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서홍원> 셰익스피어의 명 독백(4) 살인의 명분-오델로의 집착과 데스데모나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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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적 유전자·서홍원> 셰익스피어의 명 독백(4) 살인의 명분-오델로의 집착과 데스데모나 죽이기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 입력 : 2022. 04.27(수) 16:25
  • 편집에디터

오손 웰스의 영화 오델로(1952)의 한 장면.

이번 회에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또 다른 작품인 '오델로(Othello)'에 나오는 마지막 독백을 통해 셰익스피어의 인간 탐구를 계속해 본다.

극의 마지막 장면으로 들어가 보자. 어두운 밤, 어두운 침실. 촛불 아래에 천사처럼 자고 있는 아름다운 아내 데스데모나(Desdemona)를 바라보며 주인공 오델로는 다음과 같이 독백을 시작한다.

명분이 있음이야, 명분이 있어, 내 영혼아.

그 이름을 대지 않게 해다오, 너희 정결한 별들아!

명분이 있음이야.

명분. 원문으로는 'cause(이유)'. 오델로는 자신의 아내 데스데모나를 죽일 이유, 더 정확하게는 명분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명분을 이름하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정결한 별들(chaste stars)'을 부름으로써 사실상 그 이름을 대고 있다. 정결함, 순결과 정조.

오델로는 왜 정결의 명분으로 데스데모나를 죽이려 하는가? 두 사람의 사랑은 출발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이 극의 악당인 이아고(Iago)는 두 연인이 만나고 있을 때 데스데모나의 아버지를 찾아가서 "한 검은 숫양이 당신의 하얀 암양에 올라타고 있다"고 알려준다. 데스데모나는 당연히 백인 여성이며 그래서 하얀 암양에 비유된다. 문제는 오델로인데 그는 무어족(Moor)으로서 흑인 남성인 것이다.

비록 무역도시인 베니스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유색인이며 이 도시의 수호자로서 존중을 받고 있는 장군이지만 데스데모나에 있어서 오델로는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이다.

데스데모나는 아름답고 젊은 백인여성 표본이며 뭇 남성들의 이상형인 그녀와 대비되는 오델로는 자기 자신의 피부색, 나이와 심지어 남성으로서의 자신감에 대한 열등감을 감추고 있었다.

이런 열등감 만큼이나 데스데모나에 대한 그의 숭배는 절대적이다. 다시 독백으로 가보자.

그러나 나는 그녀의 피를 흘리지 않으리.

눈보다 더 흰, 기념비에 쓰이는 흰 대리석 같이

매끄러운 그녀의 살결에도 흉터를 남기지 않으리.

아내의 정결성을 의심하는 자가 내뱉을 말이 아닌, 섬뜩한 말이다. 장군인 그가 칼을 들지 않고 데스데모나를 죽이려는 데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집착, 광기가 보인다.

그럼에도 그녀는 죽어야 해, 그녀가 더 많은 남자를 배반하지 못하게.

부관 이아고의 이간질에 넘어간 오델로는 데스데모나와 또 다른 부관의 불륜을 의심하는데 결정적으로 부관이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소지하고 다니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서 의심이 확신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로써 오델로는 아내를 죽이기로 마음 먹는다.

이 시점까지 아내와 동료에 대한 신뢰를 보이던 고결한 오델로의 모습은 사라지고 악귀가 되어버린 의처증 환자만 남는다. 심지어 비겁하게도 오델로는 '명분'을 미래의 배신을 막는 데에서 찾는다. 그것도 자신에 대한 배신이 아닌 미래의 남자들에 대한 배신을 내세워서.

불을 끄고 그 다음에 불을 끈다.

내가 너의 불을 끄면, 너 타오르는 시종이여,

이를 후회하게 된다면 너의 종전의 빛을 되살릴 수 있어.

그러나 한 번 너의 불을 끄면,

너 최상의 피조물들의 정교한 표본이여,

그대의 빛을 다시 밝힐 수 있는 그런 프로메테우스의

열기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해.

셰익스피어가 즐겨 사용하는 촛불의 비유를 들어 살인을 표현한다. 촛불을 끄면 곧이어 그녀의 생명의 불도 꺼질 것이다. 촛불(타오르는 시종)을 끄고 그것이 후회되면 다시 불을 붙일 수 있지만 '최상의 피조물들의 정교한 표본'이라고 여겨지는 데스데모나의 생명의 불은 다시 살릴 수 없다. 인간을 창조하고 불까지 선물했다는 고대 그리스의 전설적인 프로메테우스 신이 오더라도 불가능하다. 이어서 데스데모나의 생명은 나무에 열린 장미꽃으로도 비유된다.

내가 장미꽃을 딴다면

그 꽃에 생명력을 넣어서 다시 자라게 할 수 없으니,

장미는 반드시 시들게 되지. 나무에서 그 향기를 맡아야해.

(키스를 한다)

아, 치유력이 있는 숨결이야. 정의로 하여금 칼을 거의 부러뜨리고 싶게 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구나.

번 더, 한번 더.

죽어서 이처럼 되어라. 그러면 나는 그대를 죽이고

그 후에 그대를 사랑하리. 한 번 더, 그리고 이게 마지막이야.

달콤함이 이토록 치명적인 적은 없었어. 눈물을 멈출 수 없구나.

그러나 잔인한 눈물이야. 이 슬픔은 하늘의 것.

사랑하는 곳을 치는구나. 그녀가 깨어나고 있어.

정상적이지 않은 사랑임이 분명하다. 꽃을 따면 시들게 되니 따기 전에 그 향기를 맡는다. 향기를 맡는다는 것은 키스를 말한다. 문제는 오델로가 그 향기를 맡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번 더, 또 한 번 더, 그리고 마지막에 또 한 번 더. 그녀의 향기는 정의(정의라고 듣고 질투라고 생각하자)의 칼을 거의 멈추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의 해법은 죽여서 그녀를 박제시키는 것. 데스데모나를 죽이고 사랑하겠다는 오델로의 말을 통해서 그의 소름 돋는 광기와 집착을 또 한 번 느낀다. 역설적으로 오델로는 정의의 칼을 쓸 생각이 애당초에 없었다. 데스데모나를 그녀의 베개로 질식시켜 죽였으니.

서홍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