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 길위에 인생 60>10년 후 왔을 때에도 이 풍광이 변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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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 길위에 인생 60>10년 후 왔을 때에도 이 풍광이 변하지 않기를…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저지에서 한림올레까지 14코스(19.1km), 저지에서 서광올레까지 14-1코스(9.3km)
  • 입력 : 2021. 09.23(목) 16:45
  • 편집에디터

오설록 녹차밭. 차노휘

1) 제주어

올레를 걷다보면 낯선 지명을 자주 접하게 된다. 14코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저지예술정보화 마을에서 4,4km를 걷다보면 큰소낭숲길이 나온다. '낭'은 나무의 제주어로 제주올레에서 길을 개척하면서 새롭게 붙인 이름이다. 큰소나무숲길을 따라 4km를 더 가면 돌멩이들과 이름 모를 잡초들로 어울려진, 구불구불한 돌담으로 구획된 길을 만날 수 있다. 오시록헌 농로이다. '오시록'은 호젓하고 비밀스럽게 숨어 있다는 뜻의 제주어이다. 농로를 따라 걷다보면 14코스의 아늑한 비경인 '굴렁진 숲길(움푹 패인 지형을 제주어로 '굴렁지다'라고 한다)'로 들어서게 된다. 지명도 낯설지만 그 풍경 또한 새롭다. 바닷가를 노닐다보면 막 물질을 끝낸 해녀들이 그녀들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외부인이 뭔가 물어보면 산뜻한 표준어로 답변을 해준다. 이들은 오랫동안 사적인 대화를 할 때와 공적인 대화를 할 때의 언어를 구분해서 사용해왔다. 다른 지방의 방언과 달리 제주 방언은 외부인이 쉽게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주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방언이라기보다는 '제주어'라고 해야 한다는 모 학자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제주어는 육지와 격리된 상태에서 독자적인 어휘를 발전시켜왔지만 활발하게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은 연령 차이에 따라 그 사용 빈도가 다르다. 유네스코는 2010년 12월 제주어를 '소멸 위기의 언어'로 분류하였다. 어디 언어뿐일까, 꾸준한 개발로 인해 여행자는 편하게 자고 먹고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갈수록 제주만의 독특함을 잃어가는 듯하다.

14코스를 걸을 때도 그랬다. 출발지인 저지예술정보화마을에서 중간스탬프가 있는 월령 선인장 자생지 입구까지는 풍광이 화려하지 않다. 가꾸지 않은 비닐하우스와 밭이 있는 날 것 같은 곳. 부지런히 걸어서 중간 스탬프를 찍으면 그때부터는 백련초가 아름답게 자생하고 있는 현무암 해변 너머로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풍광과 마주한다. 무엇보다 비양도가 왼쪽에서 나를 따라온다. 마침 걷는 시간이 만조 때라 파도가 발끝에서 출렁거렸다. 점심 식사를 하고 나왔을 때는 비가 올동말동했는데 바다 건너에서 시작됨직한 바람이 비를 쫓아내고 세를 더욱 불리었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달라지는 파도 결, 등대와 군데군데 설치된 거대한 바람개비가 돌아가고 있는 하얀 풍력발전기. 서정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자연과 인공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풍경이지만 어디에선가 떠내려 온 생활 쓰레기가 어장에서 나온 폐품과 합쳐서 해안가를 점령하고 있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가며, 걸을수록 그 모양새를 달리하는 비양도에 초점을 맞추자 곧이어 호젓한 어촌 금능마을 길, 금능으뜸원해변과 희고 가는 눈부신 백사장이 있는 협재해변를 거쳐 마침내 한림항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한림항에 있는 비양도 매표소 앞에 앉아 정박한 선박 위로 시나브로 내려앉고 있는 일몰을 보며 나는 하루를 마감했다. 그리고 내일 걷게 될 14-1코스를 생각했다. 아직까지 사람의 손이 덜 탄 문도지오름를 떠올릴 때마다 내 가슴은 두근거렸다.

자생선인장 군락지. 차노휘

2) 문도지오름

제주특별자치도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오름의 정의는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을 제외한 제주특별자치도 일원에 분포하는 소화산체(小火山體)로 화구를 갖고 있으면서 화산분출물(火山噴出物)에 의해 형성된 독립화산체(獨立火山體) 또는 기생화산체(寄生火山體)를 말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그 개수는 인문적·자연과학적 정의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만 현재 공식적인 개수는 368개이다.

그동안 내가 368개의 오름을 다 오른 것은 아니지만 가봤던 곳 중에서 제일 신비스러운 곳이 문도지였다. 아마도 그곳에 처음 방문했을 때의 첫인상 때문일 것이다.

문도지오름(표고 260.3m)은 광활한 곶자왈 한가운데 솟아 있다. 그 형상이 반달 모양이라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면 아름다운 곡선 실루엣을 볼 수 있고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사방으로 펼쳐진 곶자왈의 지붕을 한곳에서 훑을 수가 있다. 여기에 더해 사람들을 상관하지 않은 말과 소의 이동은 여행자에게는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낯섦과 여유를 준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스럽기는 했다. 사유지인 문도지가 박수기정처럼 외부인을 출입금지 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우려일 뿐이었다. 문도지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오래 머물고 싶은 장소일수록 과거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린다. 4년 전에 왔을 때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반달 모양으로 솟은 오름 위로 말들이 자기들의 세상인 양 돌아다녔고, 마침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이 역광을 만들어 말들의 실루엣과 풍경을 환상처럼 연결시켜 놓았었다. 나는 그 말들 사이를 숨죽이며 지나가야 했다. 이제는 말들 대신 사람들이 많았다. 코로나 여파인지 일정한 거리를 둔 목초지 사이에서 등지를 튼 그들은 그들만의 시간을 풍경 속에 녹이고 있었다. 나도 오름 정상에 다다랐을 때 배낭을 벗고 기지개를 켰다. 이마를 훑은 바람에 땀을 식히고는 곶자왈을 훑다가 그 끝에 턱 하니 버티고 있는 한라산을 오래도록 봤다. 갑자기 십 년 후에 왔을 때에도 이 풍광이 변하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러고는 이 순간을 잡아야한다는 듯 목초지 위로 몸을 눕혔다. 곧 걸어야 할 긴 저지곶자왈과 그 끝에 싱싱하게 펼쳐질 녹차밭이 내 몸 위로 지나갔지만 나는 문도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활짝 열고 눈을 감았다. 차노휘 (소설가·도보여행가)

금능마을. 차노휘

풍력발전기가 있는 풍경. 차노휘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