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달비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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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달비에 대한 묵상
  • 입력 : 2020. 02.19(수) 13:24
  • 편집에디터

신윤복 미인도 가체. 뉴시스

"서울갔던 울 아배가/ 궁초댕기 떠 왔더니/ 울 엄매가 접은 댕기/ 우리 올케 성낸 댕기/ 울 오래비 야단댕기/ 우리 동생 눈물댕기/ 내 하나는 사랑댕기/ 담 안에서 널뛰다가/ 담 밖으로 빠졌는가/ 남도령이 주웠는가/ 이도령이 주웠는가~" 영남지역에서 전승되던 댕기노래의 일부다. 이후의 가사는 어떻게 전개될까? 총각이 처녀의 댕기를 주웠으니 혼인을 해주면 주겠다는 청유로 이어진다. 처녀에 대한 총각의 사랑이라고나 할까. 총각은 수령의 잔심부름를 하던 통인(구실아치)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통인(通引)노래라고도 한다. 댕기는 무엇인가? 길게 땋은 머리끝에 드리는 장식용 헝겊이나 끈이다. 꽃다발이나 꽃바구니에 드리는 긴 오라기를 말하기도 한다. 도투락댕기는 어린 여자아이가 드리는 자줏빛 댕기다. 작은 헝겊을 두 끝이 뾰족하게 겹쳐 포개고 그 허리를 접은 곳에 댕기를 단 형태다. 여자아이에게만 해당되는가? 총각들도 댕기를 한다. 댕기머리 총각이 그것이다. 댕기머리는 남녀 모두 미혼을 상징한다. 처녀총각이 만나 혼인에 이르면 댕기머리는 어떻게 되는가. 남자는 상투를 틀고 여자는 쪽머리를 했다. 둘 다 혼인을 상징한다. 댕기머리를 다른 말로 '달비머리'라 한다. 댕기와 달비가 같거나 적어도 비슷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달비를 서로 엮어 만든 얹은머리를 가체(加髢)라 한다. 가체의 형용이야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휘황하지만 그 행간을 읽는 시선이 필요해 보인다. 상투는 따로 지면을 마련할 계획이다.

댕기머리에서 쪽머리까지, 가체의 종류

한편으론 별도로 머리카락을 잘라 가지런히 묶어둔 것을 달비라 한다. 그래서 '달비집'은 가발을 넣어두는 곳이다. 달비를 여러 겹으로 장식한 머리를 가체(加髢) 곧 가짜머리카락이라 한다. 숱이 적은 머리에 덧대는 가발이 체(髢)다.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다. 수체(首髢), 체발(髢髮), 월자(月子), 다리, 다래, 달비 등이다. 표준어는 '다리(髢)'다. 달비는 댕기라는 뜻도 가지고 있으면서 장식한 후의 가체라는 뜻도 포함하니 중의적이다. '여자들의 머리숱이 많아 보이라고 덧넣은 딴머리'라는 설명이 가장 쉬워 보인다. 주목되는 이름은 월자(月子)다. 19세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에 보면 월자장(月子匠)이란 화제(畵題)가 보인다. 달비를 모아 제작하는 장인을 이르는 말이다. 궁중에서 달비를 모아 장식하는 머리 모양을 이르는 이름이 여러 개인데, 민간에서는 월자(月子)로 호명했음을 알 수 있겠다. 잘라 낸 머리 묶음을 달비라고 불렀고 이를 장식한 형체를 월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머리 모양 장식이 글자 월(月)의 형태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월자와 가체는 같은 말이다. 조선시대 그려진 대부분의 풍속화들 속에서 월자모양을 확인해볼 수 있다. 대표적인 가체는 대수머리, 어여머리, 떠구지머리, 첩지머리, 얹은머리 등이다. 대수(大首)머리는 조선시대 왕비가 대례복을 입을 때 하던 머리다. 어여머리는 조선시대 궁중이나 양반집의 아녀자들이 예장할 때 머리에 얹는 큰머리다. 순정효황후 어여머리 사진이 잘 알려져 있다. 솜 족두리를 쓰고 그 위에 큰 머리를 얹은 다음 옥판과 화잠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 다시 활머리를 얹었다. 신윤복의 그림에 나오는 여러 기녀들의 머리들이 모두 가체의 표본이다. 김홍도의 그림이나 유운홍의 기녀도 등에 나오는 가체도 매우 흥미롭다.

월자(月子)와 가체(加髢)의 민속

민간으로 전파된 후 어떤 변화들이 있었는지 내가 자세하게 추적하지는 못하였다. 대개 머리칼 땋기, 꼬기, 엮기 기법으로 땋아 올린 형태를 기본으로 삼는다. 전술한 머리들 외에도 두레머리, 개수머리, 조짐머리, 얹은머리, 새앙머리 등의 이름이 전해온다. 이런 월자들을 만들어 머리에 얹고 첩지머리, 쪽머리 등에는 제 머리와 '다리(髢)'를 같이 빗어서 사용했다. 신윤복의 그림 <계변가화(溪邊佳話)>에는 머리카락을 땋아 만드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땋으면서 손가락 굵기의 '다리'를 반복적으로 넣어 길이와 부피를 연장하는 방법이다. 즉, 가체를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 얹거나 덧붙여 고정하는 방식이다. 월자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가지런히 모아놓은 달비는 매우 큰 값에 매매되거나 공출되기도 하였다. 궁중머리로 알려진 큰머리와 어여머리의 월자를 갖추어 민가에서 혼례를 치룬 유행기도 있었다. 월자는 형식, 소재, 구성, 착용 방법 등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오래된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널이 유행한 풍속사적 맥락이 있는 문화유산이다. 전 순천대 총장을 역임한 고 최덕원 교수에 의하면, 남도지역 해안이나 섬지역에서는 이 달비를 신앙물로 삼기도 했다. 당나무 등 고목에 걸어두고 지나는 선박들이 신산고사(가장 먼저 잡은 조기를 바쳐 지내는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처녀, 생식, 생산으로 이어지는 다산과 풍어의 고대로부터의 관념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집 몇 채를 팔아야 살 수 있는 가격을 형성하기도 했다. 머리를 장식하는 사치가 극에 달하면서 국가적 금지령이 내린다. 1788년(정조 12) '가체신금절목'이 시행된 후 머리카락 대신 나무로 만든 떠구지나 머리카락과 옷감을 엮어 만든 '다리'가 사용되기도 했다. 장구한 역사를 거쳐 현재도 다양한 머리채가 유행하거나 전승되고 있다. 어쨌든 우리 민족의 다채로운 미적 감각과 고유의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적절한 소재이기도 하다. 모양이나 형태는 바뀌었지만 현대에도 끊임없이 반영되는 미적 대상물이 머리장식이다. 지역에 따라 새로운 양식들이 출현하거나 창조된 사례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류사를 관통해온 풍속이기 때문이다. 남도지역의 월자들은 어떠할까. 지역적 월자의 변화나 시대적 변천, 신분 차이의 형식들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콘텐츠가 있다. 다른 문화권, 문명권들과의 비교 연구도 흥미롭겠다. 고대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사회상과 생활상을 반영하는 것은 물론 의례와 신분 등의 풍속, 심지어는 사회사연구에도 중요한 유산임에 틀림없다.

달비를 자르는 사람들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즐겨 말한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옛것에 토대를 둔 변화라 할지라도 그 근본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연암 박지원이 그의 제자 박제가(1750~1805)의 문집 초정집서(楚亭集序)에 쓴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이 어찌 문장에만 해당되겠는가. 월자(月子) 즉 가체(加髢)는 여인들의 갖가지 머리 모양을 만들기 위해 고안된 전통적인 기술과 방식이다. 조선시대, 고려시대, 심지어는 고대 유물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할 수 있는 유서 깊은 유산이다. 이 전통이 지금은 어떻게 전승되고 있을까? 여기서 가체의 행간을 읽는 시선이 필요하다. 나는 줄곧 쓰여지지 않고 그려지지 않은 행간과 여백을 읽는 것이야말로 패러다임이 바뀐 시대의 마땅한 관점이라 여겨왔다. 가체의 사치와 부담에 얽힌 풍속읽기도 그 일환이다. 사례가 있다. 한 부잣집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맞아 갑자기 일어서다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 가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그녀의 나이는 13세였다. 이익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풍속이 남의 머리털을 취하는데, 남자 것인지 여자 것인지 가리지 않고 장식품을 만드니 아주 불가한 것이다" 박규수는 '거가잡복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의 머리털을 훼손시켜 자신을 꾸미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사람에게는 그 부모가 물려준 몸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부유하고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생각해본다. 왕궁으로 혹은 양반가로 공출당한 달비는 누구의 것이었을까? 누군가는 낮은 가격에 자신의 머리칼을 팔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강제로 빼앗겼을 것이다. 지난 해 말 몇 개의 일간지에 백혈병 소아암 환자들을 위한 모발 기증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20 여 년 전부터 머리카락을 꾸준히 기증해오던 교사와 학생들 몇 명에 관한 기사였다. 기능적으로만 보면 고대로부터 달비를 자르던 전통이 전승되었다고나 할까. 장식머리인 월자가 아니라 백혈병 소아암 환자들이 쓸 가발을 만든다는 점이 다를 뿐 달비를 자르는 행위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기증하기 위해서는 염색도 하지 않고, 가능하면 샴푸도 쓰지 않는 등 관리를 잘 해야만 한다. 기부 요건인 25cm 넘게 머리카락을 기르려면 평균 2년 이상 소요되므로 학생들의 경우는 전 학창시절을 신경 써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간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에서 12년간 86,388명의 기부성과를 거두었으나 기증모발 관리 문제로 2019년 2월 마감하였고, 현재는 '어머나운동본부'에서 접수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달비를 자르는 사람들, 가난한 누군가의 머리칼은 공출되거나 싼값에 팔려 부유한 누군가의 머리장식이 되었고, 선한 누군가의 머리칼은 소아암환자의 가발을 위해 기증되기도 했다. 전통적인 방식의 가체를 바라보는 시선, 그 미학적 준거를 새삼 뒤집어 읽을 필요가 있다.

남도인문학팁

가체(加髢)의 역사

'당서(唐書)' 신라조에 아름다운 두발을 머리에 두르고 주채(珠綵)로 장식하였다 했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는 '미체(美髢)'라는 말이 나온다. '아름다운 덧머리' 즉 가체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미 삼국시대부터 덧넣는 머리가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가체는 고대시대 이래 두식에 따라 발달해왔다. '가례도감의궤'나 '책례도감의궤', '상방정례'등에 의하면, 궁중 의례용 월자는 상의원의 체발장, 월내장이 담당하였다. 내명부 상의원의 직책인 종6품 전식, 종 7품 전의, 수모 등이 두식을 관장하였다. 궁중에서 평생 월자를 만드는 상궁의 존재를 통해 월자 전통의 맥락을 엿볼 수 있다. 한말에는 각 지역으로부터 공출된 달비로 월자를 제작하였다. 김용숙의'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에 의하면, 덕수궁 제조상궁 천일청(天一淸)이 월자 제작을 전문적으로 맡았다는 보고가 있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장안의 여인들이 높은 머리를 좋아하여 그 높이가 30여센치에 이르는 구름모양의 월자로 치장하였다. 고대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도 다양한 유물 속에서 머리의 모양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실제 머리와 가체, 여인들의 머리를 단장하는 전통머리치레의 역사는 매우 깊고 다양하다. 궁중가례, 민간가례는 물론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여인들의 머리치레는 계급, 신분의 구별과 심지어는 주술적인 의미들을 담고 있다. 부녀자들의 가체 사용이 금지된 것은 1756년(영조 32)때 일이다. 이후 1788년 가체 금지령이 내리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얹은머리, 트레머리, 쪽머리, 큰머리 등의 유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흐름은 1895년 단발령 시기까지 이어진다. 민간에서 널리 유행한 것은 궁중의 법도를 익힌 장인들이 나와 여러 곳에서 월자 생산을 도모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이후 월자의 제작은 희소해졌지만 근대형식이라고나 할까, 다양하게 머리채를 장식하는 사례들은 그치지 않고 지속되고 있다.

신윤복 미인도 가체. 뉴시스

신윤복의 그림-계변가화(溪邊佳話)-가체를 땋는 풍경을 그렸다

자신의 모발을 기증해온 방주현 교사-이 달비로 백혈병 소아암환자들의 가발을 만든다

해남윤씨종가 미인도 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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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