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15일자 전대신문 '민주화 목소리'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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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15일자 전대신문 '민주화 목소리' 생생
●5·18 42주년 특집-기록을 넘어 시대를 넘어Ⅱ||713호 발행 직후 계엄당국 압수||1면 “광장에 메아리친 민주 열망”||보도검열 대상임에도 직설 표현||보도 후 기자들 강제 사직·휴간도
  • 입력 : 2022. 05.11(수) 17:06
  • 도선인 기자
5·18민주화운동 직전인 1980년 5월15일 발행된 전대신문 713호. 계엄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남대 학생들과 교수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5·18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전남대학교. 광주항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직전, 계엄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전남대 학생들과 교수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실린 대학신문이 공개됐다.

이 신문은 1980년 5월15일 발행된 전대신문 713호로, 발행 직후 계엄당국의 언론검열반에 의해 남은 신문과 관련 취재자료 등이 압수되기도 했다.

전대신문 713호 1면에 '광장에 메아리친 민주 함성'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려있다. 기사에는 옛 전남도청 앞에서 5일째 계속된 1980년 5월14일 민족민주화성회의 내용이 담겼다. 평화시위에 가까웠던 민족민주화성회는 16일까지 진행되는데, 5월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돼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등교하고자 하는 학생들과 시위세력을 향한 무자비한 진압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옛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열린 민족민주화성회는 박관현 열사(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등 전남대 학생회가 주도적으로 진행한 집회였다. 전대신문 보도를 보면, 이때 지역의 6개 대학이 모여 '어용교수 퇴진', '계엄령 해제' 등을 요구하는 공동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전남대 교수협의회는 지식인으로서 학생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특히 1만여명의 학생들과 200여명의 교수들이 대열의 맨 앞에서 질서정연하게 시위를 주도했다. 7면에는 민족민주화성회를 마무리하고 금남로와 광주역을 지나 다시 전남대로 돌아오는 학생과 교수들의 대행렬 모습도 사진으로 보도했다. 이를 통해 5·18민주화운동 직전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얼마나 크고 대중적이었는지 웅변해 주고 있다.

학내 상황에 대해서는 전날(1980년 5월13일)과 다르게 기동경찰대와 충돌이 있었다는 보도를 통해 5·18민주화운동 직전 한층 급박해진 광주의 상황을 느낄 수 있다. 경찰들은 2대의 화학차로 페퍼포크와 최루탄을 발사해 학생들이 고통스러워했다는 소식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들은 "광주의 수많은 민주인사가 인권을 유린당하고 학생들이 학교에서 추방·수감된 반면 불안과 경제적 혼란이 크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고 있다"고 적시했다.

계엄령 전국확대 이후 첫 아침이 밝은 5월18일, 계엄당국이 전남대 앞을 막아서 학생들의 진출입을 강제로 통제했다. 민족민주화성회를 주도하고 어용교수 퇴진, 계엄령 해제 등 요구하는 시위가 갈수록 활발하게 전개됐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713호 전대신문도 계엄당국의 언론검열 대상이었다.

1979년 10월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언론검열이 상시적으로 이뤄졌다. 광주에서는 옛 전남도청 2층에 계엄당국의 언론검열관실 설치돼 모든 방송과 신문이 언론검열을 받았다.

특히 1980년 4월부터는 언론검열을 강화하기 위해 505보안대가 이 업무를 맡아 분위기는 더 삼엄해졌다. 당시 언론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 민주, 자유, 정의, 압박, 탄압 같은 표현은 기사에서 사용할 수 없었다. 이런 검열 과정은 전남대 학보에도 적용됐다.

전대신문제작을 도왔던 당시 편집위원 지모씨는 "매주 전남도청에 직접 가서 계엄군 관계자들을 만나야 했다. 특정 기사와 표현을 못 쓰게 하니 따지고 싸웠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5·18민주화운동이 시작되기 직전 마지막 신문인 5월15일자 713호 신문은 언론검열 과정에서도 '민주', '계엄령 해제', '노동3권 보장' 등 정확한 표현을 썼다. 발행 이후 계엄당국의 눈초리가 이 신문에 쏠려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시대의 기록에는 대가가 따랐다. 1980년 5월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5월15일 배포된 신문 일부와 취재자료는 계엄당국에 의해 수거됐다. 이후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713호는 전남대 상황을 그려낸 마지막 신문이 되었다.

당시 학생기자로 활동했던 류모씨는 "713호는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대해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해 설명한 신문이었다. 배포 이후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휴교령이 결정되는 등 상황이 급박해졌는데, 계엄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을 듣고 배포되고 남은 713호 몇 부를 챙겨 숨겨놓았다"며 "신문 때문에 2·3년 차 기자들은 다 사직처리 됐고 나 역시 시위 현장에서 계엄군에 잡혀 수모를 겪었다"고 말했다.

신원경 전대신문 편집위원은 "5·18민주화운동 직전 광주의 상황을 보도한 713호를 마지막으로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전대신문 발행은 중단됐다. 9월 개학 이후 발행이 재개되는데 보도의 성격이 달라진다"며 "이전에는 민주주의를 향한 목소리를 담거나 관련 담론을 형성했는데 9월부터 보도의 성격이 학내 소식과 학술적 내용 위주로 변했다. 1987년에 와서야 전대신문에서 5·18민주화운동이 언급되기 시작하는데, 90년대 들어서 활발히 진행된 5월운동에 대한 보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한편 전남대 신문방송사는 오는 17일부터 24일까지 8일간 광주 동구 청소년삶디자인센터에서 '말하라, 시대의 목소리로'를 제목으로 아카이브 전시를 개최한다. 전남대 개교 7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이번 전시에서 당시 배포가 중단되었다고 알려진 1980년 5월 15일자 전대신문 713호 복제본 한정수량을 시민들에게 재배포한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