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장성 봉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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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장성 봉암마을
행주대첩 비밀 병기 '화차' 발명한 변이중의 마을 ||변이중 충절기리는 봉암서원 ||무기 18종 복원 전시 '시장당' ||서원마당에 핀 화살나무 눈길 ||변윤중과 부인 기리는 '삼강정려'||황룡강에 몸던졌던 부엉바위
  • 입력 : 2021. 05.06(목) 16:37
  • 편집에디터

변이중의 충절을 기리는 봉암서원. 변이중을 주향, 윤진 변윤중 변경윤 변덕윤 변휴 변치명을 종향으로 모시고 있다.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때 3대 전투로 행주대첩을 꼽는다. 1593년 2월 12일 권율 장군이 이끈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다. 부녀자들이 치마를 이용해 돌을 옮기고, 그 돌로 일본군과 투석전을 벌이며 이겼다는 싸움이다. '행주치마'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했다고도 전해진다.

하지만 의문을 떨칠 수 없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맞선 투석전이 얼마나 위력을 발휘했을까? 사람이 던지는 돌팔매가 조총보다 더 효율적이었다는 말인가? 군인의 수도 일본군이 조선군보다 10배 남짓 많았다는데…. 자료에 의하면 당시 조선군은 2300여 명, 일본군은 3만여 명이었다.

행주산성은 돌로 쌓은 튼튼한 성도 아니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한강변 구릉지였고, 목책을 세워 고친 성이었다. 주변에는 돌보다도 갯벌과 갈대가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낱 투석전으로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행주대첩의 비밀병기가 따로 있었다는 얘기다. 변이중이 만든 화차(火車)였다. 변이중은 사촌동생 변윤중의 도움을 받아 화차 300대를 만들고, 이 가운데 40대를 권율 장군에게 보냈다.

총통기를 단 이 화차는 철환(鐵丸)을 쏘아댔다. 그것도 앞과 좌우에 40개의 총통을 장착했다. 총통마다 열댓 발씩, 한번에 수백 발을 쐈다. 일본군의 조총 사격으로부터 총통수를 보호하는 방호벽도 뒀다. 조선군은 이 화차를 이용해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망암(望菴) 변이중(1546∼1611)은 장성 봉암마을에서 태어났다. 28살 때 과거에 합격했다. 호조좌랑, 예조정랑, 황해도사, 평안도사, 풍기군수 등을 거쳐 전라도 소모사, 독운사를 지냈다.

변이중의 충절을 기리는 곳이 봉암서원이다. 장성읍 장안리 봉암마을에 있다. 장안리는 고려 공민왕 때 황주 변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됐다. 본디 '담안', '장내'로 불리다가 '장안'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봉암서원은 1697년에 처음 세워졌다. 서원 훼철령으로 헐렸다. 1977년에 복원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종앙사(宗仰祠)에 변이중을 주향으로, 그리고 윤진, 변윤중, 변경윤, 변덕윤, 변휴, 변치명을 종향으로 모시고 있다. 변윤중은 임진왜란, 변덕윤은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활동했다.

변이중의 충절을 기리는 봉암서원. 변이중을 주향, 윤진 변윤중 변경윤 변덕윤 변휴 변치명을 종향으로 모시고 있다.

변이중 화차를 보여주는 시징당도 있다. 변이중의 문집 <망암집>에 실려있는 무기 18종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평소 문이 잠겨 있다. 관리인에게 따로 연락해서 열어달라고 해야 한다.

무기보다 꽃일까? 시징당을 구경하지 못한 아쉬움을 서원 마당에 핀 화살나무꽃이 달래준다. 화살나무는 지역에 따라 홋잎나무, 참빗나무, 참빗살나무로도 불린다. 새순을 뜯어 살짝 데쳐 무치거나 버무리면 고소하고 그윽한 향으로 입맛을 북돋운다. <동의보감>엔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준다고 나와 있다. 화살나무에서 뽑은 싱아초산나트륨이 혈당을 낮춰줘 당뇨와 갖가지 암에도 효과가 있다고 전해진다.

화살나무의 가지에 회갈색 코르크 날개가 달려 있다. 흡사 화살의 깃처럼 생겼다. 꽃은 자잘하고 연한 풀색으로 서너 장씩 모여서 피었다. 꽃은 작지만, 생김새가 화살 같다. 가을에 붉게 단풍 든 모습이 아주 매혹적이다. 겨울엔 붉은 열매로 새들을 유혹한다. 관상수로 대접을 받는 이유다.

봉암서원 앞에 있는 삼강정려도 눈길을 끈다. 변이중의 사촌동생인 변윤중과 그의 부인 함풍성씨, 며느리 장성서씨의 충과 효·열을 기리고 있다.

변윤중(?~1597)의 이야기도 애절하다. 변윤중은 사촌 형 변이중과 함께 화차를 만든 인물이다. 정유재란 때 장성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다.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지고, 중과부적의 상황에 몰리자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그의 부인 함풍성씨도 남편을 따라 투신했다.

변이중의 충절을 기리는 봉암서원. 변이중을 주향, 윤진 변윤중 변경윤 변덕윤 변휴 변치명을 종향으로 모시고 있다.

아버지와 함께 의병으로 참여한 외아들 형윤도 부모의 뒤를 이어 강물에 몸을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부인 장성 서씨가 그의 허리를 붙잡는다. '가문의 대는 누가 잇느냐'면서…. 남편을 대신해 자신이 강물 위로 몸을 던진다.

"설에 의하면, 며느리 서씨가 시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서로 투신한 시간이 다르고, 위치도 달랐을 텐데…. 뒤늦게 조정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순절한 세 사람을 충신과 열부, 효부로 칭한 겁니다. 그 정신을 만백성에게 알리려고 '삼강정려'를 하사한 것이죠."

김종용(88) 전 장성군노인회장의 말이다.

삼강정려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여각에 모셔져 있다. 비각에는 충신 변윤중, 열녀 변윤중 지처 함풍성씨, 효부 변공형윤 지처 선인 장성서씨가 새겨져 있다.

변윤중과 부인, 그의 며느리가 강물로 뛰어내린 바위가 '부엉바위'다. 변윤중의 호가 '휴암(鵂巖)'인 이유다. 바위도 깎아지른 것처럼 위용을 뽐낸다. 바위의 생김새가 하늘에서 사람이 뛰어내리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신묘하다.

부엉바위는 봉암서원에서 가까운 수산리, 옛 황룡강변에 있다. 강의 물줄기를 반듯하게 하는 직강 공사로 인해 지금은 강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강물이 흐르던 바위 아래가 논밭으로 변했다. 밭에 심어진 사과나무가 연둣빛 이파리를 틔우고 있다.

봄빛이 빚어낸 사과나무 이파리의 빛깔이 연둣빛에서 연녹색으로 바뀌고 있다. 잔가지가 봄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인다. 주변 산기슭도 연녹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햇살의 방향에 따라 빛깔의 농도가 달라진다. 봄볕이 빚어내는 수채화 풍경이 참 아름답다.

그 그림에 반해 발길이 한참 머물렀다. 밭을 갈아엎는 트랙터 소리가 저만치서 정적을 깨운다.

변이중의 화차 재현. 지난 2011년 육군포병학교 훈련장에서 열린 화차 시연회 모습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