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62> 올레를 걸으며 문득 "삶은 늘 유목민 같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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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62> 올레를 걸으며 문득 "삶은 늘 유목민 같지 않을까"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비양도가 있는 한림항, 한림에서 고내 올레까지 A코스(16.5km), B코스(13km)||
  • 입력 : 2021. 10.21(목) 16:28
  • 편집에디터

한담산책로. 차노휘

1) 올레에 대한 믿음

15번 코스는 두 갈래 길이 있다. 한림항에서 중산간을 거쳐서 고내포구로 가는 A코스(16.5km)와 서해바다를 끼고 고내까지 가는 B코스(13km)이다. 나는 두 길 모두 걸었다. 짧은 기간 안에 올레 스탬프 완주만을 목적에 둔다면 한 군데만 가면 된다. 이미 두 군데를 걸어본 나는 어느 한 곳도 지나칠 수 없었다. 또한 올레에 대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다. 그 믿음이란 그 지역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을 선택해서 기꺼이 도보여행자들에게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배려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 중산간으로 가는 A코스를 걸을 때는 내내 비가 왔다. 비는 풍경을 더욱 생생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늘 배낭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던 우비의 존재감을 드러내준다. 배신도 있다. 방수가 된다는 신발이 그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젖은 신발을 신고 한림항에서 출발하여 대림안길 입구로 들어가서 비닐하우스가 있는 밭길을 한참을 걷다가 또 이어지는 밭길, 동네길 그리고… 옥으로 된 미륵보살이 있는 화려한 선운정사에서 한숨을 돌리고 납읍초등학교 근처 금산공원에서도 5km를 더 걸어서 마무리할 수가 있었다. 서해바다를 끼고 거닐 때는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부실 정도로 나를 유혹했다.

한림항. 차노휘

올레를 걸을 때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이동을 하겠지만 나 같은 경우는 걸어야할 출발지가 한 시간 삼십분 정도 버스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까지는 같은 숙소에서 움직인다. 제주도는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고 교통체증도 심하지 않다. 버스 안에서 차장 너머로 보는 풍경 또한 운치 있다. 대략적으로 한 군데 숙소에서 5~6일 정도 머물렀다. 한림항에 오기 전에는 서귀포올레센터 인근에서 6일을 묵었다. 그곳에서 2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한림항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정오였다. 15번 코스 시작 스탬프박스가 한림항에 있는 비양도 도선대합실. 숙소와는 3분 거리. 다른 날보다 늦게 출발해야 했던 그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5-B는 다른 거리에 비해 짧으면서도 서해바다의 느긋함과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오른쪽으로는 그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마을을 따라 걷다보면 모래사장이 반짝이는 곽지해수욕장에 다다른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밟아도 좋을 만큼 고운 모래, 그곳에서 애월리까지 1,200m 이어지는 한담 산책로는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핫플레이스'이다. 비교적 젊은 여행객들로 붐비는 그곳을 지나면 애월 환해장성을 만나고 방파제가 예쁜 애월항이 눈에 들어오면서 여정의 끝인 고내포구에 도착한다. 고내포구에서 15번 종점 스탬프를 찍고 202번 버스를 타고 다시 한림항에 도착했을 때 여전히 갈매기들이 합창을 하며 나를 반겨주었다. 한림항은 사람보다는 갈매기들이 더 많았다. 그 너머 비양도도 느긋하게 나를 맞이하는 또 다른 호스트였다.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삶의 공간. 차노휘

2) 비양도의 전설 그리고 한림항

항구와 가까운, 오래된 여관을 리모델링한 숙소는 귀만 기울이면 갈매기 소리를 시도때도 없이 들을 수 있었다. 봄이 오기 전 2월의 남아있는 한기를 난방으로 날려 보내 보지만 바닷가의 그 눅눅함은 세월처럼 겹겹이 쌓이는지 아침에 일어나면 온통 소금기를 둘러 쓴 느낌이다. 소금기를 둘러쓴 것은 그 주위의 풍경 또한 마찬가지이다. 코로나로 문 닫은 유흥업소들, 한산한 재래시장 골목, 빈 골목의 쓰레기를 쓸고 가는 스산한 바람소리… 한때 선원들의 유흥으로 왁자지껄했을 그곳을 상상해보지만 그곳은 단지 소설 속의 공간일 뿐이었다. 내가 대면하는 것은 정박한 어선 너머로 검붉은 빛깔이 수많은 깃발을 물들일 때 느끼는 어떤 안도감 내지 흥분이다. 아마도 넓은 바다로 열려있지만 저녁만이 가지는 집과 같은 포근함 속에 다음 날 출항의 긴장감이 내게 전해진 것이리라.

천연적인 피난항 한림항. 그것은 한림항 북쪽에 위치한 비양도가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비양도 도선항을 지나칠 때마다 저곳에 가봐야지 하면서도 끝내 가보지 못한 곳. 그 섬의 전설은 의외로 재치 있다.

선운정사가 있는 풍경. 차노휘

제주도 화산섬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비양도는 떠돌이 섬으로 일단 낙인이 찍혀있다. 그 출발지는 중국이다. 그래서 중국에 있던 오름이 날아와서 안착한 순간 잘못 왔다는 판단에 다시 날아오르다가 몸이 굳어버렸다, 그래서 비양도 오름이 돌아앉은 모양새이다, 조류에 밀려 한림까지 왔는데 마침 임신한 해녀가 해초를 캐다가 오줌이 마려워 올라가서 오줌을 누었더니 그곳에서 정박했다는 등의 전설이다. 떠돌이, 임부, 정착 등의 키워드를 미루어 짐작컨대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자 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욕망을 반영한 것이리라 예측 하면서도 올레를 걷는 것만큼이나 삶은 늘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목민 같지 않을까라고 돌려생각하다가 이주하면 정주가 그립고 정주하면 이주가 그리운 것도 사실이니, 도통 답이 없는 것이 또한 삶이라고 오늘도 걷는 채비를 하면서 나만의 개똥철학에 잠겨보는 것이다. 차노휘〈소설가, 도보여행가〉

먹구름을 잔뜩 이고 있는 풍경먹구름을 잔뜩 이고 있는 풍경. 차노휘

등대. 차노휘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