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이월된 제석(除夕)의 처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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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이월된 제석(除夕)의 처용무
  • 입력 : 2020. 02.05(수) 12:35
  • 편집에디터

기사계첩에 실린 경현당석연도에서 묘사된 오방처용무의 춤사위(위키백과)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만들어 길에 버린다. 만든 사람을 상징하는 허수아비의 여러 부위에 지폐는 물론 한글이나 한자로 적은 불운 퇴치 기도문과 돈을 넣는다. 거지들이 와서 이 허수아비를 주워 돈을 가져간다. 돈과 함께 허수아비 만든 이의 1년간 액운도 함께 가져간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윌리엄 길모어, 알렌 등 초기 선교사들이 기록한 조선의 정월 대보름 풍속 묘사다. 니스벳은 '호남 선교 초기 역사'에서 이 장면을 더 상세히 설명한다. 윤은석의 발표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한국무속 이해'(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를 인용해 살펴본다. "모조인형은 정월 대보름 이외의 때에도 악귀를 피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에너벨 니스벳에 따르면 '가운데 애기'로 불리던 여인(윤함애, 훗날 이기풍 목사의 아내가 된다)은 남편과 시아버지가 역병으로 죽게 되자 30달러에 부잣집 첩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이후 가운데 애기가 첩으로 간 그 집의 신랑이 병에 걸렸다. 그러자 그 집 식구들은 모조인형을 만들어 산에 가지고 갔다. 귀신의 공격으로 남편이 득병(得病)하였다고 생각하고 남편 대신 이 모조인을 공격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이외에도 아이가 병을 얻으면 허수아비를 만들어 버리는 풍속들이 소개된다. 선교사들의 보고에서 볼 수 있듯이, 정월 대보름에 제웅(허수아비)을 버리는 풍속이 있었다. 사전에서는 제웅을 이렇게 설명한다. 짚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물건.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저녁에 제웅직성이 든 사람의 옷을 입히고 푼돈도 넣고 이름과 생년을 적어서 길가에 버림으로써 액막이를 하거나, 무당이 앓는 사람을 위하여 산 영장(永葬)을 지내는데 쓴다. 초우인 혹은 초인(草人)이라고도 했다. 제웅직성은 아홉 직성(直星)의 하나다. 나이에 따라 그 운명을 맡고 있는 아홉별 중 흉한 직성이다. 토직성, 수직성, 금직성, 일직성, 화직성, 계도직성, 월직성, 목직성이 있다. 남자는 열 살에, 여자는 열한 살에 처음으로 제웅직성이 들며 차례로 돌아간다. 직성에 맞지 않는다느니 직성이 풀린다느니 하는 언설이 여기서 나왔다. 주목할 것은 대보름에 허수아비를 버리는 풍속인 산 영장(永葬)이다. 허장(虛葬)이라고도 한다. 거짓으로 장사를 지낸다는 뜻. 대보름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거짓 장례를 치르는 까닭은, 나를 대신해서 나를 죽이는 대신(代身)맥이다. 질병을 막기 위해 닭 등을 제물로 올리는 남도굿의 하나다.

정월 대보름의 거짓 장례, 연말의 수세(守歲)와 육경신(六庚申)

대보름에만 거짓장례를 치르는 것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일 년이란 시간의 마디에 의미를 부여하여 의례를 행하는 일, 이른바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통과의례 절일은 모두 죽임과 살림의 장치를 배치해두었다. 설날을 가장 큰 시작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마지막 날은 가장 큰 결말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마지막일의 의식을 별세(別歲) 혹은 수세(守歲)라고 한다. 음력 섣달 그믐밤에 집안 구석구석에 등불을 밝히고 밤을 지새우는 일을 말한다. 섣달 중의 경신(庚申)에 해당하는 날에 밤을 샌다고 해서 경신신앙이라고도 한다. 설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려면 과거의 끈을 끊어내야 할 텐데, 왜 잠을 못 자게 한 것일까?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우선은 경신신앙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육경신(六庚申) 혹은 수경신(守庚申)이라 한다. 도교에서 민간화된 불로장생법의 하나, 연단술의 일종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우리 몸 안에는 상초 중초 하초에 삼시충(三尸蟲)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이 벌레는 경신일(庚申日)마다 천상의 옥경대에 올라가 그 사람의 잘못을 모두 옥황상제에게 보고한다. 경신일에 잠을 자지 않는 것은 이 날 삼시충을 못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다. 경신(庚申)일은 육십갑자 중의 57번째 일진, 이것이 60일에 한번 씩 돌아오니 1년 365일, 여섯 번 순환한다 해서 육경신이다. 이 날이 하늘의 기운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날이라고도 한다. 어쨌든 삼시충이 여섯 번 정도 못 올라가게 되면, 이제 인간은 길흉화복에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로워진다. 나는 해관 장두석 선생으로부터 육경신 수련 제안을 받았지만 잠을 안 자는 일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말았다. 수양(修養)과 수신(修身)의 풍속으로 자리를 잡은 까닭이야 더 추적해봐야 알겠지만, 한 해의 마지막 날은 별세(別歲) 즉 제석(除夕)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우물의 정화, 샘에서 건져낸 혼령

한 가지 사례를 더 인용한다. 1911년 11월 광주에 도착한 뉴랜드 선교사가 1915년 가을부터 목포 선교부로 자리를 옮겨 영광, 함평 지방을 맡아 사역했는데, 1916년 목포 선교부(지금의 목포양동교회) 주변의 한 샘에 투신자살한 며느리의 혼건짐굿을 보고 '한국인들의 우물정화'라는 제목으로 보고한 글이다. "몇 주 전에 며느리가 남편의 잔혹함과 시어머니의 입심과 매질을 당할 수 있는 데까지 견디다가 어느 날 저녁에 분노와 절망으로 시집을 떠났다. 허리에 무거운 것을 메고서 목포 선교부 근처에 있는 우물에 투신했다. 지난 2주간 큰 마을은 이 우물물을 길어먹다가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시체를 매장한 후 우물을 정화시키기 위한 큰 행사를 떠들썩하게 하였다. 공동 우물 주변에 1,000여명이 모였다. 이 여자의 어머니가 그녀의 옷을 가지고 와서 우물 주변을 돌았다. 갇힌 영혼이 빨리 빠져 나오도록 간청하고 애원하고 명령하였다. 여자 무당은 쌀을 찬합에 담고 뚜껑을 굳게 닫은 후 헝겊에 싸서 천으로 된 줄에 매달아 우물 속으로 내렸다. 이곳저곳에 흔들고 또한 여러 번 끌어올리면서 무슨 징조가 있는가를 살폈다. 물에 빠진 사람의 머리카락이 줄에 붙어 올라왔다. 말하기를, 죽은 자의 영혼이 찬합 속으로 들어갔다는 징조이므로 영혼이 끌어올려진 것이라 하였다. 공경의 말을 하고 공경의 절을 한 다음에 무리를 흩어지게 하였다. 한 사람이 북을 쳐서 건져 올린 영혼에게 악귀가 다가가지 못하도록 흔들어 놓았다. 다른 사람은 종이로 장식한 대나무 깃대를 휘저었다. 다른 무당은 끔찍스런 욕설을 하면서 길을 따라갔다. 드디어 악귀가 길을 따라 간 사이에 쌀 찬합을 열어 영혼을 안전하게 자유케 하였다. 아주 성공적인 정결의식이었다." 사람이 빠져 죽었는데도 2주간이나 모르고 그 물을 길어다 먹은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뉴랜드 선교사는 이 상황에서 열린 혼건짐 씻김굿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결론은 '우물의 정화'다. 물을 길어내고 바닥까지 깨끗이 청소하는 행위들이 뒤따랐겠지만, 분노와 절망으로 죽은 여인의 영혼이 우물을 더럽혔다고 생각하는 심리들을 어떻게 치유하고 회복하는지 세세하게 보고한 자료다. 몇 차례 걸쳐 내가 소개한 정화의식 씻김굿도 사실은 동일한 맥락이다.

이월된 제석(除夕), 처용무(處容舞)를 다시 주문하는 까닭

연초 칼럼에서 나는 죽임과 살림의 의례 중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의례들을 다루었다. 새로 오는 시간, 새로 오는 질서에 대한 성찰의 주문이었다. 이를 위한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 진정한 시작은 진정한 죽임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정월 대보름의 거짓장례, 허수아비 의례나 우물의 정화 혼건짐 씻김도 이와 같은 것이다. <동국세시기>에 나와 있기를, 1년 동안 빗질해서 빠진 머리카락을 빗상자 안에다 넣어두었다가 설날 해질 무렵에 태운다는 풍속도 소개해두었다. 여기서의 머리카락은 다름 아닌 죽은자의 오복주머니에 담는 신체라는 것. 결국 머리카락은 이전의 나를 죽이고 새로 올 나를 탄생시키는 소멸과 생성의 의례라는 점 말이다. 일 년 동안 쌓은 나의 허물을 온전히 제거해야만 새로운 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개 정초에 모여 있는 절일들은 이런 의미들을 함의하고 있다. 입춘, 대보름, 이월 초하루까지 죽임과 살림의 의례적 장치는 이어진다. 궁중에서는 한해가 끝나는 의식으로 구나의식(驅儺儀式)을 행했다.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제금(銅?)과 북을 울리면서 궁을 돌아다녔다. 유네스코무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처용무(處容舞)가 그것이다. 대보름을 맞아 처용무를 떠올리는 까닭, 뜻밖에 중국발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떠들썩하기 때문이다. 기껏 지난해의 질곡을 벗어던지는 의례를 하고 새로운 아침을 맞은 듯했는데 말이다. 각 학교들이 개학을 연기하는 등 시작은 꼬여버렸다. 야심차게 세웠던 한 해의 비전은 정지된 듯하다. 나라와 나라간의 신의가 의심받고 공장들의 가동마저 멈추고 있다. 물리적인 바이러스보다 불신과 오해의 전염이 더 위험하다는 점 지난 칼럼에서 지적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이, 마치 우리 마을의 우물에 뜬금없이 떨어져 죽은 주검과도 같은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원인제공자가 사실은 우리 스스로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위기를 벗어날 묘안은 없는 것일까? 아픈 자를 대신하는 대신맥이, 대보름의 허수아비의례 같은 장치 말이다. 마지막 날의 의례 제석(除夕)은 이미 이월(移越)되고 말았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이라고 손가락질만 하기에는 사태가 막중하다. 대보름날 논둑을 태우고 나발을 불며 북장고 울렸던 이유를 생각해본다. 4차산업혁명의 시대라는데, 처용의 기능을 담당하는 정치적, 외교적, 의료적 장치는 무엇일까? 나는 그저 춤꾼의 언설로 공손의 절을 하고 공손의 말을 할 뿐이다. 처용아 춤을 추자. 사악한 역병아 썩 물러가거라!

남도인문학팁

처용무(處容舞)에 대하여

처용무(處容舞)는 1971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에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통일신라 헌강왕(875~886)때의 일이다. 처용이 아내를 범하려던 역신(疫神, 전염병을 옮기는 신)앞에서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서 귀신을 물리쳤다. 향가 처용가(處容歌)에 남아 있다.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도다/ 둘은 나의 것이었고/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역신이 물러나며 말한다.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그려 지붕에 새기고 문에 붙였더니 역병이 오지 않았다. 이 의례가 고려, 조선까지 궁중나례(宮中儺禮)의 대표적인 무극으로 전승되었다. 처용(處容)의 형상들이 여러 가지 도깨비기와(鬼瓦)나 문(門) 등의 입구, 방패(防牌), 탈 등으로 재구성되었다. 민속적으로 보면 민간에 제액(除厄), 역신(疫神)을 막는 풍습 등으로 전파되었거나 혹은 궁중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처용'이라는 명칭은 <삼국유사>, <동경잡지>, <익재난고>, <소악부>, <용재총화>,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등 다양한 고문헌에 등장한다. 그만큼 궁중과 민간을 망라한 제액 의례였다는 뜻이다. 불가피하게 닥친 중국발 바이러스, 마치 처용과도 같은 역병을 어찌 물리칠 것인가, 보내지 못한 제석(除夕), 이월되어버린 죽임의 의례를 대보름에 다시 불러내는 까닭을 스스로에게 묻는다.

부산국립국악원 공연,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 처용무

국립국악원 무용극 처용-국립국악원

전남해남 땅끝마을 정월대보름맞이 용왕제, 제웅태우기-시사저널 김경민 기자의 글에서 발췌

정초에 액을 막기 위해 만드는 허수아비(제액), 한국민속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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