가(家)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그들을 억압했던 사회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서 신분의 제약을 넘어서는 용기를 갖게 되었을까? 신분의 제약이 허물어지는 시대의 변화와 상관된다. 이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진도민속음악의 기획 연출을 담당하게 되고 일정한 성과를 확인하면서 얻은 용기일 것이다. 특히 무형문화재 제도로부터 생긴 전통음악의 수요에 힘입은 바 크다. 시대상황이 일종의 진도 혹은 남도 민속음악에 대한 갈무리 혹은 그 담당자 역할을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속이론가 지춘상교수를 만났던 것도 큰 행운이었다. 이제 남은 과제가 있다. 바흐나 이백에 견주는 것과는 다른 일종의 상속된 부채라고나 할까. 박병천이 추려 낸 것은 진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도 굿판의 꽃이랄 수 있다. 가장 아름답고 현묘한 것들을 뽑아냈다고나 할까. 이면에는 무엇이 있나. 씻김굿과 민속음악을 각양의 예술로 그리고 무대로 이끈 컨텍스트 말이다. 지금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도 씻김굿이나 여타의 민속음악들을 보면 봄에 물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뿌리가 죽어간다는 의미다. 그래서다. 청출어람,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것만을 말해서는 안 된다. 푸른 물감을 배태한 쪽풀에 대한 관심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청즉람 남즉천, 쪽풀과 남빛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다. 남도민속음악의 현장을 살피고 가꾸는 것, 박병천이 남도민속 나아가 한국음악계에 남긴 유훈 아닐까.

남도인문학 팁

무송 박병천의 생애

1932년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서 출생. 1952년 목포상선전문학교를 졸업한다. 1960년경부터 가업인 씻김굿을 시작한다. 1971년에서 1976년, 전국민속경연대회에 남도들노래(국무총리상), 강강술래(대통령상), 진도만가(문공부장관상) 등의 연출, 안무 등을 도맡아 한다. 전남대 대학원장을 지낸 지춘상 교수를 만나 바늘과 실과 같은 관계를 유지했던 시절이다. 1977년 진도 다시래기를 발표한다. 1978년 진도씻김굿을 서울에서 공연한다.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된다. 1981년 박병천 문화재전수관을 개설한다. 1982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문화재보호재단 '한국의집' 악장 및 예술 감독을 역임한다. 1987년부터 2007년, 사단법인 민속놀이진흥회 이사장, 전통연희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한다. 1996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객원교수, 전통예술원 전임 객원교수, 대불대 연희학과 석좌교수, 한국문화재보호협회 한국의 집 악사장 등으로 활동한다. 2007년 11월 20일 작고한다. 남긴 음반으로, 박병천의 구음다스름, 한국의 슬픈 소리, 진도씻김, 강강술래 등이 있다.

#이윤선

(사)한국민속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남도민속학회 회장

목포문화연대 상임대표

(사) 광주마당 이사

지방분권 전남연대 정책단장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였던 무송 박병천 선생. 뉴시스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보유자 故 박병천. 뉴시스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였던 무송 박병천 선생.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였던 무송 박병천 선생. 진도군 제공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였던 무송 박병천 선생.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