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청어(靑魚)에 대한 명상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청어(靑魚)에 대한 명상
  • 입력 : 2020. 02.12(수) 15:30
  • 편집에디터

청어 과메기의 본고장인 경북 영덕군 창포리 해안가에서 어민이 건조 중인 청어 과메기를 손질하고 있다. 뉴시스

"청 청 청어영자/ 위도군산 청어영자/ 청 청 청어풀자/ 위도군산 청어풀자~" 강강술래의 여흥놀이 중 대표적인 노래다. '영자'는 '엮자'의 와음, 청어라는 물고기를 엮고 푸는 모양을 놀이로 만들었다. 첫째 사람이 오른손을 자신의 목에 대고 왼쪽 어깨위로 넘기면 두 번째 사람이 자신의 왼손으로 앞사람의 손을 잡고 오른손을 자신의 목에 걸어 뒷사람이 잡도록 넘긴다. 세 번째, 네 번째 사람이 이와 같이 노래를 부르며 마치 고기를 엮듯이 꿰어나가다 마지막 사람에 이르면 청여엮기가 끝난다. 청어풀기는 그 반대로 풀며, 노래 가사를 '청어 풀자'로 바꾼다. 덕석(멍석)몰기, 덕석풀기, 쥔쥐새끼놀이, 꼬리따기, 대문열기 등의 강강술래 여흥놀이 중에서 가장 밀착도가 높은 놀이다. 강강술래 자체가 느리게 시작하여 빠르게 뛰는 순서로 구성된 놀이일 뿐 아니라, 문지방을 넘기도 힘들만큼 노래하며 뛰는 놀이인데, 자진강강술래로 뛰던 동작을 급속하게 이완시키는 놀이라는 점에서 청어엮기 놀이의 묘미가 있다.

강강술래 청어엮기, 조선의 물고기(朝鮮魚)로 불린 청어(靑魚)

국어사전의 풀이, 청어(靑魚)는 몸길이 35cm정도이고 늘씬하고 옆으로 납작하며 등은 짙은 청색이고 옆구리와 배는 은빛을 띤 백색이다. 한국 동해, 미국 북부, 일본 등지의 근해에 분포한다. 북태평양을 회유하는 한류성 어종이다. 등 푸른 생선의 대표격인 고등어(鯖魚)인가? 아니다. 고등어와는 다른, 지금은 우리 해안에서 거의 사라져버린 물고기다. 포항 등 동남해 과메기의 재료가 청어였다가 꽁치로 대체되었고 근자에는 다시 잡히기도 해서 소량이긴 하지만 청어과메기가 시판되기도 한다. 어쨌든 서남해지역에 전래되던 강강술래의 여흥놀이까지 청어를 엮고 푸는 행위들이 모의될 정도였으니 우리나라 전 해안에 걸쳐 분포한 조선의 물고기였다. 박구병의 '한국어업사'에 의하면 적어도 14세기 혹은 15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어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전 시기에 걸쳐 가장 풍부한 해산물이었던 셈. 김문기의 글 '기후, 바다, 어업분쟁'을 인용한다. 16세기 후반에는 청어가 중국의 요동과 산동에도 출현한다. 유성룡의'징비록(懲毖錄)', '녹후잡기(錄後雜記)'에 의하면, 해주(海州)는 본래 청어가 났는데, 최근 10여 년 동안 전혀 나지 않고 요동의 해양에서 잡히므로 요동사람들이 그것을 신어(新魚)라고 했다는 것. 이를 유성룡은 임진왜란의 징조로 여겼다는 것 아닌가. 또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도, 16세기 후반에 조선의 청어가 요동을 지나 산동지역에서도 많이 산출된다 하였다. 신어(新魚)는 새로운 물고기라는 말이니, 본래 중국 산동지역에는 없는 물고기라는 뜻. 조선에서 온 생선이라는 뜻으로 '조선의 물고기(朝鮮魚)'라 했다. 중국에서 이미 청어라는 민물고기 이름이 있어 이와 구분하기 위해 바다의 청어(海靑魚)라고 했다가 17세기 후반에야 '청어(靑魚)'라는 이름으로 일반화되었던 모양이다. 난중일기(1596년 12월 4일~1월 6일)에는 청어를 팔아 군량미를 비축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강강술래 임진왜란 활용설의 한 사례로 거론할 수 있을까? 선비를 살찌게 하는 생선이라는 뜻의 비유어(肥儒魚)라는 호칭이 있을 정도로 조선 수산경제의 중심이기도 했다. 고심청어, 등어, 푸주치, 구구대 등 지역에 따라 여러 이름들이 있다.

강강술래, 왜 위도와 군산의 청어를 노래했나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서해의 중심 위도와 군산(고군산)에 청어가 많이 분포했다는 점, 강강술래의 대표적인 놀이 지역(서남해)이 위도, 군산의 청어잡이와 관련 있다는 점이다. 위도와 군산에 청어가 얼마나 분포했는지는 조기파시 이전 청어파시의 대표적인 공간이었다는 점을 들어 설명할 수 있다. 파시(波市)는 무엇인가? 고기가 한창 잡힐 때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을 말한다. 황해도 연평도의 조기파시, 전북 위도의 조기파시, 거문도 및 청산도의 고등어파시, 추자도의 멸치 파시 등이 유명하다. 물결이라는 뜻의 '파(波)'가 주는 함의가 깊다. 일차적으로는 바다의 뱃전 위, 바닷가 등의 파도를 상징하는 것이고, 고기잡이배와 상고선(물고기를 사서 운반하는 배)들이 마치 물결처럼 집산했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다. 강강술래의 대표 분포지는 진도, 해남, 신안, 완도를 포함하는 전남 전 지역 혹은 서남해지역이다. 위도와 군산의 청어잡이에 이 지역 어부들이 많이 참여했다는 뜻이다. 조기의 경우 1~2월 남해의 월동기를 거쳐 2~3월엔 흑산도, 4월엔 칠산도, 5월경까지 연평도, 7월까지 대화도 어장 등으로 고기 회유로를 따라 파시가 이동하며 형성된다. 청어라고 다를 바 없다. 청어의 회유로를 따라 북상하며 파시가 이동했을 것이고 그 중심에 위도군산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궁금한 점은 조기파시나 굴비 등에 관한 어로풍속이 현저하게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엮자 노래는 없고 청어엮자 노래가 남아있는 것이다. 더 깊은 연구들이 필요해 보인다. 청어를 비롯한 서해산 물고기의 집산지가 위도군산이었다는 점은 거의 모든 어로민요들에 나와 있다. 위도와 칠산바다, 연평도 등이 노래되기 때문이다. 띠뱃놀이로 잘 알려진 위도 원당(願堂) 당제사 내력에서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서종원의 '위도띠뱃놀이 원당중수기(願堂重修記), 1900년)'연구에 보면, 당집을 보수할 때 여러 지역 사람들이 갹출하였다는 점 주목된다. 전북 부안의 여러 지역을 포함해 전남의 법성포, 지도군(지금의 신안), 추자도, 충남의 여러 지역 사람들이 대거 등장한다. 결론적으로 위도군산은 청어, 조기, 갈치 등의 파시 중심 지역이었고 서남해 전 지역의 어부, 상인, 선주 등이 당집 중수를 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강술래의 대표 전래지인 서남해 사람들이 위도와 군산의 청어잡이를 모의해 놀이를 만든 이유다. 문제는 조선의 물고기로 불리던 청어가 왜 없어져 버렸을까 하는 점, 기후위기와 관련한 대답을 팁에 부기해둔다.

홍도의 청어미륵(靑魚彌勒), '징비록(懲毖錄)'의 유성룡에게 길을 물어

홍도에 청어미륵이 있다. 죽항미륵이라고도 한다. 죽항마을에서 깃대봉으로 난 산길을 오르다보면 4~5부 능선쯤에 모셔져 있다. 미륵이라고는 하지만 홍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끈한 돌이다. 본래 2기를 모시고 남미륵(남자미륵), 여미륵(여자미륵)이라고 불렀다. 관련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홍도어장에 매년 청어파시로 문전성시를 이루던 때가 있었다. 조선의 물고기로 불리던 청어파시가 열리던 곳은 홍도, 흑산도를 비롯해, 위도군산으로 북상하며 이어진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청어가 그물에 들지 않았다. 바다에 그물을 던지면 둥근 돌만 걸려 나왔다. 어느 날 홍도 한 어민의 꿈에 현몽하기를, 그물에 걸린 돌을 깃대봉 좋은 곳에 모시면 풍어가 든다 하였다. 꿈대로 그 돌을 모셨더니 다시 청어 만선을 할 수 있었다. 홍도사람들은 이를 청어미륵이라고 부르고, 고기잡이 나가는 선주들은 이곳에 와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소빙기가 지나고 청어가 조선의 바다에서 사라진 후, 이 돌미륵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2005년경에 유실되었던 것을 2013년 탐방로 정비 작업 중에 발견하였다. 유실 후 자연석으로 대신 세웠던 것을 원래의 미륵으로 다시 세운 것. 높이가 42cm, 둘레가 85cm 크기의 달걀모양 타원형이다. 강강술래의 여흥놀이 중 청어엮기 놀이와 홍도의 청어미륵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청어가 서남해 뿐만 아니라 조선의 물고기로 불릴 만큼 대표어종이었다는 점이다. 서남해 도서지역 사람들이 위도군산에 이르러 청어를 잡고 그 모습들을 모의하여 놀이했던 것은 청어의 풍어와 다산을 기원한 일종의 관념적 장치이기도 했다. 하지만 청어는 조선의 바다에서 거의 없어졌다. 주요한 이유는 소빙기를 중심으로 하는 기후변화다. 거기에 청나라와 일본의 어업 약탈이 부가되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말했다. 청어의 회유와 이동은 임진왜란의 징조라고. 그런 예측이 가능했던 것은 유성룡의 국제적 감각은 물론 자연환경의 변화와 인문환경을 교직하여 풀이할 수 있는 식견이었다. 예컨대 기후온난화로 많은 물고기들이 회유와 산란지를 바꾼 지 오래다. 물오징어와 멸치가 서해를 따라 북상하는가 하면 이름 모를 열대어들이 남해안을 잠식해 들어온다. 기후변화 차원이 아니라 기후 위기라고들 한다. 그래서다. 우리 같은 어민들은 그저 홍도의 깃대봉 아래 청어미륵을 놓고 풍어와 다산을 빌며 여흥삼아 청어엮기 놀이를 한다. 하지만 국가와 위정자들은 다르다. 유성룡처럼 청어의 유동을 보고 임진왜란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스로에게 그런 능력이 없으면 위기를 극복할 또 다른 이순신들을 천거해야 할 일이다. 구한말 청어의 유실과 더불어 망국과 분단을 거듭해온 환경과 국제사를 상고해보는 까닭이기도 하다. 기후위기의 시대,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 등 환경위기의 시대, 청어미륵 앞에서 길을 묻는다. 혜안을 지닌 또 다른 유성룡이여 여기 답하라.

남도인문학팁

그 많던 청어(靑魚)는 어디로 갔을까

김문기의 논의 '기후, 바다, 어업분쟁', '중국사연구 제63집'의 내용을 빌려 공부자료로 삼는다. 조선의 물고기 청어가 중국 요동과 산동지역에 출현하고 있는 것은 소빙기 기후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소빙기(小氷期, Little Ice Age)란 무엇인가? 영어사전에는 역사시대에 산악빙하가 신장한 시기라고 설명한다. 16세기 말에서 시작되어 1560년, 1750년, 1850년쯤에 빙하가 최대가 되었다. 1580년대를 전후한 시기는 소빙기의 제2차 한랭기가 시작되던 시점이다. 14세기 혹은 15세기부터 19세기 중후반까지 이어지는 소빙기 안에서도 온난과 한랭한 기후의 주기적 변동이 있었다. 가장 전형적인 소빙기를 나타내는 17세기 소빙기는 그 중에서 제2차 한랭기에 속한다. 중국에서는 제2차 한랭기의 시작을 1600년 혹은 1620년으로 보고 있지만, 실제 1577년 이후부터 극심한 한랭현상을 볼 수 있다. 1570년대 후반부터 17세기 소빙기가 시작되었다는 것. 즉 17세기 소빙기가 시작되던 때, 요동과 산동에 청어가 출현했던 것이다. 그런데 1850년경에 이르면 중국연해에서 청어가 점차 사라지고 청나라 어선들이 대거 서해안으로 몰려들어온다. 이를 제2기 어업분쟁이라 한다. 예컨대 1850년에 청나라 어선 80~90척에 500명~600명이 풍천 앞바다에 나타나 제멋대로 고기를 잡고, 조선어민들을 구타하거나 물건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 끊임없는 어전(漁箭)약탈이 진행된다. 문제는 1870년대 말부터 청어가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것. 급기야 충청도와 전라도의 청어는 1890년대에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청어가 사라지자 이후 청나라 어선은 위도와 고군산도 부근에서 갈치, 새우, 준치, 민어 등으로 약탈 어종을 바꾸어 나간다. 이런 일련의 국제적 문제를 포함한 어종의 변화, 파시의 변화들은 기후변동에 의한 해양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세계적으로 소빙기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특히 청나라와 일본의 침탈과 약탈이 있던 조선후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후온난화에 따른 기후위기의 시대와 중국 일본의 약탈이 모종의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청어 과메기의 본고장인 경북 영덕군 창포리 해안가에서 어민이 건조 중인 청어 과메기를 손질하고 있다. 뉴시스

영암삼호 강강술래 중의 청어영기-이윤선 촬영

영암삼호 강강술래 중의 청어영기-이윤선 촬영

영암삼호 강강술래 중의 청어영기-이윤선 촬영

청어-나무위키

홍도 청어미륵 주변에서 바라본 홍도앞바다-이윤선촬영

홍도 청어미륵-이윤선촬영

홍도청어미륵 안내문-이윤선 촬영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