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녹두서점의 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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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녹두서점의 오월
  • 입력 : 2019. 12.11(수) 15:18
  • 편집에디터

녹두서점의 오월

잊지 않기 위하여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거리에도 산비탈에도 너희 집 마당가에도/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엔 아직도/ 칸나보다 봉숭아보다 더욱 붉은 저 꽃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마라/ 그 꽃들 베어진 날에 아 빛나던 별들/ 송정리 기지촌 너머 스러지던 햇살에/ 떠오르는 헬리콥터 날개 노을도 찢고, 붉게/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깃발 없는 진압군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탱크들의 행진 소릴 들었소/ 우리들의 오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날 장군들의 금빛 훈장은 하나도 회수되지 않았네/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옥상 위의 저격수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난사하는 기관총 소릴 들었소/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마라/ 여기 망월동 언덕배기 노여움으로 말하네/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누이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무엇을 보았니 아들아 나는 태극기 아래 시신들을 보았소/ 무엇을 들었니 딸들아 나는 절규하는 통곡 소릴 들었소/ 잊지마라 잊지마 꽃잎 같은 주검과 훈장/ 소년들의 무덤 앞에 그 훈장을 묻기 전까지

'녹두서점의 오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겪어온 세 가족 이야기

정태춘의 노래 , 본래 제목은 <잊지 않기 위하여>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인 듯, 유주현의 구음창이 교직되는 선율들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상황들을 실어 나른다. 정태춘의 이 노래는 사실 육자배기다. 느린 육자배기 장단에 얹은 흥타령이다. 흉중의 응어리를 간단없이 토해내는 통곡이자 음유시다. 붉은 꽃에 이입된 붉은 색의 트라우마, 노래가 끝나고 몇 시간이 지나도, 아니 며칠이 지나도, 그 어디에도 붉은 꽃을 심지 말자는 당부임에도, 선혈 낭자한 꽃잎들만 더 뚜렷해진다. 두고두고 이 노래를 듣다가 밀쳐두었던 책을 읽는다. '녹두서점의 오월', 김정한이 뽑은 표제대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온몸으로 겪었던 세 가족의 이야기다. 본래 김상윤 집안 여섯 사람이 5.18 유공자인데 이번 책에는 김상윤과 그의 아내 정현애, 동생 김상집이 대표 저술하였다. 한번 손에 잡으니 책을 놓을 수가 없다. 가빠오는 숨을 참으며 단숨에 읽었다. 혁명의 선봉, 불굴의 의지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윤상원과 항쟁지도자들도 사실은 시외로 도피하려다가 총을 든 시민군들을 보고 다시 녹두서점으로 모여든다. 구두닦이, 넝마주이, 고아원 출신 등 기층민들이 새로운 싸움을 시작하는 아니 싸움의 중심에 서있던 핵심 에너지였다. 총소리에 놀란 새들처럼 흔들리며 살았을 이들을 무소의 뿔처럼 역사의 전면에 세운 것은 무엇일까.

김상윤의 트라우마

예비 검속으로 감옥에 있던 김상윤의 고백, "어느 날 차정수 수사관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누구 같은가?" 그 사진 속에는 어떤 사내가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얼굴은 검게 그을렸고 입은 앙다문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웃통은 벗겨져 있었고 바지 지퍼는 열려있었다. 빨간 팬티가 드러나 있는데, 오른쪽 옆구리에 창자가 흘러나와 있었다. 처참했다. 자세히 보니 팬티색이 빨간 것이 아니라 하얀 팬티에 피가 흘러 빨갛게 보인 것이었다. "누군지 알겠어?" "아니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찬찬히 봐. 알 수도 있을텐데." 나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굴까? "상원이 아니야? 윤상원이." "뭐라? 윤상원이?" 아니었다. 윤상원은 아니었다. "윤상원이 맞아. 검시까지 끝냈는데." 날카로운 칼날이 등줄기를 죽 긋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한순간이었다. 사진 속 사내가 입고 있던 바지는 내가 입던 바지였다. 윤상원은 종종 내 옷을 입고 다녔다. 내 바지를 입고 죽은 것이다." 이후 김상윤은 20년형 정동년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교도소에 돌아와 독방에 홀로 있으니 사형을 면했다며 뛸 듯이 기뻐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 목 놓아 울고 또 울었다. 정동년 선배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자신은 죽음을 면했다고 날아갈 듯 기뻐하다니! 참으로 파렴치한 행동이었다. 지금도 그 때 일이 떠오르면 너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리고 땅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다." 그의 고백은 이어진다. "매년 5.18국립묘지에서는 성대한 기념식이 열린다. 어떤 때는 대통령도 참석한다. 나 역시 매년 초청장을 받는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감히 기념식장에 있는 5월 영령들을 바로 쳐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5월은 나에게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랬다.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5월은 신성한 영역으로 남아있다. 2020년 40주년의 5월에는 그가 망월동을 찾을 수 있을까.

아, 이름도 빛도 없이 스러진 붉고 여린 꽃들

5월 25일 정현애의 기억, "시민들이 여기저기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 정말 선량한 시민들이구나. 지나가는 지프차를 세워 도청까지 좀 태워달라고 했다. 소년티를 갓 넘긴 어린 청년 두 명이 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든 후 지금까지 거의 잠을 자지 못했고, 밥도 제때 먹지 못했다. 무엇이 제일 괴롭냐고 물었다. 일주일째 양말을 못 갈아 신었더니 정말 힘들다고 했다. 그의 양말을 보니 흰 양말이 회색이 되어 있었다. 요깃거리를 사들고 도청에 들어가니 본관과 후관으로 통하는 통로에 시체 10여구가 있었다. 병원이나 시 외곽에서 사망한 분들은 맨 처음 이곳으로 옮겨진다고 했다. 민원실에서 대강 신원과 사망 원인을 조사한 후 상무관으로 이송될 것이다. 대부분 들 것 위에 놓여 있었다. 아직 약병과 주삿바늘이 그대로 꽂혀 있는 시체도 있었다. 그 얼굴들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이미 어두워져서 이 시신들은 내일 아침에 상무관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계단 아래서 대여섯 명의 고등학생이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옆에 시신이 있는데도 그들은 조잘거리며 생기가 넘쳐 보였다. 어린 학생들이 이처럼 살벌한 곳에 있다니 이 무슨 경우인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 그런지 시신 곁에 있는 아이들을 보자 걱정이 앞섰다." 항쟁의 중심에서 뒷바라지를 담당했던 정현애의 증언이다. 나 또한 갓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였으니 내 또래 아이들이었을 것이다. 말을 다할 수가 없다. 김상윤은 고백한다. "며칠간 밥도 못 먹었다는 청년, 양말이라도 갈아 신었으면 좋겠다던 어린 시민군, 계엄군이 밀고 들어오는 순간에 밥이라도 해주고 싶어 자신은 남아 있겠다던 아주머니, 버스터미널에서 구두를 닦다가 공수의 만행에 떨쳐 일어선 박래풍, 술집에서 술을 팔다가 항쟁에 발 벗고 뛰어든 아가씨! 이 책은 바로 이들에 대한 헌사가 되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자괴감이 온 몸을 감싼다." '녹두서점의 오월'은 세 가족의 입을 빌려 말하는 이들 민중들에 대한 헌사다.

5.18 40주년 불혹을 맞이하며

김정한은 해제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5.18을 겪은 한 가족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책을 매개로 녹두서점에서는 사회과학을 학습하는 학생들, 들불야학의 강학들, 반독재 혁명을 꿈꾸며 운동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렸고 5.18이 일어난 후에는 위급한 상황을 공유하고 전파하는 연락소이자 공수부대와 맞서 싸우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기획의 장소였다. 그래서 '녹수서점의 오월'에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오고, 그 이름이 각각 마주한 오월 이야기가 함께 담겨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김상윤은 이렇게 고백한다. "정용호, 김선출, 그리고 민족민주화성회에서 활동하던 박용성 등 많은 후배가 잡혀왔다. 그 외에 잡혀온 시민군은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천대받던 도시 하층민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조사받는 과정에서도 매우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나는 '역사의 주체가 민중'이라고 생각했으나 막상 민중의 힘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광주의 하층민들이 계엄군의 총부를 뚫고 떨쳐 일어났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없었다. 내 머릿속의 민중은 농민이나 노동자였다. 말하자면 실생활과 동떨어진 관념적 민중관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바로 옆에 있는 그들에게 한없이 미안했고, 책 줄이나 읽고 운동가라고 여겼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이양현 정상용 등이 5월 21일 보성기업 모임에서 상황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각기 고향으로 피신했다가 다시 항쟁의 전면으로 나오게 된 이유도 이들 이름도 빛도 없는 사람들의 항쟁의지 때문이었다. 2020년 경자년 5.18 40년, 마흔을 일러 공자 말하기를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는다 했다. 불혹의 저편을 상고하는 까닭은, 그렇다,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다. 이름도 빛도 없이 스러져간 남도의 민중들을 온전히 기억하고 복원해내기 위해서다. 40성상의 여정 수도 없이 흔들리다가 비로소 도착하는 여관이라고나 할까. '녹두서점의 오월'을 덮는 마음 심히 무겁고 죄송하다. 12.12의 날, 그저 반복하여 정태춘의 <잊지 않기 위하여>를 듣는다.

남도인문학팁

대를 잇는 다는 것과 기록을 남긴다는 것

1980년 5월 20일 김상집의 기억, "시위를 끝내고 녹두서점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와계셨다. 녹두서점은 위험하니 산수동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들은 척도 안하고 전화를 받으며 그날의 상황일지를 정리했다. 그때 윤상원형에게 전화가 왔다. 금남로에 시민들이 많아 녹두서점에 갈 수 없으니 소식지에 쓸 내용을 정리해 오라고 했다. 시민들이 군부의 동향과 미국의 입장을 궁금해 하니 빨리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해야 했다. 나서려는데 아버지가 서점 문 앞에 서 계셨다. 눈치를 보다가 안 되겠다싶어 화장실에 가는 척 하고는 뒷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어느새 아버지가 뒷문 앞에 서계셨다. 아버지는 나를 보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눈물을 흘리시고 말씀하셨다. 상집아, 6.25때 우리 집안이 몰살당했는데, 지금 네 형은 잡혀가고 너까지 이렇게 돌아다니다 모슨 일이 생기면 이 아비는 어찌 살란 말이냐. 가슴이 먹먹했지만 윤상원에게 <투사회보> 초안을 전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붙잡으려는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달려 나왔다." 나도 어렴풋 김상윤 선배께 가족사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국동란을 거치며 몰살당하다시피 한 내력 말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살아야겠다는 것. 대를 잇는 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간청을 뿌리치며 총알 빗발치는 금남로로 뛰쳐나간 김상집 혹은 항쟁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 그들이 이어오거나 포기했던 대(代)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띠 표지에 밝힌 것처럼 평범한 시민들이 어떻게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투쟁에 나서게 되었는지 소상히 밝혀준 책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5.18항쟁을 이해하기 위해 귀중한 기록을 남겨주신 김상윤 가족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박지원 대안신당(가칭) 소속 의원이 지난 11월 26일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가 군의 정보활동을 위해 체증한 일자별, 시간대별 진압기록 사진 및 김대중 내란음모 사전 범죄 개요 수기, 군의 정훈활동 일지 등을 공개했다. 사진첩은 보안사 시각에서 수집했기 때문에 시위대의 과격함과 그로 인한 피해 상황을 나타내는 사진이 대부분을 차지했다.(박지원 의원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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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