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보천교의 예악 천지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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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보천교의 예악 천지굿
  • 입력 : 2020. 02.26(수) 13:15
  • 편집에디터

1929년 완공된 정읍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 십일전 전경-뉴시스

"하루는 걸군(지금의 농악)이 들어와서 굿을 친 뒤에 천사께서 부인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시고, 친히 장고를 들어 메고 노래를 부르시며 가라사대, '이것이 곧 천지굿이라. 나는 천하 일등 재인이요 너는 천하 일등 무당이라.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 가서 빌어야 살리라' 하시고 인하여 부인에게 모당도수를 정하시니라. 하루는 천사께서 반듯하게 누우신 뒤에 부인으로 하여금 배 위에 걸터앉아 칼로 배를 겨누며, '나를 일등으로 정하여 모든 일을 맡겨 주시렵니까?' 라고 다짐을 받게 하시고, 천사께서 허락하여 가라사대, '대인의 말에는 천지가 쩡쩡 울려 나가나니 오늘의 이 다짐은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으리라' 하시고 이도삼, 임정준, 차경석 세 사람으로 증인을 세우시니라" '대순전경'(증산교본부, 1947)에 나오는 대목이다. 1908년 1월 정읍 입암면 대흥리에서 벌어진 일명 천지공사(天地公事) 풍경이다. 강일순(姜一淳)과 고판례(高判禮)가 행한 굿판, 이를 '천지굿'이라 한다. 이때 강일순의 나이 30대 후반이었다. 풍경은 살벌하게 이어진다. 마당에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책들을 찢어놓고 고판례가 그 위를 밟으며 칼춤을 추었다. 억눌려 살아온 여성들을 해방시키는 굿이었다고나 할까. 이때 고판례가 받은 수부(首婦)라는 호는 여성의 우두머리란 뜻이다. 고판례의 칼춤 아래 찢겨진 제반 종교 서적들은 여성, 나아가 천한 계급들을 억압하는 상징이었던 셈이다. 마치 역병과 가뭄에 벌이는 여성 전유의 도깨비굿이라고나 할까.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을 중심 세우는 사회로의 선언이니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뒤집히는 개벽굿이었던 셈이다. 동학혁명의 발발지 전북 고부에서 태어난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제창한 증산교의 시작은 1901년 20세기 벽두였다. 증산교를 초기에는 훔치교(吽哆敎)라 했다. 훔(吽)은 태을주(太乙呪) 주문을 시작하는 말이다. 소(牛) 울음소리(口)를 상징하는데, 창조의 근원 소리라고 주장한다. 무속, 선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적 요소들을 포함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천지굿, 증산교(甑山敎)에서 보천교(普天敎)까지

신흥종교들이 매양 그렇듯이 창시자를 메시아로 받드는 경향이 있다. 강일순을 옥황상제와 미륵불로 치부하는 것도 그렇다. 옥황상제는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다. 미륵보살은 내세에 성불하여 사바세계에 나타나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일종의 메시아 신앙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을 시발삼아 일어났던 1894년 동학혁명 때, 강일순은 불과 24세였다. 불같던 나이에 겪은 동학혁명의 참상이 주었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일순은 유, 불, 선, 음양참위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였으며 충청도 비인에서 김경흔에게 태을주(太乙呪) 주문을 받고 연산에서 '정역(正易)'의 저자 일부 김항을 만나 시대를 논의한다. 31세 때인 1901년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를 시작한지 며칠 만에 천지대도를 깨달았다 한다. 이후 신통묘술 예언을 하고 병을 치료하는 등 기적을 행하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유, 불, 선을 융합했으며 기독교적 요소들까지 포괄한데다 신통력까지 발휘하니 어지럽던 세상에 주목을 끌 수 있었겠다. 24절기에 따라 24종도가 있었다거나 경전 28장에 따라 28종도가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은 추적해보지 못했다. 차경석과 그의 이종누나 고판례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이른바 수부공사를 하게 될 때까지 수련과 수양의 시절이었겠다. 불안한 시대 탓인지 교세는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1909년 39세의 짧은 나이로 죽게 되자 교세가 기울게 된다. 침잠기를 거쳐 1914년, 증산 강일순을 교조(敎祖)삼고 고판례를 교주(敎主)삼는 선도교(仙道敎)가 재출발한다. 교세가 번창하게 되자 이종동생이었던 차경석이 다시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분리한다. 고판례는 1919년 다시 태을교(太乙敎)라는 이름으로 교파를 분리한다. 이후 안내성이 여수에서 선도교(仙道敎, 1913)를, 이치복이 원평에서 제화교(濟化敎, 1916)를, 김형렬이 전주 모악산에서 미륵불교(1919)를 세운다. 이외에도 박공우, 문공신, 김광찬 등이 각각 교파들을 세우며 분파된다.

가짜 종교와 가짜뉴스를 소비하는 사회

당시 600만 신도였던 보천교는 불과 몇 십 년 만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한국신종교대사전'(김홍철 편저, 2016)에 의하면, 1860년 수운 최제우의 동학 이후 창립된 신종교만 700여개에 달한다. 크지도 않은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종교를 재구성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응당 이단(異端) 논의가 뒤따른다. 굳이 표현하자면 가짜종교 논쟁이라고나 할까. 이단은 전통이나 권위, 세속적인 상식에 반하는 주장이나 이론을 말한다. 코로나19 사태로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신천지'도 그 중 하나다. 신천지가 이단인지 아닌지는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가지는 전통이나 권위와 상식에 반하는가 조응하는가다. 전체 공동체의 안위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종교집단이라면 그것이 신천지이든 개신교 일반이든 혹은 불교의 어떤 종파든 이단의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칼럼에서 나는 무안군 현경면 물바위를 소개한 바 있다. 국가적 위난에만 바닷물이 넘친다는 신비한 바윗돌이다. 다시 한 번 가봤다. 아직 물이 넘치지는 않은 모양이더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할까? 세상이 어지럽고 균형이 안 잡히니 풍설(風說)만 요란하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 삼아 판단하고 행동해야하는데 요설에 더 귀를 기울이거나 국가의 정책 결정에 불만을 토로한다. 고작 물바위 전설이나 바라보는 꼬락서니랄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왜 사람들이 이 바위에 현실을 투사하는가에 있다. 내가 도참바이러스라 이름 짓고 현상을 훑어봤던 이유다. 도참(圖讖)은 설화나 루머로 유포되는 예언들이다. 앞날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이다. 대표적인 것이 정감록(鄭鑑錄)이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온 유사본들이 있다. 주로 사회가 불안할 때였다. 위정자의 말을 인정하지 않거나 반발하는 것은 사회가 불안정하다는 얘기다.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빈부의 격차가 심할 때 융성한다. 이것이 극에 달하면 혁명이 일어난다. 백성(시민)이라는 이름의 배는 위정자들을 싣고 순항하다가도 어떤 격절(隔絶)에 이르면 태풍 불듯 배를 뒤집어 버린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19 여파를 보니 상황이 만만치 않다. 물리적인 병균만 문제가 아니라 루머에 현혹되는 도참 바이러스가 다시 소환되는 게 문제다. 가짜뉴스를 넘어 가짜 종교까지 소비하는 사회라고나 할까. 20세기 초입, 700여개의 종교를 만들면서까지 고군분투했던 우리네 조상님들을 그려본다. 처연(悽然)하다. 무엇이 그들의 심령을 그리 갈급하게 했던 것일까. 다시 21세기 초입, 우리는 1세기 전과 얼마나 달라졌거나 성숙했을까. 동학과 증산교, 그리고 보천교의 신종교들을 후천개벽으로 호명하는 시대정신의 응전이라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른바 이단으로 호명되는 종교들의 준동 또한 정통종교와 정치 등 사회 시스템에 대한 고발일 수 있다. 정통이라 호명되는 종교가 그만한 역할과 권위를 갖고 있는지 혹은 이단보다 더 이단이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일이 중요해진 셈이다. 코로나19 진정국면이 오면 아마도 담론화 될 종교적 이단(異端)논의의 밑자락을 우선 신종교 증산교와 보천교를 예증삼아 깔아둔다. '신천지교'가 더 융성할지 '보천교'처럼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전염병의 창궐 못지않게 가짜뉴스와 종교 이단의 소비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에 기생하는 기생충, 가짜뉴스와 가짜종교에도 전염되는 중이다.

남도인문학팁

보천교(普天敎)의 예악(禮樂)이었던 연예 농악

증산 강일순은 왜 천지굿이라 이름하고 손수 장구를 메고 춤을 췄던 것일까? 그 이유를 내가 정확히 알 수야 없지만, 증산교가 표방했던 선천과 후천의 개벽사상 혹은 주문 태을주(太乙呪)와 관련해서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태을주는 모든 질병을 내쫒고 선계(仙界)의 개벽을 '태을천상원군'에게 기원하는 주문이다. 이 글씨를 써놓으면 부적이 된다 했다. 충청도 비인에 살았던 도인 김경흔이 50여 년간 공부한 후에 이 주문을 얻어 증산에게 주었고 이를 다시 차경석이 보천교로 가져간 셈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 호명하는 우도농악 즉 마을농악에서 연예농악으로 변화된 형태의 농악이 발흥한 곳이 보천교를 중심으로 하는 정읍이라는 점이다. 단체로는 전라도걸궁패, 정읍농악단, 협률사 등이 있다. 양옥경의 글 '근현대시기 호남 우도지역 연예농악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의미'(한국음악사학보 61집)를 인용한다. 보천교는 농악을 의례음악 곧 예악(禮樂)으로 삼고 전국의 농악인들을 총 결집하여 큰 농악판을 벌였다. 1930년대 보천교 교당 뜰에 전국의 쇠잽이, 장고잽이들이 자주 모여들었다. 모두 모집, 선발된 자들이었다. 우도농악의 명인 김오채의 구술에 의하면, 정읍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 교당을 짓고 낙성식할 때도 그랬고, 일명 차천자(차경석을 天子로 불렀음) 집에서 농악판을 많이 벌였던 것 같다. 이때 차천자가 앉아서 구경하곤 했다는 것. 전북대 교수 김익두가 차용남의 어린 시절 목격담을 구술 받아 증언한 바에 의하면, 차경석 교주가 십일전 좌상에 좌정한 가운데, 화려한 복색으로 차려 입은 여러 무리의 농악대가 현란한 진법과 율동 및 연주를 선보이면서 서로 경합을 벌였다는 것 아닌가. 지금으로 말하면 농악의 진법(陣法), 악기 겨루기 등이다. 천운을 돌리기 위해 했다는 열두 발 상모놀음, 도둑잽이굿 등도 같은 맥락이다. 보천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상쇠들은 지금 우도농악의 초창기 명인들로 손꼽힌다. 우도농악이 그만큼 보천교의 천지굿에 영향 받은바 크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농악의 본래 기능은 마당밟이 곧 정초의 지신(地神)을 밟고 지기(地氣)를 울리는 일이다. 축귀(逐鬼)하니 증산의 입장에서는 태을주를 연주하는 일과 같았을까? 아니면 오방색, 삼색 띠, 열두 발 상모, 십이 채 등의 용어에서 보듯이 증산도에서 보천교에 이르는 '정역'의 이치를 연출했던 것일까? 이들 교리나 철학이 어떻게 농악의 진법이나 장단 구성에 활용되었는지 추적하는 일이 난망하지만 누군가는 추적해야 할 일이다. 증산 강일순이 천지굿을 열며 스스로 장구를 메고 노래를 부른 것이나 그 맥을 이어받았다는 차경석의 보천교가 농악을 의례음악 삼은 맥락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신앙촌의 박태선이 구원파의 유병언, 영세교의 최태민으로 분파되고, 호생기도원의 김종규를 거쳐 장막성전의 유재열이 신천지의 이만희로 연결되는 맥락은 물론, 이들이 행하는 의례음악 편성의 정통 혹은 이단을 분석하는 데도 유용하리라 본다. 이래 저래 그동안 전통이라 여겨오던 것들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시작되려나. 인적 뜸한 거리, 어쩌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들을 대면하는 대한민국의 처지가 옹색스럽기만 하다.

보천교 중앙본소 입구(1985년 촬영)-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보천교 중앙본소(1985년 촬영)-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보천교주 차경석(1929. 7. 24일자 동아일보)

옥황상제로 그려진 강일순-리그베다위키에서 캡쳐

전북 무형문화재 제7-2호 정읍농악상쇠 유지화-정읍시청 제공

정읍 보천교 십일전을 옮긴 조계사 대웅전-dvd프라임에서 발췌

증산교 본부 통천궁내 상제(강일순)와 고수부(고판례) 초상-증산법륜도 홈페이지 캡쳐

청도대향원사당의 강일순 초상-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정정 보도문]고 유병언 전 회장 관련 정정 보도문

본 인터넷 신문은 2020년 02월 26일 '주말&'면에서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보천교의 예악 천지굿」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는 신앙촌의 박태선이 구원파의 유병언, 영세교의 최태민으로 분파되고, 호생기도원의 김종규를 거쳐 장막성전의 유재열이 신천지의 이만희로 연결되었다"라고 보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확인 결과, 기독교복음침례회는 네덜란드 선교사인 길기수 씨와 미국 선교사인 딕욕의 영향으로 유병언, 권신찬 두 사람이 거듭난 후 1969년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라는 이름 아래 활동하다 1981년 '기독교복음침례회'로 등록된 교단이며, 박태선의 신앙촌, 최태민의 영세교, 신천지의 이만희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에 해당 기사를 바로잡습니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