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2020 경자년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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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2020 경자년 설날
  • 입력 : 2020. 01.22(수) 13:20
  • 편집에디터

성혜림 작-날아올라,20F,2020

성혜림 작가▶ 학력 및 경력 2011.조선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014 "생각하는 아이" (유·스퀘어문화관 금호갤러리, 광주) 2015 어른이 된다는 건... (소아르 갤러리, 화순) 2016 어제의 나에게 오늘을 묻다.(해와문화예술공간, 광주) 2016 라본 개관1주년 청년작가 초대전"어른아이" (라본 갤러리, 광주) 2017 무등산coboc 초대전 "나는 어른입니까?" (무등산coboc, 광주) 그 외 다수 단체전 참여. 수상 및 선정 2016. 광주시 아트시내버스참여 청년작가 선정 2016. 제2회 전국섬진강 미술대전 "청년작가상" 수상 레지던스 2011 광주시립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양산동 6기 입주작가 2014 광주 무등현대미술관 3기 입주작가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살'의 고어는 '설'이다. 그래서 한 살을 한 설이라고도 한다. 설의 어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우리말 80% 이상의 어원을 추적하기 어렵다 한다. 수많은 세월동안 종교적 문화적 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에 의해 소멸과 생성을 거듭했을 낱말이나 개념의 원천을 어찌 다 찾을 수 있겠는가. 여러 민속학자들은 낯설다는 뜻으로 풀었다. 새해가 오지 않았으니 익숙하지 않다는 의미다. 꼭 그럴까? 고 지춘상 교수는 설쇠, 설장구 등을 용례로 으뜸 되는 날이라 했다. 설쇠가 상쇠를, 설장구가 수장구를 말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해당 장르에서 가장 잘 하는 사람, 가장 으뜸 혹은 앞잡이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비유해말하자면 시절의 리더인 셈이다. 한 살을 더 먹는 기점이 설뿐일까? 그렇지 않다. 태어난 날이야말로 물리적인 한 살을 더 먹는 기점이다. 각 사람들의 생애주기 기점이 다르듯, 시대마다 문화권마다 그 기점을 달리해온 점 불문가지다. 주역의 음양론에 의하면 양의 기운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가 한 해의 시작이다. 팥죽을 먹어야 나이 한 살 더 먹는다는 언설, 이제 민속상식이다. 동지로부터 30일 후로 설날을 정하기 때문에 1월 20일이 지나야 음력설을 맞이한다. 설날, 대보름날, 2월 초하루, 심지어는 입춘까지 한 해를 시작하는 시간의 기점으로 삼는다.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을 분할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관념들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 시간이 끝나는 지점까지 유효할 것이다.

죽임과 살림의 의례, 진정한 시작은 죽임으로부터

설날을 한자로 부르는 이름이 많다. 세수(歲首), 세초(歲初), 세시(歲時), 연두(年頭), 연시(年始), 원일(元日), 원단(元旦), 정조(正朝) 등이다. 모두 캘린더의 시작이라는 뜻이지만 시절의 머리, 정한 아침 등의 의미를 수반하고 있다. 설날을 한자로 신일(愼日)이라 하는 이유다.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 새로 오는 시간, 새로 오는 질서이기 때문에 더욱 살피고 조심하라는 뜻이지 않겠는가. 내가 항용 강조해온 것들, 생성은 반드시 소멸을 동반한다. 시작이라는 이름 안에 깃든 죽임과 살림의 서사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이런 의미들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다. 죽임의 기능이 약화되거나 생략되었을 뿐이다. 기법적으로는 이전의 것을 죽이고 새로 오는 것을 살리는 순서로 되어 있다. 마치 개신교에서 회개하고 거듭나는 과정을 의례화 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 예수님이 죽어 동굴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는 사건이 가장 상징적이다. 재생과 거듭남, 갱생과 시작 등의 의례들, 크든 작든 이전 것을 죽이는 것의 의미들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동국세시기>를 보면, 1년 동안 빗질해서 빠진 머리카락을 빗상자 안에 넣어두었다가 설날 해질 무렵에 태운다. 그래야 나쁜 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 왜 이런 풍속이 생겨났을까? 기능적으로야 여러 해석들 붙일 수 있겠지만 그 본질을 주목해야 한다. 머리카락은 손톱과 함께 망자의 오복주머니에 담는 신체다. 1년 중의 머리카락을 모았다가 태우는 것은 묵은해의 시간들을 화장시키는 이치다. 곧 이전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나를 탄생시키는 소멸과 생성의 의례다.

시간의 매듭을 거듭 상고하며

음력설이 양력설로 바뀐 것은 고종 32년인 1896년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치며 양력설을 쇠다가 1988년에 다시 공식적으로 음력설을 인정했다. 본래는 12월 동짓달이 설이 들어있는 달이었다. 땅의 수자로 보면 동짓달이 자월(子月)이고 정월이 축월(丑月)이 된다. 고대 중국을 예로 들면 하나라는 인월을, 은나라는 축월을 주나라는 자월을 정월로 봤다. 어느 나라 역법을 쓰는가에 따라 설날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을 분절하여 그 기점에 의미를 부여하는 까닭은 시간이 중단 없이 흘러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시간의 마디이고 매듭이라는 점 여러 차례 언급해 두었다. 이전의 시간과 다가오는 시간을 구분하여 매듭을 짓고 싶은 욕망 말이다. 설날의 의례가 시대마다 달리 나타나는 것은 시간을 재는 방식과 인식의 척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서기 외에도 불기, 단기를 비롯해 힌두력 이슬람력 등 다종다양한 역법 체계들이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동남아의 설날은 4월 13일이다. 이날 물 축제를 통해 이전 것은 씻어내고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다. 나는 이를 우리 무속의례의 씻김굿이나 기독교의 세례 등에 비유해왔다. 오래된 것이라 하여 궁극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시대별로 옷이 변하듯, 주변적인 풍속들은 털어버려야 한다. 문제는 시간의 매듭에 이름을 짓는 본래의 뜻에 부합하는 의미를 궁구하는 일이다. 예컨대 정월이나 상가의 윷놀이에 대해서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 접근해 풀이해 둔 바 있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올 수 없다. 불가역적이다. 계절은 순환하여 다시 온다. 가역적이다. 설날이라는 큰 기점은 불가역적인 세월을 가역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설날의 의례들이 어떤 형태 어떤 형식으로 구조화되건 본질적인 맥락은 여기에 있다. 시간을 새로 시작한다는 것, 그것은 다시 태어나는 일과 같다.

2020년, 남도의 귀성(歸省)객들에게 길을 물어

고려의 세시가 삭망 등의 자연력에 근거한 삶이 중심이었던 데 반해 조선에서는 자연력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 속절(俗節)은 시간을 관념하는 중요한 단위였기에 국가에서 정책을 시행하는 차원에서 활용하기도 했다. 사회적 이념을 실현하는 도구이기도 했다. 임금의 탄신일, 정월 초하루, 동지 등을 말하거나 단오, 추석, 동지 등을 말하기도 한다. 왕실 조상이나 외가 묘소에 치제하는 날로 육명일이 지정되기도 했다. 단오와 중양에는 국가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성균관 유생들이 치르는 특별시험을 절일제(節日製)라 했다. 오늘날로 보면 수능시험일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본래 시간단위의 마디들은 농사력과 어업력의 중요한 기점이 되기에 기억해야 할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것의 일부가 국가의 중요한 제도와 중첩되고 또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기점들이 절기화 되었다. 자연력이라는 마디 안에 은닉된 의미들이 있다. 정치적, 종교적 의미들이 덧입혀진 것. 있던 세시가 없어지고 새로운 세시가 삽입된다. 누차에 걸쳐 이 변화는 반복되어왔다. 설날은 그런 날이다. 그래서다. 귀성(歸省)이란, 시간의 씨줄과 공간의 날줄로 직조된 나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다. 과거의 조상을 살피고 미래의 후손을 살피며 현재의 나 자신을 삼가고 살피는(愼) 날(日)이다. 올해는 4월 총선이 있어 예년과 다른 의미들이 거론되곤 한다. 특별히 살펴야 할 일들이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국가의 중대사를 가를 선거가 될 수도 있다. 이전의 시간과 이후의 시간을 성찰하는, 마치 태아가 혼돈의 우주, 어머니의 태궁을 나와 광명의 우주로 나오듯이 또 다른 백년의 시작일지도 모를 일이다. 문제는 출생,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건을 충족하는 필요조건이다. 무엇일까? 암흑과 혼돈으로 연결되어 있는 탯줄을 자르는 일이다. 이 탯줄을 잘라내야 탄생과 시작이라는 사건이 성립되는 것. 나는 이를 1년을 기점 삼는 설날의 의미로 독해해오곤 한다. 남도의 귀성객들에게 이 질문을 돌려드린다. 나라의 위기마다 변혁의 꼭지점에 서서 이 나라를 견인해온 남도사람들이다. 이전의 무엇을 죽이고 새로 올 무엇을 살릴 것인가. 설날 아침, 불혹의 5.18을 맞는 남도사람들에게 그 장엄한 길을 다시 묻는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