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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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여백
  • 입력 : 2019. 12.25(수) 15:58
  • 편집에디터

촛불 이미지. 클립아트코리아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이 있나요/ 음악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에/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배우는 무대 옷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고/ 불빛은 배우를 따라서/ 바삐 돌아가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무대 위에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무대에 남아/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본 적이 있나요/ 힘찬 박수도 뜨겁던 관객의 찬사도/ 이젠 다 사라져/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책망만이 흐르고 있죠/ 관객은 열띤 연기를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 끝나면 모두들 떠나버리고/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있죠/ 어둠만이 흐르고 있죠~.

최명섭 작사 작곡, 1980년 제4회 MBC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곡, 그룹 샤프의 노래다. 40년이 지났지만 이 노래를 즐겨듣는 이유가 있다. 비트뿐만 아니라 가사가 주는 영감들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떠들썩하기만 했던 황금 돼지해를 보내며 이 노래를 꺼내는 까닭, 부산했던 일 년을 관조(觀照)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관조를 지혜로운 모든 사물의 참모습과 나아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비추어본다고 설명한다. 너무 큰 개념이다. 나 같은 땔나무꾼에게 관조는 가당치 않다.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볼 지혜가 없으니 그저 마음만이라도 고요히 하고 싶은 심정이랄까. 사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무대를 바라볼 기회가 있기나 했을까. 어둠과 정적이 흐르는 공간에 앉아보기라도 했을까. 힘 찬 박수와 뜨겁던 관객들의 찬사도 그쳐버린 무대 위에서 나 스스로를 관망이라도 해봤을까. 아니 어쩌면 객석에 앉아 내가 주인공이 된 듯 착각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심(豕心)과 시시(豕視)를 버리는 돼지해였을까

2019년 황금돼지해를 열며 나는 시심과 시시를 버리는 한해 되기를 소망했다. 그 소망을 이루었을까. 땅의 수와 하늘의 수를 교직하여 기해년(己亥年)이란 시간의 분절을 만들었는데 천간의 기(己)가 오행의 황색이어서 황금돼지해라고 했다. 그것도 60년 만에 온 황금돼지띠라나. 저마다 재화를 이야기하고 심지어는 출산일을 맞추는 등 법석을 떨었다. 소수의 누군가에겐 아파트 값이 껑충 뛰어올라 황금돼지의 해였는지도 모르겠다. 합법을 가장한 서얼제도로 자녀를 좋은 학교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대다수 우리 서민들에겐 다른 해와 변함없는 해였던 것 같다. 오히려 OECD 자살율 14년째 부동의 1위라는 오명만 지속한 건 아니었는지 자괴감이 크다. 생활고로 가족단위 집단 자살율이 높아지는 뉴스를 접하며 그저 황망할 따름이다. 그래서였다. 평화를 가져온 공양돼지 불교설화를 인용했던 까닭, 숲으로 돌아가 호랑이를 물리침으로, 함정에서 구해준 목수에게 은공을 갚은 공양저(供養猪)처럼 인간 숲의 평화를 이끌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중국의 속담을 인용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사람은 이름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하지만 돌이켜보는 한 해는 오히려 갖은 욕망 숨겨두고 무덤에 남들 보기 좋을 회칠만을 했던 것은 아닌지. 이것이야말로 시심(豕心), 돼지의 마음이고 시시(豕視), 돼지가 세상을 보는 관점 아니었겠나. 아마도 저돌적으로 욕심의 살만 찐 것은 아닌지. 그래서다. 며칠 남지 않은 돼지해를 마치 연극이 끝난 객석처럼 홀로 앉아 묵상해보고 싶은.

한 해가 한 장의 그림이라면

한 해를 한 장의 도화지에 그려본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아니 한 사람의 생애가 한 장의 그림이라면, 꽉 찬 그림일까. 텅 빈 그림일까. 저마다 부여하는 의미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그림으로 드러난다고 온전한 한편의 삶 혹은 한 해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여백에 숨겨진 혹은 드러내지 못할 것들은 또 얼마나 무수할 것인가. 여백이라 하면 흔히 묵화나 산수화를 떠올린다. 여백의 미를 살려 그린 최상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윤세열의 글 ?산수화의 여백에 관한 고찰?을 가져와 산수화의 '허'와 '실'을 살펴본다. 그는 이병해의 글을 인용하여 '허'와 '실'을 다른 짝 개념들과 마찬가지로 음양론의 '음'과 '양' 개념으로 설명한다. '도'는 우주 만물의 운동 법칙이며 생명의 원천이다. '양'의 기운은 동적이고, '음'의 기운은 정적이다. '양기'는 외부로 발산하고 펼쳐서 드러난다. '음기'는 주로 '양기'의 작용을 이어받아서 외물을 받아들인다. 만물은 '양'의 발산과 '음'의 변화 중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기 때문에 '음양' 두 기의 기능은 '닫아서 감추는 것'과 '펼쳐서 나가는 것'으로 개괄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아니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으로 보이는 것의 의미를 톺아본다는 것이다. '노자'의 심미관, 있음과 없음 곧 '허'와 '실'이 동양회화 중에서 중요한 심미적 구성 요소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 묵화나 산수화에만 그칠 것인가. 비유해 말하자면 무대와 객석, 소리와 침묵, 노래와 여음, 혹은 환호와 적막들 아니겠는가. 한 해를 돌아보니 후회되는 일 천지다. 누군가처럼 큰 행운을 잡아 재화를 축적한 것도 아니요, 떵떵거릴 큰 자리에 나가 벼슬을 한 것도 아니며, 일에 밀려 종종거리다가 마음 풍족하게 거드름 한 번 피워보지 못했다. 도대체 이런 일상에 여백이 있기라도 했던 것일까.

장자 거닐던 하늘못에서 올라

"북해에 한 물고기가 있다.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은 그 크기가 몇 천리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이 변하여 새가 된다.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다. 온몸의 힘을 다해 날면 그 활짝 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것 같다. 바다가 움직이면 이 새는 남명(南冥)으로 이사를 간다. 남명이란 천지(天池) 곧 하늘못이다. 제해(齊諧)는 괴이한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제해의 말에 의하면 대붕이 남명으로 날아갈 때는 물결을 삼천리나 일으키며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리 상공에 올라간다. 여섯 달이 되어야 숨을 한 번 크게 내쉰다." 저 유명한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 붕새의 고사다. 장자의 생몰 이래 너무도 많이 회자되고 확대재생산 되었기에 해석들도 난무한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공중에 떠 있는 아지랑이와 티끌은 살아있는 생물들이 서로 입김을 내뿜는 데서 비롯되었다. 하늘이 푸른 것은 그 본래의 빛깔일까. 아니면 끝도 없이 멀기 때문일까. 붕새가 구만리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도 또한 이와 같을 것이다." 호접몽(胡蝶夢)의 비유처럼 구만리 하늘못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화자는 사실 장자 자신이다. 호방함과 기이함을 표방하는 장자의 고사들은 세속을 초월하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독해되곤 한다. 그렇다고 대붕이 뱁새를 비웃거나 조롱하는 것일까? 비유의 등가로만 따질 일이 아니다. 비유의 행간읽기라고나 할까. 결이 다른 이야기이니 구동존이(求同存異)의 지혜로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야말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보내는 소회, 붕새처럼 구만리 장천에 올라 아지랑이와 티끌을 바라보듯 관조할 수 있을까. 나의 한 해를 이입해 내려다보면 나의 무대는 아지랑이와 티끌의 사이 어딘가 존재했나. 아니면 그려지지 아니한 여백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미완의 작품은 또한 가능성의 여백임을

연극은 끝났다. 그림도 끝났다. 배우이자 화가였던 화자는 한 해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야말로 다사다난의 기억들이 주마등이다. 배우는 무대옷을 입고 춤추며 온갖 불빛들이 그를 따라 돌았다. 화가는 수려한 필력으로 도화지를 채워 넣었다. 시간은 흘렀다. 황금돼지해라 들떴던 마음 가라앉은 지 오래다. 화룡점정 마지막 붓끝을 들어 한 편의 그림을 완성한 것일까. 혼자서 객석에 남아 불빛 찬란하던 무대를 본다. 그림은 먹빛 혹은 오색으로 지면을 채웠지만 부러 남긴 여백인지 못다 그린 공백인지 순백의 공간이 더 많다. 음악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정적만 흐르고 있다. 힘찬 박수도 뜨겁던 관객의 찬사도 이젠 다 사라져 때때로 책망만 흐르고 있다. 떠들썩하기만 했던 황금돼지해를 보내며 장자의 소요유를 꺼내고 그룹 샤프의 노래를 꺼내드는 까닭, 단지 한해를 보내는 연말이어서가 아니다. 못다 이룬 일들에 대한 회한이 깊을 수도 있다. 장자를 통해서 묵화나 산수화를 통해서, 연극이 끝난 무대 위에 홀로 남아 지난 한 해를 돌아본다. 채움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겠다. 남아있는 시간들이 단순한 미련이 아님을 알겠다. 또 하나의 시선을 본다. 이승숙 외 '미학적 사고로 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연구-여백과 관계를 중심으로'에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여백은 일체의 모든 것이다. 시작이면서 끝이다. 여백은 없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가능성이다. 예컨대 작가가 작품을 완성할 때 영원한 미완성으로 남아 있는 여백은 그 안에 엄청난 사유와 장자의 소요유와 같은 자유로움이 있다. 올 해 내가 이룬 것들에는 연민이 없다. 문제는 불가피 마무리되는 한 해라는 작품의 여백이다. 나의 여백은 장자의 소요유 같은 대붕의 의지와 무한한 자유로움인가 영원한 미완성인가. 객석에서 바라보니 불빛 꺼진 나의 무대가 처연하다.

남도인문학 팁

시간의 분절, 한 해를 보내는 기점의 의미

일 년을 주기로 시간의 마디에 이름을 붙이니 그것이 명절이다. 그 중요한 정도에 따라 의미부여의 경중이 달라진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반겐넵이 이야기했듯,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의례가 있다는 것, 그것은 죽임과 살림의 컨셉으로 이루어져 있다. 죽임과 살림의 의례가 갖는 메커니즘은 이전 것을 비워내고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을 내 책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에서 진도지역의 상장례 풍속을 사례 삼아 풀어둔 바 있다. 시간의 분절 속에서 가장 큰 기점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삶을 이전과 이후로 나누기도 하고, 혹은 사망으로 인해 기점 이후가 없어져버리기도 한다. 크고 작은 질병을 통해 사람들이 거듭난다. 이 기점을 통해 이전과 이후의 삶을 분절하고 이후의 갱생과 거듭남을 기획하는 통과의례는 많다. 연말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의미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예컨대 하찮은 촛불 하나 켜고 생수 한 그릇 떠놓을지라도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기점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일 년이라는 연극이 끝났으니 홀로 객석에 앉아 올해를 묵상하려 한다. 해를 보내는 나의 명절의례다.

촛불하나.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