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9>【괘불탱・괘불지주】 ② 괘불, 임진왜란 때 전공 세운 승병들의 담대한 미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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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9>【괘불탱・괘불지주】 ② 괘불, 임진왜란 때 전공 세운 승병들의 담대한 미의식
  • 입력 : 2020. 09.24(목) 13:09
  • 편집에디터

1. 미황사 괘불재 모습(2018년, 사진 현대불교)

괘불은 당시 사회의 다양한 요구 반영

17세기 괘불에는 영산회・삼신불・장엄신・오불회五佛會 등 모든 형태가 다 등장하지만 점차 영취산의 석가모니불에 바탕을 둔 도상圖像이 다양한 의식의 교주를 통합할 수 있는 구심점으로 선호되었다. 무수한 시공간의 불세계에 대한 관념과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는 불신관佛身觀에서 석가모니불은 신앙의 중심에 지리하였다. 괘불은 법화신앙에 기반하면서 선종禪宗과 화엄華嚴・미륵彌勒 신앙 등 당시의 사찰・승려・신도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의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면서 독특한 도상을 창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을 축제에서 발전된 공동 행복 추구

괘불재는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보다 민속적인 색채가 오히려 더 강하다고 알려졌다. 일반 민중의 머릿속에는 괘불재의 내용보다 신앙의 대상이 되는 괘불 자체의 신비성에 더 초점이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괘불재에는 공동체 의식과 공동축제로서의 성격도 그대로 살아남았다. 개인의 영혼을 구제하려는 개인 구복 성격이 강하던 불교에서 수륙재(불교에서 물과 육지를 헤매는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례)와 예수재(사람이 현생에 공덕을 쌓아 사후에 극락왕생을 하고자 행하는 종교의례) 같이 공동의 행복을 추구하는 의식이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괘불재가 축제 성격을 지닌다는 것은 괘불을 내건 일정한 도량을 중심으로 다양한 춤과 음악을 포함한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일정한 불교 의식의 절차에 따른 의식 음악과 의식 무용에 여러 가지 민속 음악도 곁들여져서 한층 더 축제의 분위기를 북돋우게 된다.

재의식이 모두 끝난 뒤에는 제물을 고루 나누어 먹게 되는데 상단의 제물은 승려들이, 하단의 제물은 신도들이 나누어 먹게 된다. 이것을 법식法食이라고 하며 불보살과 인연을 맺는다는 뜻이 담겼다는 것이다.

괘불의 기원과 유래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괘불을 불전 마당에 내 걸기 시작했는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아 괘불의 기원이나 유래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1622년 무렵부터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왕성하게 신앙이 되어 오는 대상물이라는 것이다.

조선 시대 불교회화는 삼베나 비단에 그린 탱화 위주로 발전했다. 조선 후기 탱화의 발전은 왜란과 호란의 전란 이후 불교의 성격을 나타내 준다. 특히 대형화 추세나 적・흑색을 즐겨 쓴 보색 대비의 장엄한 효과와 예배 기능, 다양한 내용을 포괄하는 서술 표현의 교화적 성격 등이 그러하며 서민층에게까지 확대된 불교의 대중화와 맞물렸다. 조선 시대 탱화의 경우 이른 시기의 것들은 대개가 괘불들이다.

최초로 등장한 '죽림사 세존괘불탱'(1622년)은 물론이고 무량사의 '미륵보살괘불탱도'(1627년), 칠장사의 '오불회괘불탱'(1628년), 보살사의 '영산회괘불탱'(1649년), 화엄사의 '영산회괘불탱'(1653년), 천은사의 '석가독존괘불탱'(1673년), 도림사의 '석가삼존괘불탱'(1683년) 등이 대표작이다.

1620년대 초반부터 1700년대에 걸쳐 제작된 탱화 중에서 어째서 괘불이 압도적으로 많을까? 이 문제의 해결은 조선시대 불교 회화사에서 고려 양식을 계승한 조선 전기와 조선적 형식을 구축한 조선 후기의 과도기이면서 사각지대인 17세기 불화와 불교사의 성향을 파악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괘불 형식 완성

나주 죽림사의 괘불(1622년)을 시작으로 17세기 괘불들 대부분이 후불벽화(탱화)의 잔영이 담겼다. 화엄사의 '영산회괘불탱'(1653년)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의 모습이 좌상이고 대좌가 앞에 불상을 놓아도 넉넉할 정도의 공간을 보인다거나 도림사의 '석가삼존괘불탱'(1683년)은 좌우에 대등한 크기로 두 보살이 협시한 석가삼존도 형식 등 아직 후불탱화의 요소가 강하게 남은 괘불도 일부 조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죽림사의 '세존괘불탱'(1622년)과 무량사의 '미륵보살괘불탱도'(1627년), 천은사의 '석가독존괘불탱'(1673년)에서는 등장인물을 과감히 생략한 '입상 독존도' 형식이 새롭게 창출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후 18세기에는 좌상이 줄어들고 입상이 많아지다가 18세기 중반 이후는 대부분 입상 형태로 화면 가득히 본존불을 그리는 '입상 독존'의 괘불 전형적인 형식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외침에 도망가기 바빴던 지배층

17세기는 선조에서 인조 시절, 왜란(1592년~1598년)에서 호란(1636년~1937년)으로 이어지는 외침의 피해가 매우 컸던 그런 '난리 통'의 연속이었다. 전란은 전국의 경제적 파괴를 가져다주었고 백성들은 자기 생존만을 보존하기 위해 피난하거나 비굴하게 대처하는 왕실이나 사대부 사회에 대하여 큰 실망을 느끼기도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조선의 개국이념이었던 성리학이 퇴계와 율곡에 의해 조선적 학풍으로 다져졌고 그에 따라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의식과 붕당정치朋黨政治가 확산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국가 경제의 피폐화, 정치적 갈등, 민중의 사회의식에 대한 변화 속에서 불교계 역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갈팡질팡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분연히 일어선 승병과 의병

7년에 걸친 왜란으로 인해 전국의 사찰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더욱이 승병 활동에 대한 반감으로 왜군은 철저히 불단을 유린하였다. 반면에 외침에 분연히 일어선 승병의 역할로 인하여 불교를 억누르던 유교 지배층으로부터 일정한 양보를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확립되던 때라 외형적으로는 불교에 대한 이념적 탄압이 진행되었으나 불교의 성장에 그리 영향력을 못 미쳤다. 오히려 전란 후 사회에 팽배한 위기의식과 갈등 속에서 불교에의 귀의가 서민층에까지 확대되었고 불교 대중화에 의미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무릇 종교란 이러한 혼란 상황을 사세의 확장으로 직결시키는 일반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은 여러 역사적인 사실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17∼18세기 전후 복구 및 경제력의 성장과 함께 전국적으로 중창 불사가 활발하게 일어남은 바로 그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

괘불은 나라를 지켜냈다는 자신감의 표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작된 17세기 괘불들은 불교의 새로운 중흥과 18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제작되는 조선 후기 탱화 발전을 예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괘불의 형식미에는 전란의 피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지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해내었다는 커다란 자신감을 담아냈다. 말하자면 임진왜란 때 전공 세운 승병들의 담대한 미의식를 반영한 것이다. 작은 경우는 세로 4∼5m 정도이지만 대부분 10m가 넘는 대형으로 그려졌다. 크기가 보통 7.8m 높이에서 10m가 넘는 것(무량사 미륵보살도 약 14m×8m, 화엄사 영상회상도 약 12m×8m 등)도 있는 점이나 색채 감각에 실린 중후한 맛이 그러하다. 내용 또한 죽림사와 무량사・천은사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석가모니 삼존상과 그 군상도인 '영산회상도'가 많다. 석가가 현생 불교의 주존인 점과 석가의 여러 법회 가운데서도 법화경을 설법한 영축산의 대법회 모임을 중심으로 담은 것을 보면 고려에 이어 조선의 불교계가 석가 사상의 원론을 강고하게 다지려 한 의식도 엿보인다.

2. 무량사 미륵불괘불탱(1627년,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3. 칠장사 오불회괘불탱(1628년,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4. 보살사 영산회괘불탱(1649년, 사진 문화재청)

5. 보살사 영산회괘불탱 화기(1649년, 사진 문화재청)

6. 안심사 영산회괘불탱(1652년, 사진 문화재청)

7.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화기 1(1652년, 사진 문화재청)

8. 안심사 영산회괘불탱 화기 2(1652년, 사진 문화재청)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