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1> 쉬엄쉬엄 느리게 흐르는 시간, 가파도의 '매력'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71> 쉬엄쉬엄 느리게 흐르는 시간, 가파도의 '매력'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 || 친환경 명품섬 가파도, 제주올레 10-1코스(4.2km) 상도포구에서 가파포구까지
  • 입력 : 2022. 02.24(목) 17:46
  • 편집에디터

송악산과 한라산이 보이는 들판 길. 차노휘

정이 있는 곳

모슬포 운진항에서 17분이면 도착하는 가파도. 가파도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람'이다. 오래 전 그곳에 처음 갔을 때 태풍이 불기 직전이었다. 택시 아저씨가 추천해 준, 이미 그 아저씨가 전화까지 해준 '춘자네' 집만 믿고 막배를 타고 갔던 그 날. '춘자네' 아주머니는 내가 여자라는 것을 알고서야 당신의 집은 '시커먼 낚시꾼들'이 많다며 다른 집을 소개해주었다. 그 다른 집은 지금은 반찬이 많기로 유명해진 식당이 딸린 숙소였다. 까다롭게 보이는 그곳 주인보다는 정감 있게 나를 안내해주었던 '춘자네' 아주머니를 잊지 못한 나는 그곳에 가면 상동포구 인근에 있는 '춘자네 집'에서 요기를 한다. 아마도 그분은 나를 알지 못할 것이다. 조용히 들어가서 별 특징 없이 먹고만 나오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곳에 들렀다. 아침 겸 점심으로 전복죽을 시켜놓았을 때 이동식 가스 난로를 살짝 내 쪽으로 밀어주는 주인 손길에 청보리 막걸리까지 주문하고 말았다. 막걸리는 육지에서 만들지만 막걸리에 들어가는 청보리만은 100% 가파도 거라면서 가파도 자랑을 한다.

청보리밭 너머 풍력발전기. 차노휘

가파도에서 제일 인기를 끈 행사라면 4,5월에 있는 청보리 축제일 것이다. 무려 17만평이나 되는데 해양성 기후로 인하여 밭작물이 잘 되어 수확물이 많단다. 겨울철에도 들판에서 푸릇푸릇한 청보리를 볼 수 있다. 밭 너머로 풍력발전기가 느리게 돌고 있다. 4, 5월이면 온 섬이 보리밭으로 변한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절정을 이룬다. 그렇다고 여행객을 위해 일부러 보리를 심은 것은 아니다. 여태껏 보리를 고집한 이유가 따로 있다. 일손이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곳 주민들은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고 물질을 한다. 묵은 밭으로 놓아둘 수는 없어서 씨만 뿌려 놓으면 잘 자라는 보리농사를 선호한단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드넓은 보리밭과 돌담, 바다가 한데 어우러져 가파도만의 색깔을 만들어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운 나는 올레길 리본을 따라 상동포구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돌기 시작했다. 막걸리 때문인지, 아니면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은 바람 때문인지 두 볼이 금세 붉게 달아올라왔다.

소라로 멋을 낸 담장. 차노휘

가파도의 주봉(主峯)

가파도를 걷다보면 내내 나를 따라오는, 아니 나를 감시하는 듯한 산이 있다. 바로 송악산이다. 마라도가 보이는 가파도 북서쪽 해안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한라산과 송악산을 볼 수 있다. 눈 쌓인 한라산이 배경처럼 은은하게 뒤로 물러나있다면 비교적 인근에 위치한 송악산은 산봉우리만 떼다가 놓아둔 것처럼 평지에서 저 혼자 우뚝 솟아 그 위엄을 떨친다. 마치 가파도의 주인처럼 말이다. 배를 타고 운진항에서 출발할 때부터 내내 그것이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라산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면 누군가의 말처럼 바다에 잠기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가파도는 우리나라 섬 중에서 가장 해발이 낮다. 그래서일 수도 있다. 높은 구릉이나 산이 없는 이곳에서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 다 볼 수 있어서 제법 인근에 위치한 송악산이 이곳 주봉인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것도 말이다.

주봉을 제일 잘 볼 수 있는 것은 제일 해발이 높은(20.5m), 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한 소망 전망대이다. 그곳에서는 송악산뿐만 아니라 제주 본 섬과 한라산, 마라도, 푸른 바다를 실컷 볼 수 있다. 내가 포토존이 설치된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 무리의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매년 도민의 무사 안녕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한라산신제'처럼 한라산을 향해 설문대 할망에게 소망을 기원하는 장소라고도 한다.

바다를 끼고 섬 한 바퀴 돌기. 차노휘

가파도

제주도 주변에는 조그만 섬이 많다. 무려 62개의 섬이 마치 본섬인 제주도를 호위하는 병사들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다. 그중에 8개 유인도와 54개 무인도가 있다. 어미 섬인 제주 본섬과 아주 가까운 유인도는 가파도, 마라도, 비양도, 우도이며 이들 모두 화산섬이다.

가파도는 제주도의 부속 도서 중 네 번째로 큰 섬이다. 전체적인 섬 모양이 가오리가 넓적한 팔을 한껏 부풀리며 헤엄치는 형상이다. 그래서 섬 이름도 섬 전체가 덮개 모양이라는 데서 따온 '개도(蓋島)'를 비롯하여 '개파도(蓋波島)', '개을파지도(蓋乙波知島)', '더위섬', '더푸섬' 등이다. 이외에도 하멜의 캘파트(Quelpart)는 제주도를 가리키는 표기인데 가파도에서 유래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섬 지형이 평탄하고 풀이 많이 자라고 울타리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는 바다가 자연 경계가 되기 때문에 천연 목장으로도 이용되었다. 가파도를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올레길을 걷는 사람과 낚시하는 사람, 청보리 축제 때에는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몰려오는 여행객들이다. 그 전에는 마라도를 가기 위해 살짝 들르는 곳 정도였다고 한다.

밭담이 있는 집. 차노휘

사철, 가파도는 나를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다. 17분 정도 배를 타야하지만 그 거리만큼 본섬과 달리 느리게 시간이 흐른다는 점이다. 섬을 쉬엄쉬엄 돌아도 2~3시간이면 족하다. 사방 뚫려 있어서 시야를 방해받지 않는다. 골목골목을 걷는 것도 운치가 있다. 돌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여 집담을 쌓고 집안을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다. 소라를 이용해서 멋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도 세월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하나둘 건물이 늘어나고 있다. 상도포구 앞 자전거 대여점, 2,3층 높이의 현대식 건물들, 커피 숍 그리고 숙박업소 등. 코로나와 비수기여서 그런지 문을 닫아놓은 상점들이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나는 늘 변함없이 나를 반기는, 너무 힘차서 좀 두렵기도 하는 오늘도 어김없이 낮은 섬으로 밀고 들어오는 파도 포효 소리를 들으며 가파포구에서 마지막 스탬프를 찍고 다시 상도포구로 향해 돌아섰다.

길고양이 숙소. 차노휘

교회가 보이는 포토존. 차노휘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