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재 바로알기 15>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⑥ 운주사에는 와불이 없고 중장터는 중들을 위한 장터가 아니다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재 바로알기 15>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⑥ 운주사에는 와불이 없고 중장터는 중들을 위한 장터가 아니다
  • 입력 : 2020. 07.30(목) 13:38
  • 편집에디터

1. 운주사 미완성 석불좌상과 입상(일명 와불, 사진 황호균)

천불천탑 깎고 다듬고 운반하여 세우고

서쪽 산 중턱에는 불상을 제작하기 위해 채석한 흔적이 10여 군데 보인다. 그 가운데 칠성석에서 와불 쪽으로 가는 사이의 암반에 그 흔적이 가장 뚜렷하다. 여기에 전체 길이 560㎝, 현재 너비 140㎝의 돌감을 캐간 듯 패인 흔적이 보인다. 머리와 어깨로 이어지는 연결 부분과 반듯하게 쭉 뻗는 하체 부분 등을 고려해 볼 때 대형 석불입상의 돌감을 떼어낸 흔적으로 판명되었다.

운주사의 모든 석불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형 좌상을 제외한 대부분의 입상은 앞면과 네 방향의 옆면만 조각하고 다듬어졌을 뿐 뒷면은 옷주름을 조각하거나 심지어는 다듬어지지도 않았다. 이러한 특이한 현상과 속칭 와불과 시위불, 채석장의 대형 석불입상 채석자리, 석불입상 형태의 원석 등을 주목하면서 언젠가는 석불의 제작공정에 대해 복원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인 1987년부터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지난 30여 년간 운주사 골짜기 여기저기에 세워진 석불들의 뒷면까지 살펴보고 널브러져 깨진 석불들(불두편, 불신편)을 뒤집어 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가장 원형에 근접했다고 생각되는 결론은 조각 장인과 채석공의 역할분담이 명확하게 분리됐고 아울러 석재 운반공과 석불 설치공, 석탑 조립공의 영역도 따로 존재했을 거라는 제작공정의 일단을 추슬러 보게 되었다.

여기에서 좀 더 살펴볼 부분은 암반에서 석재를 털어내는 채석과 운반하는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 대한 것이다. 현재 우리는 아쉽게도 이 부분에 대한 시원한 해답이 있지 못한 형편이다. 다만 채석방법은 고인돌과 근?현대에 석공들이 하던 방식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암반에서 쐐기 구멍을 만든 후 물에 대한 팽창력 높은 나무를 꽂아 놓고 물을 부어 그 팽창력으로 암석을 분리해 내는 '나무쐐기 물 팽창법'과 쐐기 구멍에 정을 대고 대형 쇠메를 내리쳐 암석을 쪼개거나 털어내는 '대형 쇠메법'이 보편적이다. 쐐기 구멍에 물을 부어서 얼리는 '얼음 팽창력 방법'은 겨울철이 짧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기 어려운 한시적이면서 이론상으로서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암반에서 분리한 석재를 어떻게 운반했을까? 하는 고민에 대한 해소책은 칠성바위 부근의 '암반 마찰 흔적' 유구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흔적은 다산 정약용의 수원화성 거중기의 사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더욱더 옛 방식의 도르래와 굵은 밧줄을 이용해서 돌을 운반하다가 생긴 '암반 마찰 흔적'으로 여겨진다.

나아가 속칭 와불이 미완성작으로 그친 이유도 논산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의 건립 지체 설화를 통해 설계와 시공상의 괴리에 따른 결과로 판단될 여지는 충분하다. 관촉사 석불도 상체와 하체를 다른 돌로 만들고 거대한 두 돌을 하나로 합쳐 세우는 기술이 당시에는 없어서 상당 기간 지체되었다는 설화가 참고된다.

속칭 와불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 가장 큰 이유로는 권오달씨(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36호 石匠, 석조각 보유자)와의 대화를 통해 암반 측면 바위 틈새(균열, 짬)의 변화로 빚어진 설계 착오에 의한 작업 중단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암반 측면에서 보이던 바위 결이 좌상 허리 부분에서는 지하로 들어가 버려서 계속 털어내다간 반 토막 날 가능성이 크자 그만 작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밝혀냈었다. 물론 처음에는 바위 틈새가 수평으로 쭉 연결되었으며 거기에 속칭 머슴미륵(시위불)을 조각하여 때어 내자 바위 결이 지금처럼 돼버려서 어쩔 수 없이 일으켜 세우지 못하게 된 것이라는 정황이다. 이러한 해석은 '와불 설화'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가장 과학적이고 설득력 있는 사실 규명이다.

운주사 와불을 미륵불의 지상 출현으로 이해하시는 분들을 위한 미륵신앙 강의 한 토막

머리가 아래고 발이 위여서 땅속에서 미륵이 지상으로 출현하는 광경으로 운주사 와불을 이해하려는 주장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보통 와불로 불리는 이 거대한 돌부처는 운주사 산 정상의 천연 암반을 그대로 이용해서 조각하고 일으켜 세우려는 공정을 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돌부처일 뿐이다. 이들 돌부처는 암반의 분포상태로 보아 가장 크게 만들 수 있게 설계하려면 지금처럼 머리와 다리가 그러한 방향으로 배열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고 머리와 다리를 반대로 조각하면 절반 이하로 크기가 축소되어 버린다. 가장 기본적인 관찰도 하시지 못하는 분들이 즉흥적인 감상으로 소설을 쓰시면 그러한 소설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것이다.

미륵신앙은 내세관이 없던 불교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등장한 구원신앙

운주사의 돌부처들을 '마을로 내려간 미륵부처'와 모습이 비슷해서 운주사를 무조건 미륵 님이 오신다는 용화 세상으로 몰고 가시려는 분들을 위해 미륵신앙을 좀 제대로 아시라고 몇 마디 덧붙인다.

미륵신앙은 지나치게 이론적인 종교라고 비판을 받는 불교가 가질 수 있는 구체적인 신앙 형태로 내세관이 없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새롭게 등장한 이론 체계이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며 구원론적 구세주의 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미래세상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다. 기원 전후한 시기에 불교가 포교 일선에서 맞닥뜨린 여러 어려움 중에 교주의 형상을 실물로 보여주라는 현실적인 요구가 거세었다. 그러한 요구와 동시에 다음 세상에 구원자(미륵불)로 오실 교주에 대해서도 이론과 형상으로 제시된 것이다.

이처럼 미륵신앙은 불교가 대승적 입장에서 포교에 힘쓸 때 현생에서 성불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일반 민중들을 위한 배려로 태동하였다. 포교 일선에서 부딪히는 주문인 "이생에서 성불하지 못하는 우리를 어떻게 구원할 것이냐"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서 맨 처음에는 미륵하생경이 성립되었다. 도솔천을 주재하신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좇아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미륵하생경) 용화삼회라는 세 번의 설법에 참여하여 구원받기를 원하는 신앙체계로 태동되었다. 그렇다면 미륵불이 오실 용화세상 이전에 태어나서 죽어버린 사람들은 어쩌란 말이냐는 반대 논리에 대응하기 위해서 가장 나중에 미륵상생경이 등장하게 되었다. 인간이 살다가 죽은 다음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과 함께 하다가(미륵상생경) 미륵불과 함께 하생하여 용화삼회라는 세 번의 설법에 참여하여 구원받기를 원하는 신앙체계로 완성되었다. 재림 예수는 심판자이나 내세에 오실 미륵불은 모든 중생을 구원의 대상으로 파악한 것이 기독교와 불교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미륵은 무착 스님의 스승으로 불제자인 인도의 유가유식학을 체계화시킨 학승인 마이뜨레아를 모델로 해서 구원 사상을 추가하여 발전시킨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현재 미륵보살님은 도솔천에 계시면서 지상에 내려오실 그때를 기다린다고 한다. 사실 미륵은 석가모니보다 더 먼저 성불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석가가 워낙 맹렬하고 진실되게 백 겁이 소요되는 보살 수행 기간을 91 겁으로 마치고 성불하자 자연히 미래불이 된 것이다. 이러한 미륵은 보살로 그 모습을 드러내실 때는 여성적인 모습의 사유상이며 부처의 모습으로는 남성적인 용화수인을 한다. 미륵신앙은 부처님의 수많은 교훈과 비교해 볼 때 석가의 진정한 가르침은 분명 아니다.

미륵신앙의 본질이 이러한데 돌부처는 무조건 미륵이라면서 '역성혁명을 도모하려 했던 용화세상을 꿈꾸는 미륵님을 신봉하는 자들이 건립한 미륵 도량'이라는 주장은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운주사의 와불은 '와불'님이 아니다.

운주사의 그 유명한 와불은 '와불臥佛'님이 아니다. 불교에서 보통 와불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상을 의미한다. 부처님께서 모로 드러누우신 상태에서 열반하셔서 측와상側臥像으로 나타나야 한다. 하지만 운주사의 경우는 이러한 측와상이 아니고 반가부좌 상태에서 앉아 계신 모습의 본존불과 서 계신 모습의 협시불을 암반에 조각하고 미쳐 털어내서 일으켜 세우지 못한 미완성 부처님일 뿐이다. 와불 입구에 서 있는 석불입상(시위불?머슴부처)은 와불 옆의 빈 곳에서 떼어냈음이 증명되었다.

중장터, 그 찬란한 오해

운주사에 대해 난무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고증이라는 엄정한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냥 즉흥적인 판단으로 일관한 탓에 역사의 실체를 밝혔다기보다는 역사 소설을 쓰려 했던 정도의 노력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도선 창건설이나 와불 이야기는 물론이고 스님(중)들이 장을 보았다는 중장터의 이야기에 가서는 그만 억장이 무너지고 만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온전한 '중장'이라는 '승시僧市'가 존재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일반 저잣거리에서 주변 절의 스님들이 사찰 특산품을 내다 팔았다는 이야기는 흔히 들어왔던 상식 같은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어쩌다 운주사 앞의 중장터가 한국 유일의 승시僧市가 되어버렸단 말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전설(?) 같은 이야기의 허망을 들춰내기 위해서는 1872년에 펴낸 <능주목지도>(규장각 소장)를 펼쳐보는 수고가 오히려 즐겁다.

<능주목지도>에는 '중촌中村'이라는 지명과 함께 그 옆에 초가지붕 3채를 그리면서 '장시場市'를 표시하였다. 중촌에 위치한 장시라는 의미에서 함께 부르면 '중촌中村 장시場市'이고 축약하면 '중장中場'이다. 덕산마을은 원래 왕정?행산방면과 호암?유치방면의 길 가운데 있다 하여 '중촌中村'이라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가운데 마을'이라는 지리적 위치의 의미밖에 다른 뜻은 담겨있지 않다. 중장의 노점 거리 한 장소에서 주변사찰 스님들이 장을 보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화순 중장터는 중(스님)들만을 위한 장터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러한 '중촌 장시'는 일제강점기에 능주읍내 쪽으로 신작로가 나기 이전에는 이 지역 교통의 결절점結節點이자 하나의 관문에 위치하였다. 중장터 설화에서 말하는 것 같은 궁벽한 산골이 아니며 광주와 화순을 장흥으로, 그 장흥을 나주로 이어주는 그야말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러한 장소에 노점거리가 등장하게 된 것은 장시의 지리적인 기본 요건이다. 조선 후기에 보부상과 밀착된 국가권력이 그렇게도 이러한 장시를 숱하게 금지하였지만 전국 여기저기에서 잉여산물을 교환하는 물물교환 형태로 잠깐 섰다가 사라지는 작은 시골장들이 성행하게 되자 이를 어찌하지 못하게 되었고 지금 우리가 향수에 젖어 못내 그리워하는 '오일장'의 풍경으로 이어져 왔다.

그동안 전남 화순 운주사 주변의 '중장터'는 구전설화를 근거로 승시僧市 개념의 '중들을 위한 장터'로 해석해 왔다. 1990년대 이후 일련의 연구를 진행하면서 몇 개의 자료에서 '중장터'와 '중촌(동?골)'에 등장하는 '중'이라는 지명은 '승僧'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승시僧市 개념의 중장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명에 들어간 '중'이란 발음에서 초래된 곡해로 와전訛傳으로까지 이르게 되었다. 보통 중촌中村이나 중골(중동: 中洞)은 마을 중앙이나 농경지 한가운데라는 의미의 중동中洞에서 비롯된 지명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 중中을 승僧 개념의 중으로 오해하여 꾸며낸 여러 이야기가 난무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2. 운주사 미완성 석불좌상과 입상(일명 와불, 사진 황호균)

3. 운주사 미완성 석불좌상과 입상(일명 와불, 사진 박하선)

4. 눈덮인 운주사 미완성 석불좌상과 입상(일명 와불, 사진 윤영녀)

5. 눈덮인 운주사 미완성 석불좌상과 입상(일명 와불, 사진 황호균)

6. 운주사 미완성 석불좌상과 입상 채석 균열 흔적(일명 와불, 사진 황호균)

7. 운주사 미완성 석불좌상과 입상 평면도('운주사종합학술조사', 전남대학교 박물관, 1991.)

8. 인도 아잔타 석굴 26굴 열반상(와불)

9. 화순 도암면 중장터 풍경(사진 황호균)

10. 화순 도암면 중장터 풍경(사진 황호균)

11. 雲住塔, 中村, 場市(능주목지도, 1872년, 규장각)

12. 上場, 中場, 新場(황해도 안악지도, 1872년, 규장각)

13. 中場, 中場店(조선지지자료, 1911년, 조선총독부)

14. 시위불(일명 머슴미륵, 사진 황호균)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