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화전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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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화전놀이
  • 입력 : 2020. 03.18(수) 14:10
  • 편집에디터

광주지산동 화전놀이, 광주문화재단 제공

"작은 시냇가 돌로 받친 솥뚜껑에서/ 흰 가루 맑은 기름 진달래꽃 지져내네/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자 향기 가득하고/ 한 해의 봄빛이 배속으로 전해오는구나" 진달래 화전을 부쳐 먹는 풍경이다. 누구의 노래일까? 때는 바야흐로 봄, 어느 시골의 선비들이 화전놀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패랭이를 쓰고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예컨대 어사 이몽룡 같은 이가 이곳을 지나다 술을 나누기를 청한다. 풍류에 대해 오거니 가거니 문답이 이뤄진 후 노래한다. 놀이를 하던 선비들이 예기치 않은 호방함에 놀라 예를 갖췄다는 이는 나주사람 백호 임제다. 홍만종의 문학평론집 '순오지(旬五志)'상권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책은 정철과 송순의 시가(詩歌)와 중국의 서유기를 평론하고 130여종의 속담을 수록한 책이다. 화전놀이, 대개 삼월 삼짇날 교외나 산야 등 경치 좋은 곳에 가서 음식을 만들어 먹고 꽃을 감상하며 노는 꽃놀이를 말한다. 진달래꽃잎을 넣어 부친 화전(花煎)이 대표적인 음식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화류(花柳), 회취(會聚)라고도 한다. 화류는 꽃과 버들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화가유항 즉 '유곽'을 달리 부르던 말이기도 하다. 회취는 문자 그대로 여러 사람이 한 곳에 모인다는 뜻. 운자를 띄워 시를 읊고 시조를 주거니 받거니 했겠지만 대개는 음주가무를 수반한 놀이로 나타난다. 본래 남녀 상춘객(賞春客)들이 이른바 봄소풍을 가던 풍속이었다. 조선시대 후기 기록들을 보면 이것이 여성 전유의 봄놀이로 변화한다. 19세기 초엽부터 생산된 화전가(花煎歌) 곧 화전놀이 노래가 선비들의 시와 변별적인 규방가사라는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왜 여성들의 놀이로 정착했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풍경 좋은 야산을 찾아 꽃과 벌나비 벗하며 놀던 봄날의 풍습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화전놀이는 언제부터 시작하였나?

기록으로만 보면 통상 삼국유사 김유신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사 악지 속악 양주편에 보면, 매년 봄날 남녀가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불렀다 한다. 한국세시풍속사전을 인용해둔다. '교남지(嶠南誌)'권4, 경주 산천조에 보면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가 나온다. 이 이름은 신라의 궁궐 사람들이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데서 유래했다. 같은 책 고적조에는 재매곡(財買谷)이 나온다. 김유신의 맏딸 재매부인을 상곡(上谷, 청연 위 골짜기)에 묻었기에 붙인 이름이다. 매년 봄에 같은 집안의 부녀자들이 이 골짜기의 남쪽 물가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수많은 꽃들이 만발하고 송화(松花)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골짜기에는 송화방(松花房)이라는 초막까지 만들었다. 이곳에는 본래 청연궁(靑淵宮)이 있었는데 경덕왕때 조추정(造秋亭)으로 바꿨다가 훗날 다시 청연궁이라 했다. 다섯 명의 공무원이 관리하는 별궁이었던 모양이다. 푸른 연못과 만화방창 꽃들이 피어있는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다. 궁중의 여인네들이 산천 계곡에 나아가 진달래를 꺾고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노래하고 놀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권7(세조3년 4월) 기록도 있다. "이때에 금령(禁令)이 자못 간략하므로 무풍(巫風)이 성행하였다. 도성의 남녀들이 떼 지어 술을 마시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매양 한 번 술자리를 베풀면 반드시 음악을 베풀고 해가 저물어서야 헤어져 돌아갔다. 남녀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큰 소리로 떠들면서 태평시대의 즐거운 일이라 하였다. 귀한 집안의 부인들도 또한 많이 본받아서 장막을 크게 설치하고 며느리들을 다 모아서 호세(豪勢)와 사치를 다투어 준비하는 것이 매우 극진하였다. 진달래꽃(杜鵑花)이 필 때에 더욱 자주 그러하니 전화음(煎花飮)이라 하였다." 전형적인 화전놀이 풍경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풍속은 없는 것일까. 삼국사기, 삼국유사 이전의 기록들을 갖고 있지 않은 우리로서는 상고(上古)의 맥락을 좇기 위해 항용 지금의 중국 땅에 남겨진 기록들을 인용하곤 한다.

안나 페르나의 과실을 낳는 숲과 ??시경(詩經)??의 봄노래

마르셀 그라네가 쓴 '중국의 고대 축제와 가요'는 시경의 보다 본질적인 측면들을 꺼내준다. 정(鄭)나라 하남(河南)의 축제는 수많은 젊은 남녀가 진수(溱水)와 유수(洧수)의 합류점 근처로 모이는데서 시작한다. 난초를 따러 떼 지어 와서 노래 경쟁을 하고 치마를 걷고 유수를 건넌다. 서로 결합하면 새로운 연인이 되고 헤어질 때 사랑의 표시와 약혼의 징표로 서로 꽃을 주고받는다. 그가 인용해 둔 Ovide의 저서'Fastes'가 흥미롭다. 고대 로마 Tiber(테베레강, 이탈리아 중부에서 로마시를 관통하여 티레나해로 흘러들어간다) 강가에서 행해진 봄축제 풍경이다. 여럿이 짝지어 풀 위에 누워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또 노래를 몸동작으로 흉내 내며 춤을 추고, 처녀들은 음란한 시구를 읊었다. 이 기회에 Mars와 Anna의 가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인용하는 "안나 페르나의 과실을 낳는 숲은 처녀의 피를 즐기기 때문"이라는 시구를 중국의 주석가들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염치심(pudore)이나 부끄러움(rubore)으로 표현된 해석은 사실 피(rubore)라는 전체 원고의 맥락을 무시한 해석에 다름 아니라고 주장한다. Rubore는 발적(發赤)이란 뜻으로 모세혈관의 확장 곧, 피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자세하게 논할 수는 없지만 고대 여러 족외혼 집단들이 딸들을 교환하는 풍경이라는 정도로 언급해둔다. 부족의 생활 안에 가둬두고 지키던 모든 청춘 남녀를 이때 일제히 접근시켰기 때문이다. 결혼이 부족들의 동맹 원리였고 영속적인 사회 계약의 체결로 이어져 보다 결속된 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던 시기의 얘기이니 조금은 낯선 장면일 수도 있겠다. 이 의례와 축제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노래 경쟁이다. 지금도 중국 소수민족에 더러 남아있는 대창(對唱)이 바로 그것이다. 혼인 연령에 이른 청춘남녀들은 이 연애노래의 경쟁에 반드시 참여해야했고 그 해의 모든 혼인은 여기서 맺어졌다. 일본의 우타가키(歌垣)나 하나미(花見)도 유사한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쓰쿠바 산 등지에서 남녀간 구애하며 불렀던 우타가키는 '만엽집(万葉集)'에 소개되어 있다. 우리의 화전놀이에 비교할 수 있는 하나미를 포함해 이런 양식의 노래와 축제들은 아시아 전반 아니 전 인류에 걸쳐 분포하던 풍속이다. 내가 강강술래를 짝짓기 노래로 의미화하고 서남해 여러 섬지역의 사례를 소개했던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시경에 등장하는 풍요 중에 치마를 걷고 물을 건너는 풍경들은 봄날의 연애잔치를 말한다. 시경은 정통적 도덕을 엄격하게 옹호하는 학자들에 의해 규정되어 왔으므로 보다 본질적인 해석을 가하기가 쉽지 않다. 행여 다른 해석이라도 내놓을 양이면 사문난적으로 몰린다.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했다는 죄목이다. 어찌 그것이 성리학에 국한되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로 교학상장의 이름을 뒤집어 쓴 학벌이 그렇고 학교나 지역을 맹종하는 당파가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어쨌든 고대의 봄 소풍이 갖는 의미들은 2018년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진달래 무덤 꼬까비 의례로 이어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봄은 재생과 거듭남의 본원적 의미에 충실하다.

진달래 피는 봄날, 그대 꽃시계 들고 오소서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 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서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손에 붉은꽃 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꽃 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빙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 맞추겠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서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만해 한용운의 '꽃싸움'이라는 시다. 두견화 피고 지고 있으니 바야흐로 완연한 봄이다. 꽃싸움은 풀잎이나 꽃잎을 가지고 하는 놀이다. 꽃잎의 이름을 대고 많고 적음을 겨루거나 풀줄기나 꽃술을 대고 당겨서 누가 더 질긴가를 겨루기도 한다. 한자로는 초전(草戰), 투초(鬪草), 초희(草戱) 등으로 쓴다. '풀겨루기'라 한다. 고려사 공민왕편에는 척초희(拓草戱) 즉 풀던지기 놀이를 공민왕이 보았다 한다. 전하는 말들이 아이들의 풀겨루기에 비유했지만 본원적 의미는 연인을 그리워하며 기다린다는 춘정(春情)에 다름 아니다. 고대 로마의 테베레강 봄축제나 시경의 풍요에서 다루는 하고많은 연정의 풍경과 노래들이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조선조를 넘어오며 이른바 화전놀이는 왜 여성전유의 놀이로 정착하였을까? 이 변화의 맥락을 좇기 위해서는 남성가부장적 문중사회와 족외혼의 풍속 전모를 헤아려야만 한다. 집안에 갇혀있던 여성들을 전제하지 않고 미사여구로 해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규방가사 중의 화전가(花煎歌) 정도로는 이 도도한 흐름을 다 얘기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만해의 시를 떠올렸던 이유라고나 할까. 코로나19로 모든 일상이 무너지고 의무적 자가격리에 들어가 있는 지금, 그래도 변함없이 언덕에 풀 올라오고 진달래 지천이다. 바이러스 확진가가 아니라도 두문불출 갇혀있는 일상이 폭발 직전이다. 이것이 사실은 화전놀이하였을 조선시대 여성들의 심정 아니었을까? 여성전유의 도깨비굿이나 화전놀이가 가지는 해방구로서의 순기능보다는 폐쇄적이고 억압적이었던 사회구성을 먼저 헤아려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원의 춘심(春心)이 어디 가겠는가. 떼거리로 모여 만화방창 풍경으로 나들이할 수는 없지만 가족끼리 연인끼리 보다 오붓하고 소박하게 화전놀이를 떠나보면 어쩔까. 들꽃 꺾어 연지 곤지 붙여주고 진달래 화전 부쳐 나누어 먹는 봄소풍, 만해의 꽃싸움과 소월의 진달래가 더없이 그리운 시절이다.

남도인문학팁

남도의 화전놀이

나주에는 삼색유산놀이가 이름나 있다. 세시놀이의 하나다. 음력 삼월 보름에 행했다고 하는데, 대개는 삼월 삼짇날이 화전놀이 날이다. 화전놀이, 산놀이 혹은 유산이라고도 한다. 삼색(三色)은 양반층, 평민층, 천민층을 합쳐 부르는 말로 해석한다. 서해숙이 쓴 한국세시풍속사전의 삼색유산놀이 항목에 의하면 제사의례는 물론 삼현육각 맞추어 성대한 놀이도 벌였던 모양이다. 경비는 재인들이 집집마다 쌀과 돈을 갹출하고 맛재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이 지역 당골판을 이끌던 여러 명인들이 앞장섰던 것 같다. 금성관 옆자락에 있던 신청(神廳)에서 활동하던 이들이다. 여인네들은 먼저 자기 집에서 성주신에게 제를 지낸다. 모두 맛재에 오르면 재인들과 여인네들이 어울려 한바탕 잔치를 벌인다. 근자에 나주신청을 복원했다하니 화전놀이 재현과 연결시킬지도 모르겠다. 여수에는 신월동과 손죽도의 화전놀이가 이름나 있다. 문중 여성들이 만들었던 화전계(花煎契)나 나주신청 재인들이 주도했던 삼색유산놀이가 아니더라도 남도 전역, 아니 사람 사는 어디든 진달래 피는 산야에는 상춘객들이 모인다. 떼거리로 모여서만 화전놀이일까.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오붓이 소박하게 떠나보자. 화전놀이의 계절이다.

나주샘색유산놀이, 한국세시풍속사전

안동 화전놀이 화전, 한동유교문화사진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여수 손죽도 화전놀이,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제공

화전놀이, 한국세시풍속사전

화전놀이 체험하는 외국인 유학생들. 뉴시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